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성은 서울 도심을 둘러싸고 북퓨? 인왕산, 남산, 낙산을 휘도는 성곽 17-18km를 말한다. 성돌이가 옛날부터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성을 따라 트레킹 했음을 알았다. 성돌이란 단어와 그 행적을 원로 법학자 최태영선생에게서 들었는데, 막상 현대에 와서는 서울사람의 잃어버린 취미가 아닌가 한다.
"서울성곽은 하루에 돌기 알맞아요. 한 바퀴 뺑 돌면 40리야. 대개 동소문(혜화문)에서 시작해 자하문 돌아서 이화 배재학교로 해서 남대문 지나 남산으로 올라갔다가 광희동 수구문, 동대문으로 해서 성문 다 돌고 동소문으로 돌아오는 거야. 서대문은 일찍 없어졌지만 성이 대충은 온존하게 남아있었어요.
성돌이는 성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성의 안쪽 바깥쪽을 넘나들면서 굳이 성을 타고 기어오르는 데가 있어요. 다리가 후들 후들 떨려. 산 4군데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큰문 4개 작은문 4개 지나는 거야. 가는 데마다 무당들이 별거별거 다 팔아서 거기서 뭐 사먹든지 하구. 꼬박 하루가 걸려요. 북한산성은 따로 뗑구랗게 또 있구요"
지난 해 여름 나도 처음으로 성돌이를 했다. 전체를 하루에 돌지는 못하고 문 하나씩 4번에 걸쳐 지났다. 혜화문에서부터 성벽을 따라 동네를 지나고 산을 올랐다 내렸다 하는데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1396년 조선초 태종조에 처음 쌓은 성돌부터 근년들어 대대적인 보수를 거친 성축과 문루, 성 안팎 동네 등을 보고 성벽이 끊어진 데서 다음 시작을 찾아 아스팔트길을 걷는 코스였다.
김승옥의 어느 단편에선가 문루가 있는 도시얘기를 참 인상깊게 읽은 적이 있다. 김승옥은 그 도시를 상징하던 문루와 그곳에 살던 여성을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그것처럼 시적이지는 못해도 서울성벽과 성문도 얼마간의 고대, 혹은 어려서의 시간으로 들어가 원형의 기억을 불러주었다. 성벽은 상당부분 없어지고 군사용으로 폐쇄되기도 해서 내가 본 것은 다 합해도 원래의 절반정도, 8km에 지나지 않았다.
혜화문에서 성북동까지는 성 안팎으로 나무가 많은 고풍스런 산책길이었다. 혜화동 주택가를 지나고 계단으로 성첩을 따라 이어진 성 안길에는 꽃나무가 많았다. 명륜동으로 나가는 오솔길이 여러 개 나있어 한적해 보였다. 성밖의 얼마간 거리는 처음부터 인가가 들어서지 못하게 한 공터인데 인근 주민들이 여기다 밭을 가꾸고 있어 별별 채소가 다 있었다.
성밖의 높은 성벽을 보리라고 이곳으로 들어서니 동네 개들이 다 짖었다. 북악산으로 들어선 군부대 뒤 성밖은 인가가 없는 산 그대로여서 옛 서울의 흙을 보는 듯했다. 이곳을 자주 산책하는 이들은 아예 맨발로 다니고 있었다. 청와대 뒤 이 구간이 제일 아름다웠다. 여기는 태종때 성을 쌓은 직후부터 보안상 사람이 지나다니지 못하도록 하고 나무를 많이 심어둔 곳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무가 많고 시정과 멀리한 분위기다. 조선시대 사형수 목을 여기다 버렸다고도 한다. 오래된 성돌 틈에서 뻗어나온 나무와 풀, 이끼가 오랜 세월이 흘렀음을 말해 주었다.
그 이상은 북악산 꼭대기에 북문인 숙정문(또는 숙청문으로도 부른다)이 있고 성벽은 창의문(자하문)으로 이어지는데 군 경비구역이라 성북동 약수터까지밖에 지나지 못했다. 조선초부터 북문 주변을 터놓으면 '대궐의 지맥이 상한다' 해서 닫아놓고 서대문으로 나가도록 북쪽 길을 터놨었다. 경복궁 대궐 뒤, 지금의 청와대 뒤인 숙정문과 창의문 주변이 지금도 군 경비구역인 것을 보면 지정적 조건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가 보다. 옛날식으로 말하면 풍수지리설이다.
세검정에서는 산위로 구불구불 이어진 2.6km 거리의 이 구간 성곽이 선명하게 보인다. 밤이면 북악산 성벽을 따라 가로등이 줄줄이 켜진게 목걸이를 꿰어논 것처럼 보이고 산허리를 통과하는 북악 스카이웨이 길이 서울의 풍광을 이룬다.
남대문 동대문 혜화문은 아예 문루에 올라가 들여다 볼 수도 없었지만 자하문(혹은 창의문)은 군 경비를 뚫고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그 문은 온통 1623년에 있었던 인조반정의 회고처 같고 흥미진진했다. 공신들 이름을 적은 현판이 문루 서벽에 붙어있다. 인조반정 나던 해에 만든 것일까? 근대의 5.16혁명주체세력들 이름은 어디에 기념현판 같은게 있는지? 신문에?
여기서는 성문 안으로 지나갈 수도 있었다. 청와대 뒤길 언덕바지에서 바로 자하문 터널 큰길로 이어지지만 이용자는 거의 없어 보인다. 이 문으로 해서 그날 인조반정 기마군인들은 닫힌 성문을 깨고 창덕궁 대궐로 쳐들어가고 광해군은 정권의 막을 내렸다. 죽고 죽이는 과정이 얼마나 치열했을지 짐작된다. 5.16, 10. 26, 12.12 사태 등등을 겪어온 세대라 쉽사리 상상이 된다. 1968년 무장간첩 김신조 부대가 넘어 온 것도 바로 이 길이었다. 그때 희생된 경찰의 동상이 서있어 때마다 꽃다발이 놓인다. 지금은 시내버스 길이다.
누각 안을 정신없이 사진 찍고 있는데 또다른 군인이 소리치기에 잡아가는 줄 알았다. 옛날에도 여기는 대궐을 지키는 둔병대가 있었을 테니까 그때도 무서웠을 것이다. 길하나 건너 다시 성벽이 이어지면서 인왕산으로 오르는 구간이었다.
인왕산 위의 성벽도 치마바위 병풍바위를 넘어가며 트레킹의 재미를 누렸다. 치마바위는 경복궁 대궐에서 마주 쳐다보인다. 이 바위도 반정과 관련된 이야기가 생긴 곳이다. 연산군을 폐한 반정으로 진성대군이 새 임금 중종이 됐다. 그러나 부인 신씨는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조의 영의정이라서 폐비되었다. 19살 정도의 나이였다.
중종은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폐출된 그 부인을 잊지 못했는데, 그 말을 들은 신씨는 자기가 입던 붉은 치마를 이곳 치마바위에 걸어놓고 중종이 대궐에서 볼 수 있게 했다. 바위이름이 그래서 치마바위가 됐다.
반정날 기마군들이 난데없이 진성대군집을 에워쌌을 때, 불안해하던 남편에게 '군인들이 탄 말머리가 집을 향한 것이 아니라 집밖을 향하고 있으니 이는 당신을 보호하려는 세력이다' 라고 해서 안심시킬 만큼 총명했던 여성이었다(김용덕의 조선후기사상사에서 인용).
인왕산에는 근대까지 호랑이가 있었던 산이고 정선의 인왕재색도로도 그 웅자가 남았다. 남산에서 옮겨놓은 국사당이 있고 1930년대 서대문 일대는 무당집이 그렇게 많았다고 한다.
군사보호지역인 이곳이 민간에 개방된 것은 몇 년 안된다. 새벽이면 주민들이 많이 성을 따라 산책한다고 했지만 성 안팎으로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려웠다.
여름 한낮이라 그런지 산책하는 인기척도 거의 없었다. 산에 들어와 산신기도 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는데, 너무나 고요한게 그러다 갑자기 어디 한군데서 낭자한 굿소리가 들려올 것도 같았다. 국사당이 어떠한지 궁금했는데 이번 성돌이 때도 못갔다.
서대문 형무소가 여기 있었다. 1980년에 신군부에 저항해 신문제작을 거부하다 잡혀갔던 신문기자에게서 들은 얘기. 감옥에서 인왕산 선바위가 그렇게 빤히 보였다. 나가면 꼭 그 선바위를 찾아가봐야지 하고는 지금까지 못갔다. 죄수복으로 따뜻한 한복을 많이 입는데 감옥 부근 영천시장에 아예 서대문 감옥용 한복을 파는 집이 있었다.
심사정 같은 예술가들이 서대문 밖에서 많이 살았다. 그는 정조때 왕실의 화가로 발령받았다가 조상이 역모에 가담한 것 때문에 쫓겨났지만 한평생 여기 초가집에서 그림을 놓지 않고 살았다. 그가 조선 산수 실제풍경을 멀리하고 상상 속의 중국산수나 그린 것이 이해가 조금 간다. 어디로 다니는 것도 자유롭지 못했을 것 같다. 그 대신 정물화는 정말로 아름답고 정교해서 그의 자질이 어떠한지를 알게 한다.
성벽은 재개발된 행촌동 교남동 아파트촌 뒤쪽에 동벽처럼 버티고 있었다. 성벽 밑에는 누가 기르는 장닭들이 맘놓고 왔다갔다 한다. 서향한 동네 전체에 비치는 오후 햇빛이 강렬했다. 서울역이 가까운 서대문-서소문구간 성벽과 성문은 1914년 도시계획으로 제일 먼저 헐려나가 자취도 없었다.
이화여고는 성 안팎에 걸쳐 있었다. 옛날 여학생들이 성벽 위에 앉아있는 사진이 남았다. 학교 안 아름다운 장미정원에 무너진 성돌 몇 개가 정원돌로 놓여있을 뿐이다. 오래 재직한 학교선생님만이 그 사실을 안다. 배재학교는 터도 잃어버리고 러시아대사관이 됐다.
여름 땡볕 속에 그늘하나 없는 성에서 내려와 냉면 두 그릇을 먹었는데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사진 하지권(사진 설명 조금 있다 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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