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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경의 문화기행 '서울, 북촌에서'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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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경의 문화기행 '서울, 북촌에서' <11>

서울 성돌이 2 - 끊일 듯 이어지며 다시 혜화문까지

서울성은 태조때 정도전이 책임자가 되어 쌓기 시작해 세조 문종 광해군 숙종 영조 고종때 성벽과 성문을 고쳐가며 관리했다. 무거운 돌을 다루는 힘과 가공기술,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쌓는 법, 효과적인 방어수단으로 옹성 치성 성첩 등을 설계하는 지혜 등등 한국인의 성 쌓는 기술은 수천년간 집적되어 왔다.

고대 일본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성을 쌓은 것은 한국인들이었고 고구려가 요동에 쌓은 성은 중국과의 전쟁때 중요한 거점이었다. 한국은 성(城)의 나라라고도 한다. 국내에만 1천5백여개 산성이 있다.

<사진 1> 입사장 심부길의 작품에 그려진 남대문과 북악산. 서울을 명쾌하고 상징적으로 그려냈다. @홍정실

당장 서울에만 몽촌토성, 풍납토성, 아차산성, 북한산성, 탕춘대성, 서울성이 생각난다. 성과 성문으로 두른 고대의 중요도시 남한산성, 수원성, 부소산성, 상당산성, 문경새재 등등 얼마든지 떠오른다. 왜구들을 막기 위해 쌓은 서해안 도시 평지의 오래된 읍성을 처음 보았을때 생명의 힘이랄까, 아주 오랜 원형의 기억같은 것을 생각했다. 대대로 사는 땅을 지키기 위한 오랜 전통의 사투현장이다.

서울 성돌이를 하는 동안 길이 돌아가는 곳에서 성벽은 부드럽게 부풀은 배처럼 나와있기도 하고 곧바른 데서는 수직으로 솟기도 했다. 오랜 세월 무너지지 않고 남은 부분이 꽤 있었다. 시대에 따라 성돌모양은 정사각형, 장방형, 큰돌, 작은돌 등으로 달랐다.

서울성은 수구, 성가퀴(성벽위에 쌓은 낮은 담. 성첩, 여장이라고도 한다), 옹성, 치성, 성랑, 성문이 다 갖춰지고 성벽을 25척 높이로 쌓았다는 기록을 봤다. 그런데 지금 보는 성벽은 다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고 새로 쌓은 성곽에서 옹성 성랑 치성 그런 고대의 시설도 보지 못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때 서울성이 군사적으로 어떤 구실을 했는지 궁금하다.

평지엔 자취도 없어지고 산을 타고있는 높은 곳에만 무너진 채 남아있던 서울성은 1960년대, 1970년대부터 복원되기 시작했다. 성가퀴에는 옛날 했던 대로 총을 쏠수 있는 세칸씩의 총안도 갖춰졌다. 이제는 이리로 총을 쏠 것이라는 긴박감은 없고 성을 따라 도는 일은 그저 평화로운 산책일 뿐이다.

문루가 새로 건축되어 혜화문도 1994년 세워지고 낙산에 성이 대대적으로 복원됐다. 2005년 2월 중에도 중구 광희문에 붙은 성곽에 성가퀴가 100여 미터 새로 축성됐다. 없어진 두 문, 서대문 서소문의 복원이야기도 나온다. 그렇게 해서 지금 서울성은 6개 성문에 둘레가 원래의 절반조금 넘는 10.6 km에 이른다. 잊혀졌던 면목이 그나마 자태를 드러내게 된 것이다.

<사진2> 오래된 성벽 사진 하지권

인왕산에서 내려와 사직동과 행촌동 사이 한 어린이집 담에서 서울성이 끊어진 단면을 확인했다. 그 뒤에는 한참을 건너뛰어 숭례문(남대문)을 지났다.

옛날 사진을 보면 서울의 정문으로서 남대문은 좌우 산언덕에 높은 성벽이 이어져 웅장한 문의 규모를 보인다. 서울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의 하나인데 양쪽 성벽이 다 사라진 채 동그마니 문루만 남은 숭례문은 지금 길 한복판에 갇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문루안 천장에는 상량문이 적힌 보와 구름 속을 나는 용그림이 단청으로 그려져 있다. 어느 성문이나 다 접근이 안돼니까 이런 실제적인 것도 들여다 볼 수 없어 섭섭하다.

유교를 지배이념으로 삼은 조선의 서울은 도시계획에도 이를 반영해 4대문 이름에 인의예지신을 한글자씩 따서 넣었다.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에다 북문은 세검정의 홍지문에 지자를 넣었고 중앙은 보신각의 신자가 들어가게 됐다. 문마다 특별한 용도도 있었다. 유배가는 사람들은 서대문으로 나갔다는 것 같다. 숙정문은 평소엔 닫았다가 가뭄이 심할 때 비내리기를 바라 열어놓는 문이었다.

서울의 옛 도시계획을 이해하는 데는 이런 풍수지리설, 음양오행, 유교의 이해가 필수적이다. 4대문중 3대문의 편액이 가로쓰임인데 숭례문만은 세로로 쓰여 있는 것도 숭례의 두 글자가 불꽃처럼 서서 마주보는 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르기 위한 것이라 한다. 광화문의 해태조각처럼.

남대문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서도 많이 다뤄졌다. 작고한 입사장 이학응이 만든 브로치는 북악능선을 배경으로 숭례문의 이층 문루를 금실 은실을 박아 그려넣었다. 오래전 그 제자 홍정실씨(중요무형문화재 입사장)가 보여준 이 무늬만큼 서울을 상징적으로 그려낸 것도 없다.

서울 숭례문까지 먼길을 오는 과객들을 묘사한 옛날 이야기가 생각난다. 서울 가는 사람들은 무리를 만들 때까지 주막에서 기다렸다가 여우가 나타나는 험한 열두고개를 같이 넘어 와서 남대문에 닿아 성문이 열리는 파루칠 때를 기다렸다. 성문 앞에는 으레 주막집들이 있어 성문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얘기며 길을 대어가는 여정 등이 나오곤 한다. 정복근의 희곡 '산넘어 고개넘어'는 이 열두고개를 넘어 서울로 오는 긴박한 과정의 여러 가지 사건을 묘사한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이 한국 최고의 뮤지컬이라고 생각한다.

<사진3> 길이 돌아가는 곳의 성벽은 약간 부풀은 배처럼 나와있다. 사진 하지권

남쪽에서 올라오던 과객들이 남대문을 쳐다보는 심정은 서울역에 닿아 밤새 달려온 완행열차에서 내린 기분과 비슷했을까? 긴박한 상황에서 순라꾼들 몰래 밤에 성문을 넘는 사람들 이야기는 통금 있던 시절 집에 돌아가는 모험담보다 더 심각했을 것이다.

사직동에서 끊긴 서울성은 숭례문 지나 후암동 힐튼호텔 올라가는 오른쪽 길에 한뼘 연결되었다. 몇길 아래 성밑은 남대문시장의 갓길이었다. 거기서 남산공원으로 올라가 한참을 헤매다가 남산 식물원 뒤에서부터 1770개의 시멘트 계단을 밟고 남산 꼭대기 봉수대 있는 곳, 옛날 국사당자리까지 이어진 성벽 안쪽 야트막한 성첩을 끼고 오를 수 있었다. 성가퀴에서 성 바깥쪽을 내려다 볼 수는 있었지만 그쪽은 출입금지구역이었다.

그런데 여기 시멘트계단을 오르는 주위는 남산 꼭대기를 가로지르는 산속인데도 자연스럽고 편안한 맛이 전혀 없었다. 근대적 치장을 했지만 남산 공원 전체가 어딘지 부자연스러웠다. 대규모 터를 깎아 신사를 세웠던 일본식 개발의 뒤끝이라 그런지 모른다. 안중근 기념관, 김구 동상, 이시영 동상이 신사를 허문 공원터에 들어서 있고 남산식물원에는 재일동포가 조국을 사랑해 기증한 어마어마한 선인장이 있고 예쁜 선인장도 팔았다.

남산 산신령을 모시고 맨날 굿을 하던 국사당은 1925년 인왕산으로 옮겨졌다. 일대는 일본신사 자리가 되었다가 광복후 제일 먼저 허물었다고 한다. 서울타워 앞에서 다시 나지막한 성벽을 끼고 순환도로로 내려오는데 성벽에는 가까이 다가가 볼 수 없었고 나무에 가려 주의해 보지 않으면 성벽인 것도 모르고 지나칠 만했다. 순환도로를 많이 다녔다 해도 차량이동으로는 더 알아채기 어려울 것이다. 성의 줄기는 순환도로 중간 상춘약수터부근에서 군부대 영내로 들어가버려 다음 시작을 찾아내기가 보통 힘들지 않았다.

남산의 서울성은 전체적으로 아주 눈에 띄지 않게 비켜서 있었다. 몇 년동안 매일같이 남산 산책을 한다는 이도 '남산에 성이 있느냐'고 되물을 정도였다. 남산공원지도에도 성의 표시는 되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나와있지 않았다. 게시판도 서울성곽 전체를 설명한 것일 뿐 어디서 끊어지고 어디로 연결된다는 정보는 없었다.

한참 찾으니 국립극장 뒤 남산산악회로 올라가는 산길에 철문이 열린 틈으로 성벽이 내려와 있는 게 언뜻 보였다. 문 안쪽에 온전한 서울성이 높은 바깥담을 드러내고 군부대에서부터 접근 못한 뒤를 이어 산꼭대기서부터 내려오고 있었다. 의젓한 어른이 두루마기 입고 걸어오는 것 같았다. 역으로 3백 수십개의 자연석 돌을 계단삼아 밟고 성 바깥쪽을 따라 올라갔다.

그런데 이 구간이 남산에서 유일하게 자연스럽고 아름다웠다. 오르내리는 내내 치자꽃 향기가 풍기고 나비가 날아다니며 우거진 나무의 녹음이 싱그러웠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지 이끼 앉은 돌계단과 조용한 공기가 한 여름의 천국같았다. 어려서 남산 산속에서 비를 만났었는데 그때 느낀 숲의 적막감, 어두운 숲속에서 본 검푸른 나비, 땅에 고여 빛나던 물웅덩이가 생각났다.

비질이 선명한 개인 집같은 산악회 넓은 마당에는 배드민턴 치는 몇 사람이 있고 점심시간에 와서 혼자 '엇둘 엇둘' 철봉체조하는 남성이 있었다. 딴 세상같은 분위기였다. 한 옆에 산에서 나오는 약수터가 있었다. 맑은 물이 얼음같았다. 누군가가 떠놓은 정한수가 풀그늘 속에 놓여있었다. 산좋고 물좋은 산수의 한국적 정서는 이런 것에 가까운 것이리라 싶다.

그 다음 성의 연결은 도저히 이어서 찾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역으로 장충체육관 옆에서 보이는 성벽부터 되짚어 1km 가량 따라 올라갔다. 성밖은 신당동의 노후된 주택가이고 성안쪽은 서울클럽, 자유센터, 타워호텔이 나란히 붙어있는 곳이었다. 타워호텔의 깊숙한 뒷마당 테니스장을 벗어난 울타리가 남산에서 이어지는 서울성이었다. 길도 끊어진 언덕숲속에 있어서 제 코스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성 안팎을 통하게 한 암문이 있었는데 처음부터 뚫어논 것 같지는 않았다.

장충체육관앞에서 연결되는 광희문과 성벽도 이어서 찾지 못하고 따로 찾아갔다. 퇴계로 끝 한양공고 맞은편에 잘생긴 광희문이 있었다. 성문 북쪽에 붙어있던 성벽은 도로확장으로 헐리고 남쪽으로 붙은 100 m길이 성벽은 며칠전까지 성벽위에 성가퀴를 쌓는 공사를 했다. 포천에서 떠온 화강암 성첩이 새옷 입은 듯 하얗게 보였다. 성의 바깥쪽과 안쪽이 이렇게 높낮이가 다른 구조임이 여기서 모형처럼 보인다.

공사를 한 원택건설로부터 현대에 와서 옛성 쌓는 이야기를 짧게 들었는데 흥미진진했다. 무게가 나가는 중량물을 일일이 가공해서 손으로 올려가며 하는 일이라 힘든 공사라고 한다. 아래 웃돌이 맞닿게 돌을 쌓으면 바깥으로 미는 힘이 생긴다. 성벽이 안 무너지고 튼튼히 버티게 하려면 약간씩 들여쌓기로 하는데 위치마다 성쌓는 법도 다르고 매우 전문적인 말로 설명해야 된다고 했다. 성쌓는 기술이 지금까지 전해진다는 게 신기해 보인다. 기능자 강신각씨는 40년 경력이었다.

광희문은 홍예만 남고 무너졌던 것을 1975년에 새로 건축했다. 지붕선이 우아하고 잡상을 얹은 기와지붕, 오래된 돌이 이 거리에 세워진 미술품 같았다. 남쪽으로 쌓은 성벽은 더 가면 '이병철씨네 집 있는 데로 간다' 고 했다. 그 말에 서울성이 장충체육관에서 길 건너 어느 지점으로 연결되어 광희문까지 오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동네에서는 이병철, 김종필씨 집이 일종의 지표였다.

광희문에서부터 흥인지문(동대문)까지는 아스팔트 길이고 이대병원 뒤로 해서 낙산으로 가는 성벽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곳 성벽 초입에 그 옛날 성벽공사 책임자들 이름이 새겨진 성돌을 몇 개 모아놓았다. 애초에 97구간으로 나눠 성쌓기를 했다니까 이들은 옛날 건설회사 대표들이다. 감역 金德生, 주성장 정吉山 金몽총이라고 기록에서 보았는데 돌을 직접 보니 마모되고 한자도 어려워 알아보기 어려웠다. 將 자가 여러번 나오며 成世珏, 全庸善, 折衍(절연)을 간신히 읽었고 다른 이름들이 여럿 있다.

남대문처럼 이층 문루로 된 동대문에는 옹성까지 있었는데 헐렸다. 복원하면 다양한 성문을 볼수있으니 좋지 않을까? 고종때인 1896년 동대문을 개축한 공사가 조선시대 서울성 최후의 공사였다. 흥인지문이라는 네글자는 낙산이 다른 산보다 지맥이 약해 이를 보하느라고 글자수를 많게 한것이라 한다. 참 철학적인 조상들이었다. 1920년대에 집에서 호미 하나 들고 나와 남의 집 김매주기 등을 하며 서울까지 걸어오던 북청출신 한 사람은 '동대문이 보이면 서울 다 온 것이니 그렇게 반가왔다'고 했다.

2,088m의 낙산성곽은 동대문에서 대학로를 지나 혜화문으로 연결된다. 낙산일대가 공원으로 개방되어 있었다. 산 전체가 화강암이라는데, 나무는 많아보이지 않았지만 어느 구간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성에 걸터앉아 바람을 쐬고 있었다. 한 인기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이 성곽부근에 사는 걸로 나왔다. 그만큼 이곳은 대중화된 장소가 되었다.

성 안쪽 공원 안에 홍덕이밭이란 팻말 붙은 데가 있다. 효종이 봉림대군시절 심양에 볼모로 가있을 때 나인 홍덕이가 채소를 가꿔 매일 김치를 올렸다. 돌아와 그 맛을 못 잊은 효종이 홍덕이에게 낙산 중턱의 밭은 가꾸게 한 곳이라 한다. 홍덕이는 대장금같은 여성인가 보다. 뛰어난 솜씨였음을 한눈에 알게 한다. 지난 여름에 보니 두세평 밭에 고추 가지 배추가 심어져 있었다. 이렇게 작은 터였을까? 누군가 홍덕이나 대장금같은 여성이 전통적으로 이 밭을 맡아 근사하게 가꾼대도 좋을 것 같았다. 서울성에 이런 이야기가 담겨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성 밖은 창신동, 삼선동 주택가였다. 성바깥쪽에 좁은 길 공백만을 남겨두고 재개발을 기다리는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암문이 많아서 이곳 주민들이 쉽게 공원쪽으로 나올수 있게 했다. 성벽끝은 혜화동 가톨릭신학교 담벼락이 되면서 그 이상은 더 접근할 수 없었다. 길건너 옮겨지은 혜화문으로 돌아와 성돌이를 끝냈다. 전에는 성돌이 하는 사람이 늘 많았다고 한다. 이 취미가 사람들 사이에 되살아났으면 한다.

사진4,5,6 하지권씨가 사진 보낸데요 순서는 이대로 안하고 편집자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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