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길한테 붙여진 최고의 헌사는 미술평론가 이경성 선생이 1970년 명동거리를 두고 한 표현일 것이다.
'고독한 산책자의 마지막 정착지-'
그는 미도파백화점에서 저동 백병원에 이르는 1km 길을 그렇게 표현했었다.
호사가의 예술적 심성이 그런 싯구를 주었던 날에서 멀리 떠나, 이곳은 지금 10대들 쇼핑의 주무대가 되었다. 그렇지만 명동을 대신해 화려함과 소비의 본산이 된 강남 청담동일대는 비싼 자동차와 아파트, 사치한 외양만이 존재이유를 갖는 듯, 산책로의 한가한 여유는 느껴지지 않는다.
문화특구 동숭동 대학로는 기이한 술집건축의 집산이 되었다. 젊은이들과 극장과 차, 술이 흐르는 거리지만 고학력의 길 이름에 나오는 무슨 지성의 형성같은 게 두드러져 보이진 않는다. 인사동도 변했다. 그전엔 머리를 잇댄 한옥지붕 아래, 골동가게 진열장에는 근사한 나비 촛대 같은 것이 나와있던 고즈넉하던 거리가 지금 뭐가 뭔지 모를 만큼 현대화되고 복잡해졌다.
거기서 헤어나 찻길 하나 건너 삼청동으로 들어가는 길은, 그래서 2000년대 초 서울의 감수성을 담고 등장한 '고독한 산책자의 마지막 정착지'가 되었다.
경복궁 담을 끼고 활장처럼 근사하게 굽은 길은 큰 가로수들로 사철 보기 좋다. 칠보사가 있는 삼청공원까지 1.5킬로 남짓한 이 길은 도심 한복판에서 시작해 북악산으로 스며들면서 물과 공기 또한 청명하다. 이곳엔 중종임금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 왕후가 받들던 도교의 절 소격서가 있었다. 유교 원리주의자 같던 조광조가 그렇게 이를 없애려고 중종과 싸웠다더니, 지금은 표지석만 남았다.
청와대 옆동네 주택가인 이곳엔 누가 사는지 수십년이 지나도 알 수 없는 프라이버시 일등의 한옥, 양옥이 섞여있다. 그런가하면 쓰러질 듯한 한옥, 간혹 가다 적산가옥도 있다. 강남개발 직전의 생활모습으로 정지된 듯한 일반 주택가가 지금도 대종을 이루는 것은 당시엔 헐값이던 강남으로 떠나지 않고 이곳에 머물러 살아온 주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엠에프 이후부터 이 거리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이때 큰길가의 상점들이 전부 매물로 나왔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주인공과 세대가 바뀌면서 변화가 촉진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인사동이 포화상태가 되면서, 밀려난 가게들이 이리로 옮겨와 포진했다. 지금은 한집 걸러 하나는 상점이랄 만큼 변화되는 중이고 삼청터널로 가는 차도엔 차량행렬이 끊임없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주택가 주민들은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 거리가 어떻게 변화될지, 이곳도 인사동처럼 상점과 유흥으로 포화되고 말 것인지를 건축가들은 주목하고 있다.
주택들만 있고 가게들이 변변치 않을 때는 그저 스쳐지나던 곳이었다. 지금 이 지역에 들어선 많은 집중 어느 한군데고 찾아 보내는 시간이 일종의 휴식이자 즐거움같이 상품화되고 있다. 보도 일부는 좁고 자동차들로 범벅이 되어있지만 북악산이 이마에 닿을 듯하고 맑은 공기기운이 느껴진다. 유교시대에 한줄기 숨통을 틔어주는 도교가 자리잡았던 것과 일맥 상통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이곳을 지나는 인파가 부쩍 늘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가게들이 호화로와서 들어가 보는 게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사치한 것이라면 이미 강남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나 여기는 삶의 어떤 정수라고 할 것들이 있고 창의적인 힘이 고여있다. 쌀가게 옆에 보석가게가 있는 동네길이 태연해서 좋고 싼값을 내면 볼수있는 대궐, 화랑, 박물관, 신구가 엇갈리는 건축과 진열장의 눈요기, 유난스럽지 않은 대중음식점들이 한꺼번에 있다.
더 좋은 것은 어슬렁거리는 산책이 무한하달 만큼 가능한 길이 시간적으로도 바로 시내 업무공간으로 복귀할 수 있는 최단거리에 있다는 것이다. 그 산책길의 한중간에서 지난 5월 이곳에 개관한 세계장신구박물관을 보았다. 이 박물관의 출현은 하늘의 별이 뚝 떨어진 듯 한 사건이었다.
큰길에서 한발 물러앉은 화개길에 야무진 구리 상자같은 건축이 장신구박물관이다. 삼층까지 통털어 70평의 작은 공간 안에 9개의 작은방이 있다. 그 속에 보석의 꽃밭, 혹은 벽장, 제단, 숲의 개념으로 벽에 진열된 1천여점의 장신구들이 압도한다.
호박의 방, 엘도라도의 금, 알제리의 정교한 발찌 팔찌, 반지, 목걸이와 머리장식, 이디오피아의 십자가, 아프리카의 비즈와 현대미술같은 조각, 탈, 근대 유럽 장신구 등... 보석을 가졌다면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 가졌다고 내세울 수 있을 것인가!
어느 한 지역이나 국가의 장신구만 모아놓은 박물관은 많지만 아시아, 중동, 남미, 아프리카, 근대유럽을 망라한 곳은 전세계에 유례가 없다. 이들은 단박에 삼청동을 국제적인 장소로 격상시켰다. 여기엔 한국적 한계를 뛰어넘는 디자인과 보석가공의 온갖 기법, 보석치장의 개념이 전시돼 있다. 어두운 방에 걸린 환한 노랑빛, 금빛 은빛과 초록, 붉고 파란 보석들과 상아의 순백, 나무, 돌이 소리없는 구원처럼 앉아있다. 그리고 이들은 파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들은 김승영 대사의 부인 이강원씨가 아르헨티나 등 25년간의 남편 임지에 살 때 모아들인 그 나라의 문화재급 보물들이다. 엘도라도 무이스카 부족의 금뗏목과 37캐럿의 에메럴드는 왕권을 계승한 무아스카 인디오가 온몸에 금을 바르고 금뗏목에 금과 에메럴드 보석을 싣고 호수에 나아가 제사를 지내며 제물을 바치던 즉위의식을 기록한 보물이다. 콜럼비아 보고타박물관 등 전세계를 통털어 한두군데 박물관에 이런 보물이 있을 뿐이다.
'스페인군이 이들을 정복하고는 전설의 금과 보석을 건지려고 호수의 물을 세 번이나 빼내며 뒤졌다고 해요'이강원관장이 설명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무이스카 뗏목위의 왕이 쓰고 있는 금관은 아주 약식이지만 신라금관과 기본 형태가 같다. 원판같은 금환도 달려있다. 또다른 금조각 샤먼남자도 있는데 이 인물도 신라금관과 형태가 거의 같은 금관을 썼다. 신라 금관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지 않을까.
부유한 자들은 집안에 보석세공사를 두고 집안의 부를 과시하는 장신구들을 만들었다. 무게가 3kg이나 나가는 중동의 목걸이 같은 것을 보면 단순한 치장이기보다 분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의 대단한 반지를 보면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반지는 시시해 보인다.
주먹만한 호박 안에는 쥬라기 영화를 수없이 만들겠을 디엔에이의 곤충을 머금은 것, 모든 것을 주고 장만했을 듯한 목걸이, 보석 박은 머리장식들이 보인다. 가장 호사스런 것들은 결혼을 위한 물건들이다. 유럽 근대장신구들은 이제까지 변함없는 디자인으로 내려오는 시계, 까메오 장신구 등이 나와있다.
아프리카 전역이 잔인한 내전으로 고통받을 때 마지막 순간 울면서 내놓은 장신구들이 있다. 흡사 우리가 6.25때 모든 것을 잃었듯이. 소말리아의 신부목걸이는 금공을 이어붙인 듯한 목걸이인데 어느 한군데 이음매 없이 통째로 제작됐다. 그동안 아프리카에는 그처럼 정교한 세공의 장인전통이 없는 줄 알았다. 돌보다 단단한 백상아로 그림처럼 섬세하게 다듬어낸 얼굴조각은 영혼까지를 담고 있는 듯하다.
이디오피아의 보물 은십자가는 가는 은실로 기하학적 레이스를 짠 것처럼 보인다. 온도가 계속 유지되어야 가능한 기법들이 여기에 동원되었는데 현대에 와서 이탈리아조차 이런 물건을 만들지 못한다고 한다. 1년에 한번 꺼내 쓰고 고이 보관해 두는 성물, 이디오피아에서도 보기 어려운 최고의 조형물이 여기 있다. 한국의 기독교에서 이제껏 예술적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아프리카의 이 오래된 기독교나라 십자가는 신자 아닌 사람에게도 경건함과 신을 위한 작업이 어떤 경지에 오르는지를 보게 해준다.
아프리카 조각없이 유럽의 현대미술이 나올 수 없었다. 피카소는 이들을 표절했나? 이 박물관의 놀라운 아프리카 공예미술품을 보고 아프리카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토로했다.
'아프리카의 장인들이 노다지 끼고 앉아 만든 공예품들입니다. 한눈에 들어오는 감동은 바로 그런 인간정신이지요. 아프리카 사람들이 너무 가난해서 그동안 평가를 못 받았던 것뿐입니다. 아프리카 골동상은 대개 대를 이어하는데 이 물건들은 그 사람들과 친분이 있어 구해 들일 수 있었어요. 이 박물관의 성과가 많은 분들이 아프리카예술을 다시 보게 됐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구슬보석을 보면 그 이면사가 너무나 충격적이다. 지금도 아프리카 여러 부족들의 치장에 보이는 각색 구슬은 16세기 베니스에서 만든 것인데, 포르투갈 노예상인들이 이 구슬을 가지고 아프리카에 식민지 하러 가서 노예나 금은 상아와 맞바꾸었다. 그래서 구슬이름이 '트레이드 비즈'이다.
7겹의 유리를 입힌 쉐브론비즈라는 목걸이는 큰 유리알 하나에 노예 7명과 맞바꾸었다고 한다. 팔려간 그들의 삶이 어떻게 전개됐는지가 떠오른다. 한 방 가득한 비즈가 온통 그런 노예의 삶과 맞바꿔진 것이기에 깨물고 싶을 만큼 영롱한 구슬장식들은 그렇게 단순해 뵈지가 않는다. 이제는 이런 구슬을 만들어내지 않기 때문에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서 이 구슬들을 되사오려고 혈안이 되어있다. 이강원씨가 한발 빨랐다.
이 세계장신구박물관은 개관하면서 모든 건축잡지들이 일제히 다뤘다. 이곳이 더욱 돋보이게 된 것은, 소장품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갖고 그들에게 맞는 공간을 마련해준 건축가(김승회)와 진열방법을 아주 특별하게 한 인테리어 작가(이장건)의 덕인 듯하다. 보석은 그 안쪽에서 비치는 조명을 했고 평면적인 진열장이 아닌 하나하나의 독립된 전시공간을 가졌다. 많은 박물관 관계자들이 들러 진열방법 건축등을 살펴보곤 한다.
이디오피아 십자가는 별자리를 따라 배치되었다. 그 방면에 지식이 있으면 별자리 이름을 알아낼 수 있다. 그새 십자가를 한 사람이 훔쳐서 문제가 됐다.
'제가 이런 체계에 아주 일찍부터 눈을 뜨고 모아왔어요. 내전 중인 나라로 골동상을 찾아가는 위험도 무릅썼고 무엇보다 스페인어를 해서 그들의 생활을 파고들었기에 인맥을 쌓고 그 덕으로 구해 들인 것들이 많습니다. 횡재를 한 것도 있고 어렵게 사들인 것도 있구요. 늘 생각하고 꿈꾸고 있으니 귀인들을 만나서 이런 집을 짓고 진열하게 되었지요. 이 물건들은 역사의 무게가 있으니 적당한 곳에 두어야겠다 생각했는데 강남보다는 북촌 한 구석 여기가 좋았습니다.'
이강원씨는 이 동네 사간동 태생이다. 고종의 후궁 광화당 이씨가 바로 그녀의 고모할머니이고 고종이 지어준 집 어처구니(지붕의 잡상) 있는 한옥에서 살았다. 그 때문인지 오랜기간 해외에 있었음에도 북촌에 대한 감수성을 잃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 많은 장신구를 수집하는 안목은 절대 쇼핑의 충동이나 외유로 형성된 것은 아닐 것이다.
대사부인의 역할을 열심히 해서 현지에 대단한 인맥을 구축했고 스페인어로 시집을 내서 현지의 문화훈장을 세 번이나 받았다. 아무나 엄두내지 못할 보석장신구 박물관을 공공에 제공한 문화의 딜러로서 이강원 관장의 존재는 한국 문화계가 거둔 올해의 결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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