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고재 화랑을 지나 삼청동으로 굽어진 길은 오른쪽에 높이 솟은 맹고불대감 언덕과 나란히 하며 삼청공원까지 이어진다. 인근의 화동, 팔판동, 소격동 등을 다 합해 삼청동으로 부른다. 사진과 서양화를 하는 조수연ㆍ최지현 내외는 수년전 길을 잘못 들어 이리로 지나다가 은행나무 있는 굽은 길과 도심 속의 고전적 동네에 반해 작업장을 여기다 갖게 됐다.
양장점과 이발소 등이 있던 낡은 집 두 개를 그대로 살려 빔화랑을 꾸몄다. 전시장은 세모꼴, 사다리꼴, 다락, 좁고 넓은 방이 뒤섞인 공간이 됐다. 조 관장은 5년째 이곳에서 '규격화된 기존의 화랑과는 다른, 의사소통과 작업을 겸한'화가들 작품으로 전시장을 채우면서 젊은 시대정신을 구현한다.
뉴욕발 팝아트 미술품 같은 전등이 있고, 화장실 뒷 벽에는 깜짝 놀랄 만큼 크고 강렬한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굉장히 경쾌해 보였다. 화가 자신이 택한 전시공간이다. 창고 같은 칸에는 오래된 물고기화석도 놓여있고 그림틀없이 붙어 있는 작은 삽화부터 병풍처럼 넘겨보게 된 대작까지 여기서는 설치도 나오고 배치도 남다르고 화가와 미술관의 에너지가 만져질 듯한 분위기였다.
'나는 무의식이 의식의 밑거름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이 무의식의 밑거름이라 믿는다'는 작가 정진웅의 선언도 나와있다.
이 곳은 화려하진 않아도 '이 속에서 뭘 하나' 궁금증이 나게 하는데, 수요일이나 금요일 밤이면 새로 걸리는 전시회의 작가가 주인공이 된 파티가 열린다. 옷차림을 괴상하게 하기도 하고 화가의 친구가 돼지갈비 같은 걸 마당에서 구워주기도 한다. 누군가 설장고를 친다.
1만원의 회비를 내고 같이 저녁시간을 보내러 온 젊은이들이 웅성웅성한다. 대부분의 전시회가 오픈 축하연을 열지만 유명인사들로 채워지는 원로전시회보다 여기는 더 젊고 분방하고 격식이 없다. 지나가던 차들이 뭔가 하고 쳐다보고 간다. 전시장 외벽에도 무슨 그림이 그려져 있다.
'처음부터 그런 이벤트를 생각 했었죠. 화랑건물 나온 장소가 삼청동 길목을 딱 지키고 있는 것도 맘에 들었어요. 여기선 골목대장 노릇하기 좋겠다 하고. 자본주의에 맞춰 변화되다 보면 작은 데서 얻어지는 뭔가를 놓치게 되는데 여기서 하는 작업은 기업화되는 게 아니라 섬세하게 호흡을 느끼는 것이 되게 하려고요.'
이 동네에 이런 종류의 '파티'가 많아졌다. 빔화랑 뿐이 아니다. 파티라는 이름의 문화가 지금은 낯설지 않게 되었다. 젊은 남녀 10여명이 들락날락하는 품이 작은 방 하나가 전부인 공방에서도 수요일 무슨 잔치가 있나보다.
사람들의 그런 웅성거림말고도 길 가다가 보는 물건에서 예술가와의 조우를 느끼기도 한다. 한지공방 작은 진열장에서 연잎 모양의 청자 주전자를 봤다. 연못에 가면 많이 보는 연잎과 연밥 이미지가 물 따르는 청자주전자와 이슬 받는 잔같은 형상으로 눈에 확 들어왔다. 30대 후반의 도예가 곽경윤의 도자기였는데 이희연씨는 한지공예말고도 서울에 자기 가게가 없는 도예가한테서 이렇게 위탁받아 갖다 놓는다고 했다. 조각 같은 창의적 관념이 강하게 느껴졌지만 실용으로 물을 따를 수도 있다.
'주전자는 옛날부터 도공들에게 가장 조형적으로 표현해 낼 대상이죠. 전국에 주전자만 만드는 도예가 모임이 있어서 매년 전시를 열지요. 어떤 술회사가 후원한답니다' 라고 도예가는 말했다. 그래서 고려청자도 주전자가 많고 실용의 스텐 주전자도 고려청자 같은 모양새를 하고 술회사는 후원하나 보다.
골동상 정숙례씨의 가게에는 야외용 돌 화덕도 있었다. 고구려 벽화에 나온 화덕과 똑같아 보였는데 이름없는 석공의 작품이었다. 솥 거는 자리가 하나 또는 두 개 있어 그을음이 낀 것 하며 조그만 굴뚝까지 너무도 예쁜게 마당에 아무렇게나 놓여있어도 훌륭한 조각 같았다. 약이나 차를 달였으리라지만 불을 세게 땔 수도 있어 기능성도 뛰어나 보인다. 양옆엔 옮겨놓기 좋게 손잡이도 있다. 요즘 조각가가 이걸 손으로 다듬어 낸다면 대단한 이름을 붙여놓을 것 같다. 1, 2백년전 쯤 화강암 돌덩이를 앞에 놓고 열심히 다듬었을 석공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름이 고조선인 조그만 한식집에선 재계의 부인들이 점심을 들며 '자본론'을 토론하고 있었다. 언뜻 들리는 말로는 '돈버는 건 다 때가 있다'는 것 같았다. 그건 고조선 이래의 자본론이겠다. 들르는 사람마다 왜 이름이 고조선이냐고 물으면, 주인은 '고조선은 우리가 제일 잘 나가던 때였으니까' 라고 답한다. 적어도 여기선 아득한 고조선의 이름부터 근세조선의 강한 흔적, 현대의 숨결이 갖춰있는 셈이다.
이런 저런 조우가 있어 확실히 이 삼청동 길은 자연스런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인간의 기본 욕구인 다른 사람과의 만남 그런 걸 현대사회 어디서도 못 찾다가 여기 빔화랑이 벌이는 시도나 한구석에서 발견하는 예술품과 사람과의 만남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 거리에 가게를 갖고있는 사람은 대부분 삼청동 주민은 아니다. 오래전부터 있는 참기름집, 수퍼, 방앗간 그런데는 토박이 주민들이지만 이 길에 상점을 내고 새로 들어온 입주자들과 이 동네 주민들과의 만남도 많은 얘기 거리를 낳았다. 삼청동 원주민들에 대한 얘기는 이상하리 만치 많은 사람들이 인상적으로 기억한다.
충주비료가 발족했을때 핵심 엔지니어그룹중 한사람이던 김도심씨(전 한양화학 부사장)는 1970년대초 삼청동 총리 공관 옆의 한옥에서 살았다.
'그때 이 동네 노인들 아주 대단했어요. 그 시대에 박정희 정권을 막 비판하는데 조선 바지 저고리 입고 팔짱을 낀 도도한 태도로 하는 말이 이 신흥 박씨 권력이 다 뭐냐는 거지. 청와대는 이 노인들이 제발 다른 동네로 이사가 주었으면 하고 고사를 지냈는데 아주 호조건을 내세워도 죽어도 이사가려 들지 않는거야. 그 시대엔 여기 초가집도 있었어요. 통금이 있을 때라 밤 12시 넘어 집에 오게 되면 백차가 주민들을 태워다 집에 데려다 놓곤 했지요. 지금 그 한옥은 다 양옥으로 바뀐 듯 하고...'
조수연씨가 5년전 화랑을 막 개관했을 때 복덕방 할아버지가 충고했다.
'거 다 한동네 사람이니 집들이할 때 총리공관에도 전화해서 오라고 부르고 그래야지.'
'총리공관에 우리집들이에 오라고 부르라니? 아이고 난 잡아가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노인들 파워가 여기처럼 강한 데가 별로 없을 것 같다. 경로당이 있어 1층은 할아버지, 2층은 할머니 층인데 데모할 일 있으면 삼청동 꼭대기 맹대감 언덕으로 올라가 시위를 하곤 했다. 청와대에서 빤히 보이는 곳이라 국빈이라도 오고 그런 날이면 난처해진다. 그래서 파출소가 평소에 이곳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동태를 소상히 파악'해서 대보름날 동별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윷놀이 내기를 하는데 '어느 동 할아버지네가 이겼는지' 청와대에 '첩보'가 알려진다고 했다.
세계장신구 박물관이 집을 지을 때는 동네주민들이 사물놀이를 만들어 와서 지신밟기를 했다. 동네주민만으로 자체적으로 그런 구성이 다 된다고 한다. 정초 지신밟기하러 온 동네를 다닐 때는 총리네 집에도 간다. 그러면 '어떤 총리는 나와보고 누구는 안 나와보고 어떤 총리부인은 음식을 대접하고' 그런 소문이 쫙 퍼진다. 가게가 개업할 때 더러 떡을 돌린다. 10월 상달에는 인사동서부터 아는 집찾아 고사떡이 오간다고 한다. 동네 주민들은 이상한 가게가 들어올까봐 여간 예민하지 않다는 것이고 그러면 떡을 받지 않는다고도 했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는데 같이 지나던 분이 말 중간에 얼굴을 돌려 '할머니 안녕하세요'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할머니도 정답게 인사를 받았다. 삼청공원 산책에서 보면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발걸음이 날렵하고 산길을 날아다니는 것처럼 다닌다. 이들은 삼청공원에서 자하문까지 가볍게 산책으로 오간다.
이른 새벽 이 동네에서는 칠보사에서 치는 종소리가 들린다. 교회도 있고 수녀원도 있고 산신에게 기도하는 바위 기천석도 있다. 어떤 종교기관이든 광신도 집단은 아닌듯 조용하다.
집들은 작은 규모지만 멋진 건축들이 더러 있다. 여름에 능소화가 만발한 한옥은 현판까지 붙여놓은 문에 집 이름은 크리스탈 하우스(益淸閣)라고 알리는 문패를 달았다. 고전과의 현대적 만남이 아름다운 곳이다.
한옥을 개조한 가게들이 많다. '서까래와 지붕 그런 한옥건축만으로도 인테리어가 되니까 양식처럼 전체를 인테리어를 걱정할 필요가 덜하다'고 로마네 꽁띠 김경태씨가 말한다. 이곳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예술가들이 많다. 맹고불네 언덕 한구석에도 무슨 예술가 가게가 생겼다.
북악산 물길을 복개해 만들어진 삼청동 길은 20여년전 4차선 도로로 만들려고 주변 집까지 다 배상을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이후 주민들이 반대를 했는지 아니면 이 아름다운 길에 대한 가치를 높이 샀는지 2003년 말 지금의 '활장처럼 휜' 도로를 그대로 두기로 결정이 바뀌었다. '아마 도시계획 정책 입안자가 세대가 바뀌면서 생각이 유연해진 것 같다' 고 했다. 삼청동 절벽 윗동네는 맹사성 고불 대감집이 있어 소타고 지나다니던 데이니 맹 대감 언덕길로 부르자는 주장을 하고 싶다.
선재아트센터에서 시작해 삼청파출소 뒤 골목길과 삼청동으로 나가는 길은 아주 좋은 연결이다. 예술적 자극을 주는 데가 많다. 선재아트센터는 아주 좋은 영화제로 봉사한다. 티벳박물관, 장신구박물관해서 박물관도 많다. 인사동에서 넘어오는 문화벨트로 당국이 유도해 주면 좋은데 몇 개월마다 집값을 올리는 투기세력이 움직여 곧 자본주의논리가 지배할 것 같다고 걱정이다.
험이라면 큰길에는 차들이 너무 많이 다닌다는 것이고 보도도 너무나 부실하다는 것이다. 사진가 황진씨는 '경복궁에서 삼청동까지 시속 10km 전차를 놓으면 어떨까. 감사원 앞으로 해서 가회동으로 빠져 나가도록' 하는 안을 내놓았다.
주차장문제도 있다. 상인들이 여기 오는 사람들을 위해 옛 경기고 자리 정독도서관 지하를 주차장으로 해달라는 건의를 올려 보지만 '경기출신들이 안 된다고 하는 건지' 구청에서 꼼짝 안한다고 한다. '미술품이 자꾸 가라앉아요. 문화를 아낀다고 말만 하지 말고 문화하는 사람 사기 좀 올려주면 문화가 얻어지고 보존될 텐데' 라고 정숙례씨가 말한다.
한옥 동네의 진수인 골목길 보존은 시급한 현안이 되었다. 이미 인사동 큰길은 종로나 다름없고 뒷골목 약간만이 남았다. 임대료가 치솟아 너무나 많은 중국물건과 유흥상점이 점령하면서 옛날 그 인사동이 아니다. 그러면서 뒷골목도 폐쇄되는 곳이 생기고 영향을 받고 있다. 계동 한옥골목도 화재를 염려해 조만간 소방도로를 확장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골목길의 맛은 다 없어질 것이다.
'한옥 골목은 일차선으로 일방통행케 하고 1.5톤 작은 소방차 다니게 해 소방도로 문제를 해결하자. 집집마다 자체 소화전과 소방기구를 갖추도록 한다. 만에 하나 일어날 일로 소방도로 한다고 골목길을 다 헐 수는 없다. 이 혼란 속에서 같이 살아야지 몇십분의 1 확률을 가지고 획일화 할 수 없다.' 고 황진씨는 주장했다.
사진설명(적당히 알아서 넣으시오)
1. 삼청동길목의 빔화랑. 배경으로 보이는 낡은 건물이 마치 유화한폭같다. 사진 하지권
2. 빔화랑에 전시된 작품의 구멍동화.
3. 곽경윤의 연잎모양 청자주전자. 이 길을 산보하다 만나는 예술품이다. 이희연
4. 정숙례 골동상에서 본 조각같은 돌화덕. 사진 하지권
5. 삼청동 길이 끝나는 곳에 있는 기천석. 사진 하지권
6. 능소화가 핀 한옥. 사진 하지권
7. 맹고불 언덕길의 한옥재건축 현장. 김홍도 그림이 따로 없다. 사진 하지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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