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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경의 문화기행 '서울, 북촌에서'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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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유경의 문화기행 '서울, 북촌에서' <7>

대궐 여성들-활동적인 엄비, 윤황후와 덕혜옹주의 해후

경복궁 동쪽 사간동 송현동에는 궁 규모의 큰 한옥이 많았다. 1990년대초 법련사가 신축되기 전 그 자리에 있던 한옥은 오래돼서 가라앉은 듯 했지만 대문이 세 개나 되면서 긴긴 마루를 딛고 이끝에서 저끝까지 한참 지나갈 수 있는 집인데 어떤 부마의 집이었다고 한다. 건물배치가 평범한 살림집 같지 않았고 무엇보다 규모가 컸다.

법륜사자리도 큰 한옥이 있었다. 고종의 후궁으로 완화군을 낳았던(독살되었다) 광화당 이씨가 살던 집과 또다른 후궁 한 분도 이 부근에 있었으며 또 무슨 집해서 어떤 인연으로든 대궐과 연결된 이들의 집이 많았다. 궁으로 불리던 집들이었을 것이다.

<사진 1> 북촌에 내리는 눈. 현대 서울여성의 처신중 가장 세련된 예를 엄비와 윤황후와 덕혜옹주에게서 본다. 하지권

안동별궁옆 약 1만평 규모의 송현동에는 2004년 초까지만 해도 오래된 일본식 이층집이 줄을 맞춰 서있고 잔돌로 쌓은 얄팍하고 높은 담이 사납게 둘러있었다. 미국대사관 직원들 사택으로, 그전에는 1918년 생겨난 일제의 조선 식산은행(일제때의 국책은행) 직원사택이었다. 그때 일본인이 지은 집을 미국인이 그대로 물려받아 쓰다가 2004년 봄 '불법건축'에 해당하는 그 집들이 헐리고 지금의 빈터로 남았다.

원래 이 터는 순종비 윤황후의 친정증조할아버지 윤용선대감(광화문 비각의 비문을 지은 이)이 지은 한옥이 있어 한때 윤비의 어머니가 살았다. 윤비의 본겻(친정) 조카 윤건로씨도 어려서 이 집에서 자랐는데 집이 무척 커서 나중에 절반을 정리해 팔고도 남은 것만도 서울에서 제일 큰 규모였다고 한다. 그 바로 옆은 안동 별궁이 있어 윤비가 결혼전 대궐법을 익히고 결혼준비를 위해 거처했었다.

이제는 한토막쯤 남은 안동별궁의 낯익은 돌담과 미 대사관 사택의 스산한 담을 좌우로 끼고 있는 이 길을 보면 윤황후를 떠올리게 되고 그 즈음의 대궐여성들 - 활동적인 엄비와 겉으로는 팔난봉이던 의왕의 비로 살다간 김숙여사, 정신병자가 된 덕혜옹주와 일본여성 영왕비, 상궁과 유모등 주변인물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들의 생활은 저마다 달랐다. 그중 엄비는 민비도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했다. 진명 숙명 양정 학교를 세워 조선청년교육을 양성했다. 그당시 가장 절실했던 근대교육의 초석을 여러개 마련한 엄비가 교육문제에, 그것도 여성교육까지 염두에 둔 활동을 벌이기까지 어떤 정보체계를 갖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그렇게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민비시해와 아관파천의 위기상황때 고종이 유일하게 믿었던 측근이던 그 능력은 어떻게 생성된 것일까. 대궐에서 엄비는 유일하게 양장차림을 한 여성이었음을 보면 그녀의 활동성이 조금은 짐작된다. 황태자이던 아들 영왕조차 망해버린 나라에서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그만큼 엄비는 유능한 여성이었던 듯하다. 지금이라면 아마 뛰어난 CEO적 자질을 지닌 여성이었다고 할 만하다.

<사진2> 한토막 남은 안동별궁 담의 주위풍경. 이웃한 송현동 전 미국대사관 직원사택 자리는 원래 윤황후의 친정이 있었다. 하지권

민황후의 면모라고 알려진 내용은 전부가 아닐거라고 생각한다. 뮤지컬로 소개된 민비의 생애가 처음 무대에 올랐을 때 가보았다. 진부하게, 왜 그렇게 일본인에게 당하는 것을 강조해 무대에서 표현할까. 유능한 극작가라면, 연출이라면 다른 면모를 창의적으로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국수적인 내용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일본군의 무대적 움직임은 전세계를 통해 공식처럼 양식화되어 있기 때문에 일본무사 등장 씬은 어느 연출이나 손쉽게 무대위에서 멋져보이는 동작으로 구현해낼 수 있다는 잇점이 있어 더 강해 보였다. 의상은 중국옷인지 오프오프 브로드웨이의 옷인지 그 예술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배우들이 열연하고 무대가 요란스럽다고 인사치레처럼 '좋다' 는 평말고도 다른 분석이 있어야 옳다.

나는 신문사에 있으면서 윤황후 생존시의 상궁 네 분을 작고할 때까지 여러번 만났다. 한말 윤황후의 지밀에는 윤상궁, 유상궁, 김명길, 박창복씨가 있었고 비서실은 따로 있었다. 김명길상궁은 윤비가 결혼하면서 본겻에서 같이 대동해간 상궁이고 침방상궁 성옥염씨는 어린 나인으로 들어와 윤황후를 6.25때도 모시고 다녔다. 한희순씨는 음식담당 상궁이었다.

이 과정에서 윤택영의 13살난 딸 윤증순 소녀가 순종계비로 간택되던 현장상황에 대해 들었다. 윤덕영이란 존재가 어떻게 작용했는지는 옥쇄관련 에피소드 하나 정도를 들었다. 민비의 사진이 없는 것은 민황후 자신의 뜻에 따른 것이었음도 확인했고 윤황후가 일기를 남겼지만 6.25때 사라진 것을 알았다.

그때 윤황후, 덕혜옹주, 영왕비의 옷이야기를 할 수 있는 데까지 취재했었다. 1965년경 윤황후가 대궐에서 입던 왕비옷과 순종황제옷 일체를 세종대학 최옥자 학장의 요청으로'교육자료로 쓴다 하니 유익하게 잘 활용하라' 며 그 자리에서 무상으로 내주었건만 이후의 학문적 결실이 없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도록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생계가 어려운 네 상궁이 찾아가 '명절 때만이라도 돈 10만원씩만 보태달라'고 요청, 비서실장한테 몇 번 얻어왔으나 그후 거절당했다.

이방자 영왕비의 옷은 여러 사람의 필사적 노력으로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돌아와 그나마 궁중유물전시관에 보존되었지만 그녀도 아들 진왕자의 옷을 최씨가 교육자료로 쓰겠다며 가져가 안 돌려주자 말은 못하고 울기만 했었다. 덕혜옹주의 옷은 일본의 막부 도쿠가와(德川) 집안에게 넘어갔다가 지금 동경문화대학 박물관에 있다.

윤황후가 남긴 여러 점의 사진중 특히 황후시절 화려한 원삼차림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열여섯 일곱 나이의 황후. 화려함과 정숙함이 녹아든 이 사진을 보면 서양인이 소개한 초라한 차림의 궁녀 사진 한 장을 놓고 민비일지 모른다던 가설이 얼마나 허구인지가 금방 판결난다. 윤황후가 작고하기 전 원삼차림으로 찍은 사진은 황후의 위엄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덕혜옹주도 영왕비도 옷의 화려함과 기품은 그 궁녀사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1999년에는 윤비의 친정조카 윤건로 윤흥로 두 분에게서 윤황후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마다 윤비의 일생에 끌려 들어갔었다. 주변인들에 따르면 국혼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명예롭고 신데렐라가 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자질도 자질이지만 물리적으로도 국혼을 뒷바라지하고 유지할 만한 엄청난 재력이 있어야 했고 역사의 소용돌이에 자칫 파멸할 수도 있는 운명을 감당해내야 했다. 광산 김씨네에서는 국혼을 거절했다는 말도 들었다.

<사진3> 1909년 16세의 윤비. 화려함과 정숙함이 녹아든 젊은 황후의 전신상이다. 이 옷을 포함해 윤비와 순종의 옷은 교육자료로 쓰기 바라는 윤황후의 뜻에 따라 세종대학에 가있다.

윤건로 흥로씨의 생부 윤홍섭은 윤황후의 큰 오빠였다. 정치적으로 표면에 나서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일보 유광렬의 증언에 의하면 ' 윤황후는 항일운동을 위해 기만원씩 지출했다. 윤황후에게서 나오는 독립운동 자금을 윤홍섭이 대리 지출, 돈을 뿌리고 썼다.' 고 했다. 신익희의 일본 학비를 대어준것도 윤홍섭이고 미국에서 이승만을 지원했다. 일본인들은 그를 독립운동가그룹의 일원으로 주목했지만 내사로만 끝내고 표면화시키지 않았다. 다음은 윤건로씨의 증언이다.

"내가 본 여인들중 윤황후처럼 그렇게 훌륭하고 품위있는 여성은 흔치 않았다. 엘리자베스여왕이 다이애나비 죽은 뒤 처신한 것을 보면 성깔있는 보통여자의 성정이 드러나 보였다. 그래도 지금은 품격을 지키고 사생활에선 어떤지 몰라도 분위기 좋다.

그러나 내 고모 윤황후는 말씀도 적었고 필요한 말만, 궁금한 것만 물어보셨다. 대도 세어야 했지만 판단해서 일을 처리하는 데 큰 실수 없이 평생을 지낸 분이다.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 너무나 비극적인 인생이셨다.

정초, 탄신, 특별한 날, 행사, 비원 야유회 등 날에 가고 정기적으로 입궐했다. 윤황후는 내 고모이시지 국모라는 느낌은 잠재돼 있었다. 그래서 덕혜옹주나 이구씨와도 두어번 만났을 뿐 잘 안 만났다. 이방자 여사도 자주 안 찾았다. 우리는 윤황후의 친정조카로서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며 내입으로 우리가 누구라고 평생 내세워 본적 없다.

윤황후께서는 불만이 있으면 얼굴을 조금 찡그리는 정도였을 뿐 소리지르거나 하는 일 없었다. 내가 우리 조모와 함께 입궐해 뵈면 직접 안 묻고 '쟤가 그동안 좀 앓았다는데 그후 좀 어떻지요?' 우리 조모에게 깍듯이 존대를 했다. 나는 마마께서 묻기 전에는 어려워서 말을 못했다.

의왕비 김숙 여사는 성격이 활달했다. 우리에게 말씀도 잘하셨는데 슬하에 혈육이 없었다. 왕가에 전반적으로 손이 귀했다. 1966년 춘추 72세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윤황후 돌아가시고 그 뒷정리를 하는데 본겻으로는 내가 친정조카로서 가장 나이든 남자였음에도 당국은 일체 의논이 없었다.

나와 윤황후의 관계를 굳이 생각지 않으려고 한다. 그분은 애석하고 아깝고 존경스럽고 가끔 그립다."

왕비로서 겪은 나라의 멸망과 33살에 혼자되어 겪은 생활, 파란만장 역사 속에 혈육 한 점도, 왕실 조직이랄 것도 없이 살던 윤황후. 그러면서 스캔들 한점 없이 이어간 삶이 경이롭고 그 고요함과 위엄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비극적이면서 외경스럽다. 윤황후를 지켜주어야, 일기를 건사했어야 한말의 복잡한 역사를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정부의 힘이 적극 미치지 않았고 유언도 지켜지지 않아 네 상궁들은 아무 재산도 없이 빈곤에 허덕이다 작고했다.

고종의 고명딸, 합방 이후인 1912년 태어났지만 고종이 너무도 사랑해 일제에 아랑곳 않고 옹주라는 품계를 주었던 덕혜는 13세때 일본으로 갔다가 결혼까지 했으나 끝내는 정신병원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유모도 없이 영왕과도 격리된 채 혼자 적지에 떨어진 풀각시같던 왕녀에게 그 측근은 남앞에서는 위해도 안 볼때면 그녀를 윽박지르는 무시무시한 존재였다고 한다. 그녀는 말도 표정도 없어졌다. 타협할 수 없는 환경과 사람들에 대한 철저한 무시였는지도 모른다.

1962년 환국한 덕혜옹주와 윤황후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낙선재에서 덕혜옹주는 윤비에게 협배를 했다. 이들은 정면으로 보지 않고 모로 꺾어 앉아 있었다. 언뜻 듣기를 왕실의 법이 그렇다고 했다. 덕혜옹주는 윤비에겐 큰절을 했지만 손아래인 이우씨의 부인이 자신에게 큰절을 올릴 때는 머리를 끄떡하는 것으로 인사를 받았다. 사람들은 덕혜옹주가 정신병자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왕실에서 헤어진 지 40년만에 역사와 인생의 온갖 풍상을 겪고 만나는 두 사람이면서도 이들은 격정을 드러내지 않고 바로 어제 대궐 안에서 그러했듯 천연스러운 태도를 보여 품격을 지켰다. 그 사실은 잊을 수 없다. 일반사람들이 수십년만에 만나 부둥켜안고 눈물과 넋두리로 어울리는 것과는 달랐다. 두사람은 끝까지 왕실여성의 기품을 지니고 있었음을 증명한 셈이다.

윤황후는 병든 몸으로 환국한 영왕과는 한번도 조우하지 못했다. 충격이 있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관계자들이 두사람의 만남을 마련하지 않았던 것이다. 영왕이 환국하던 날 윤황후는 낙선재에서 그가 탄 차가 지나갈까 하여 문에서 기다렸는데 차조차도 그런 배려없이 병원으로 직행하고 말았다. 그날 낙선재에서는 떡국을 해먹어 영왕 환국의 기쁨을 누렸다. 그것이 전부였다.

1965년 윤황후는 미리 유서를 남겼다. 1966년 작고하고 신문에 공개된 유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남은 여생을 오직 불전에 귀의하며 세월을 보내던 중 뜻하지 않은 6.25 동란을 당하자 한층 더 세상이 허망함을 느꼈던 중 내 나이 이제 70여세 되오니 불세계로 갈 것밖에는 없어 내 뜻을 표하노니 생전에는 재산이 없어 마음대로 못한 일이 허다하다.

사후의 일만은 내가 결정하니 뜻을 받들어 처리해 주면 나에 대한 보답은 다한 것이며 생전에 낙선재에서 세월은 흘렀으나 내 뜻은 그것이 아니었으니 형편에 따라 장례일은 하되 염불소리 외는 조용히 하며, 소리 내 우는 자는 내 뜻을 어기는 자이며 부탁이니 장례 후에는 유언대로 도인스님께 영가를 태우고 일주년에 마치게 하며 만일 관리국 사무실에서 일주년 부담을 안한다면 나에게 뜻이 있는 사람들은 부의를 할 듯 하니 그것으로 하며 부의의 남은 것이나 또는 내게 돌아오는 재물이 있으면 수족같이 부리던 상궁들도 조반석죽이라도 마련해 주고..

재차 말하노니 부디 낙선재에서는 고연할 생각말고 신신부탁하노니 사사로운 욕됨이 없게 처리하길 부탁하나니.. '

조선시대가 아무리 유교가 지배하던 때였다고 해도 역대 왕의 비들은 남편과 세자의 안녕, 국가 안녕을 비는 불사를 많이 했다. 절에 남은 유물들에 왕비가 관련된 것들이 그런 연유다. 윤황후의 행적은 그러나 유난히 파괴되고 대접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왕실의 한끝임을 특권처럼 내세우는 이들도 없지 않다. 나로서는 윤건로씨가 방자비나 덕혜옹주와의 만남도 삼가고 사는 것이나 윤황후와 덕혜옹주와의 만남이야말로 한국인으로 그렇게 우아하고 진짜 서울사람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아 너무도 맘에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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