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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속살', 오사카가 수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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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속살', 오사카가 수상하다

[동아시아를 묻다] 오사카 : 일본의 갈림길

1. 민주주의의 민주화

하시모토 시장의 기세가 거침이 없다. 일국의 총리보다 지방의 수장이 나라를 이끄는 듯하다. 지난해 '지역 정당' 오사카 유신회는 지방 선거에서 낙승을 거두었다. 민주당, 자민당은 물론 공산당까지 하시모토의 반대편에 섰음에도 가뿐히 승리한 것이다. 내친김에 하시모토 총리 대망론마저 꿈틀거린다. 지방을 접수한 데 이어 중앙으로 진격할 채비를 갖춘 것이다. 그래서 하시모토에 대한 비판은 '좌우합작'이다. 우파는 국가를 해체하는 무정부적 경향을 성토하고, 좌파는 (반대로)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는 국가주의 성향을 염려한다.

하시모토 또한 보수와 혁신을 싸잡아 욕보인다. 선거에서 뽑힌 자신이야말로 '민의'를 체현하고 있다며, 그를 비판하는 좌/우 지식인들을 '민주주의의 적대자'이자, 무능한 꼰대로 폄하한다. 나아가 '독재가 필요하다'는 위험 수위의 발언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만큼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은 것이다. 3.11, 오키나와, TPP 등 일본의 틀을 다시 짜는 커다란 문제에 중앙 정치가 좀체 무력했던 탓이다. 즉 하시모토 현상의 기저에도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정당/의회제 민주주의의 위기가 자리하고 있다. 오사카의 예외상태가 아니라 동시대의 보편적 징후인 것이다. 정녕 '민주주의의 민주화'는 전 세계의 공통 화두라 하겠다.

2. 무엇을 할 것인가

하시모토는 일본 민주주의의 맨얼굴을 드러냈다. 전후에도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한 적이 없다는 통렬한 자각을 촉발한 것이다. 그래서 평화헌법과 전후 민주주의가 번영을 가져왔다는 신화 또한 산산이 부서졌다. 고도성장이 선사한 착시였을 뿐이다. 좌·우파 지식인들이 하시모토의 선동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는 무력함도 여기에 있다. 그들이야말로 '전후 민주주의'를 신념으로 떠받들던 최후의 보루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시모토는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있다기보다는,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되 비추는 거울에 가깝다. 그 오래된 기만을 독재도 불사한다는 결연한 몸짓으로 정면 돌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언행에서 언뜻 100년 전, 레닌을 떠올리는 까닭이다.

일찍이 레닌은 의회주의에 대하여 지극히 부정적 견해를 제출했었다. 한낱 고급스러운 수다쟁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유명한 '무엇을 할 것인가'의 출발점이다. 마르크스주의의 번다한 말 놀음을 뒤로 하고, 전위의 결단을 촉구한 것이다. 일거에 '정치 주도'로 비약했다 하겠다. 따라서 하시모토 현상이란 레닌의 복권을 요청하는 한 동유럽 철학자의 사유와 그리 멀지 않은 사건일 수 있다. 의회제의 숙명적 한계를 고찰한 칼 슈미트가 재조명되고 있는 학계 일각의 흐름과도 상통한다.

그러나 우리는 20세기 최대의 정치주도가 최악의 관료제 국가의 출현으로 귀결되고만 역설을 알고 있다. 그래서 68혁명 이래 신좌파들은 경쟁적으로 국가로부터 철수했다. 페미니즘, 생태주의, 다문화주의 등 탈중심적 하위 정치를 열어젖힌 것이다. 헌데, 타자를 존중하고 소수자에 귀 기울이는 그 사려 깊음이 '세미나 좌파'의 습성을 강화시킨 측면도 있다. 결정과 결단이 없는 '탈정치의 정치'가 만연한 것이다.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고, 주변성과 소수성으로 탈주를 거듭하면서, 정작 중심과 중앙은 공백지대가 된 것이다. 그 정치 부재의 빈 공간을 신우파가 잠식했다. 신좌파의 약진 기간이 곧 신자유주의의 전성기였음을 뼈아프게 돌아볼 일이다.

따라서 하시모토 현상은 정치의 귀환을 요청하는 인민의 다급한 열망일지 모른다. 신좌파에 따귀를 날리는 인민의 응징이자 복수에 가까운 것이다. 돌아보면 새 천 년의 일본은 줄곧 정치에 대한 열망과 좌절을 반복해 왔다. 이시하라, 고이즈미, 오자와 등 지난 10년 정가를 주름잡던 거물들은 하나같이 반정당적 정치, 반의회적 정치를 구사했다. 가상적으로나마 정치의 재생을 맛보게 해준 것이다

그리하여 질문해야 할 것은 왜 오사카는 '이제야' 극장정치가 일어나고 있는가이다. 도쿄를 휩쓴 현상이 뒤늦게 오사카에 도착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오사카는 신우파 정치가 쉬이 침투하지 못하는 사회의 보호막이 두텁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것을 최종적으로 해체하고 있는 이가 하시모토라 하겠다. 허나, 좌우에 기댄 비판은 이미 낡고 고루해졌다. 그래서 좌우의 도래 이전, 오사카의 역사성과 지역성에 착근하여 새로운 무기를 담금질할 필요가 있다. 재차 거대한 뿌리로 하방하는 것이다.

3. 오사카와 도쿄

오사카는 본디 도쿄를 능가하는 활기찬 도시였다. 그래서 한때 '동방의 맨체스터'이자 '대(大)오사카'라고도 불렸다. 그러다 1930년대 전시체제가 구축되면서 위상이 역전된다. 군수산업이 중시되면서 경공업과 민생경제 중심의 오사카는 주춤한 것이다. 전후에도 도쿄의 위상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미·일동맹체제가 태평양 연안의 도쿄-요코하마 중심의 고도성장을 견인한 것이다. '상도'(商都)로서 명맥이 유지된 오사카의 마지막 자존심이 꺾인 것은 1962년이다. 올림픽(1964)을 전후로 소매업도 도쿄가 앞지른 것이다. 이로써 패션, 전자, 의약품, 식품 등 생활경제가 장기이던 오사카는 뒷전으로 밀렸다. 도쿄 중심의 일극 체제가 완성된 것이다. 그 박탈감을 한신 타이거즈에 대한 열렬한 응원으로 달래었다. 야구장은 '간사이 내셔널리즘'을 쏟아내는 분출구가 되었다.

세계화는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금융자본주의로의 전환과 인수합병 등으로 오사카의 종합상사들이 대거 도쿄로 이전했다. 자연스레 고급 인력의 유출도 잇따랐다. 취업 기회의 현격한 차이는 청소년 범죄 전국 최악의 오명까지 떠안겼다. 학술, 문화, 예능을 담당하던 인재들도 이탈하여, 도쿄에 맞선 대항의식을 지탱하는 근거지도 사라져 갔다. 오사카의 불만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오사카의 위기는 '진보'의 소산이다. 도쿄는 뉴욕을 모방하고, 오사카는 도쿄를 갈구했다. 그 욕망의 수직적 획일화가 20세기 진보의 추동력이었다. 그래서 도쿄도(都)에 버금가는 오사카도(都)를 만들어 글로벌 도시 경쟁력을 키운다는 하시모토의 전략은 철 지난 진보의 패착에 가깝다. 도쿄에 필적하는 오사카가 아니라, 도쿄와 남다른 오사카를 가꾸어갈 일이다. 도쿄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 생태계의 복원이 필요한 것이다. '진보'를 거스르는 이 역(逆)과정은 차라리 '진화'에 가까운 것일지 모른다. 무릇 종의 다양성과 변이야말로 진화의 동력인 탓이다.

특히 '가야 세계권'이라는 발상에 주목함직 하다. 본래 오사카는 바닷사람과 외지인들이 만든 작은 마을에서 출발했다. 한반도 남부에서 규슈, 서일본 연안은 계절풍과 해류를 따라 배를 타고 왕래하는 하나의 공통세계였다. 백제나 신라의 중앙집권적 국가로 수렴되지 않고 서(西)일본 일대를 아우르는 독자적 문명지대를 일구었던 것이다. 그 바닷길의 길목(node)에 제주도도 있었다. 아니 당시에는 반도에 부속되지 않는 '탐라'였다. 이 가야와 탐라를 망라하는 바다 세계의 동쪽 끝에 오사카가 자리했던 것이다.

이 가야 세계권의 유구한 뿌리가 단절되지도 않았다. 오늘날 오사카의 대다수 자이니치가 제주도 출신이다. 실제로 제주도 해녀의 잠수법은 이사카와 현과 미에 현 등 서일본 지역과 흡사하다. 해녀들이 대한해협(현해탄)을 오고 가며 하나의 생활권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인분으로 돼지를 키우는 습속마저 닮았다. 짐작건대, 언어의 차이도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의 국가 감각과는 전혀 다른 생활세계가 바다 위에 펼쳐졌던 것이다. 이 오래된 바닷길을 따라서 오사카는 한반도 남부, 제주도, 오키나와, 타이완 출신들이 집결하는 '이민 도시'가 되었다. '자이니치(在日, 재일교포)' 또한 비단 근대에 한정되는 현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자이니치가 유독 차별과 배타의 대상이 된 점이야말로 근대적인 것이다. 그러자면 제주 4.3항쟁(1948)과 한신교육투쟁(1948.4월)도 제주도와 오사카를 잇는 사회운동의 연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오사카는 도쿄와 달랐다. 도쿄가 제국의 중심(center)이라면, 오사카는 아시아와 접속하는 허브(hub)였다. 근대 지식을 열망하는 신청년이 도쿄로 향했다면, 장사치와 일꾼들은 오사카로 향했다. 도쿄의 모던보이들이 애국이든 친일이든 국가를 화두로 삼고 있을 때, 오사카의 생활인들은 길드와 조합으로 살림살이를 꾸려갔다. 오사카는 간사이 중에서도 특히 유별났다. 교토에는 제국대학이 들어서고, 고베에는 관립 상업대학이 생겼다. 헌데 오로지 오사카만이 시 중심으로 발전했다. 지금도 오사카 시립대학이 학문의 중추이다. 생래적인 민도(民都)인 것이다. 교통망 또한 민영이다. 그래서 국철, 즉 JR 중심의 도쿄와 판이하다. 간사이 네트워크는 도쿄가 모든 것을 흡입하는 수도권과 달리 독특한 '도시 먼로주의'를 구현하고 있다. 이 민간 철로를 따라 여행을 하노라면, 일본의 국보와 중요 문화재의 절반 이상을 접하게 된다. 역사와 종교의 두터운 문화층이 켜켜이 쌓여 있는 것이다.

이는 부국강병으로 일로매진했던 도쿄의 '겉 일본'과는 사뭇 다른 옛 일본의 속살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50년과 비견할 수 없는 1500년의 거대한 유산이다. 오사카가 재발견하고 되살려야 할 원리 또한 이 남다름에 있지 않을까.

4. 오사카-아시아 네트워크

여기 한 장의 지도가 있다. 오사카의 지척인 후쿠야마 현이 작성한 환동해(일본해)지도이다. 기존의 것을 뒤집어 세워 남과 북을 반전시켰다. 그러자 동해를 호수로 삼아 서일본과 러시아 극동지역, 중국 동북과 동남지역, 한반도와 타이완을 아우르는 지중해 공동체가 탄생한다.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로 이어진 긴 띠의 '상상의 공동체'를 허물고, 복수의 일본에 대한 창조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다. 헌데, 이러한 전복이 전혀 새로운 것만은 아니라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다. 1300년 전의 옛 일본 지도가 꼭 이런 모양이었던 것이다. 본디 아시아 대륙에 젖줄을 대고 있는 간사이 연해가 일본 문화의 배꼽이었기 때문이리라.

지도(공간)를 뒤집으면 역사(시간)도 반전한다. '탈아입구(脱亜入欧, だつあにゅうおう)'는 그저 구호였을 뿐이다. 정작 일본은 줄기차게 아시아와의 '재회'를 향해 내달렸다. 일본의 개항 또한 '쇄국' 이전의 아시아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일찍부터 일본인들은 섬나라답게 바닷길로 이주가 빈번했다. 동남아시아에서도 현지인은 물론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유럽 상인들과 교섭, 각축하며 큰 세력을 떨쳤다. 해적과 상인의 경계선에 있던 이들이 바로 '왜구'이다. 그러다 동북아 진출(임진왜란)이 실패하자 '쇄국'을 단행하면서, 광동과 복건 출신의 화교들이 아시아의 바다를 장악했다. 그 추억의 바다로 되돌아가려는 회귀 본능이야말로 일본의 '근대화'를 추동했던 것이다. 근대 일본의 개혁운동이 규슈, 사쓰마 등 대저 아시아의 바다에 인접한 서남지역에서 발원했던 까닭이다. 이처럼 '근대화=서구화'의 등식은 진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 지도를 뒤집으면, 일본과 동아시아의 관계를 보는 시각도 바뀐다.

이들은 도쿠가와 정권의 무역통제를 타파하고 각 번의 항구를 개방하여 자유무역을 실시하길 원했다. 각 번 나름의 정치적, 경제적 자립을 모색했던 것이다. '웅번 연합'에 기초한 분권적 근대화라 하겠다. 이는 중국의 호남성, 사천성, 광동성 등에서 일어난 자치운동과도 맥이 닿는다. 하나같이 '아시아의 바다'로부터 비롯한 동아시아형 분권적 개혁의 맹아였던 것이다. 헌데, 오사카 유신회가 이 서남일본 특유의 분권적 개혁의 흔적을 계승하고 있음이 흥미롭다. 그들의 대표 정책이 바로 '지역주권'인 것이다. 마침 현해탄 건너 남해(南海) 출신의 대권후보가 자치분권의 전도사임을 자처하는 한국의 사정과도 묘하게 포개지는 대목이다.

실로 오사카의 아시아 네트워크는 탈냉전 이래 꾸준히 강화되어 왔다. 서울을 비롯해 방콕, 호치민, 홍콩, 자카르타, 쿠알라룸푸르, 마닐라, 멜버른, 뭄바이, 상하이 및 싱가포르 등 열 한 곳과 자매도시를 맺었다. 오사카의 수출입 통계 또한 살림살이의 6할 이상을 아시아에 기대고 있음을 말해준다. 역사의 순리를 따르자면 그 비중은 한결 더해질 것이다. 이미 석유 생산이 정점을 지난 마당에 원거리 무역은 더 이상 대세가 되기 힘들다. 즉 세계는 재차 넓어지고 멀어진다. 그만큼 태평양 연안이 아니라 일본해(동해) 연안의 도시들이 21세기 일본의 주축이 될 공산이 크다 하겠다.

이 커다란 반전의 물결에 도쿄가 선봉에 나서기는 난망해 보인다. 최근 물의를 빚은 한일 군사정보협정은 국가 이성의 총아인 도쿄와 서울(그리고 워싱턴)의 역주행을 역력하게 증언해 주었다. 신냉전을 도모하는 20세기의 관성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속 일본에 자리한 오사카야말로 도래하는 '오래된 미래'의 유력한 근거지라 하겠다. 좌우의 잣대로 쉬이 단죄하기보다는, 하시모토의 들쑥날쑥한 행보에 여전히 눈길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1세기 일본의 변혁의 돌파구는 대저 서남풍일 것임을 강렬히 예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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