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유경의 문화기행 '서울, 북촌에서' <6>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유경의 문화기행 '서울, 북촌에서' <6>

백송과 ‘젊은 그들’

북촌의 길은 큰길 작은길 합해 거미줄처럼 이어지면서 전체를 다 휘감아 돈다. 평지에서 시작해 계동 가회동 원서동 한쪽부터 가파른 언덕받이가 되고 삼청동 한쪽은 절벽 위에 올라가 있지만 가리마같이 난 길로 북촌 일대 어디든 다 연결된다.

10여개 동을 아우른 이 길을 다 합치면 수십킬로미터가 될 것이다. 막다른 길처럼 보이는 좁은 골목에도 종종 사람이 지나갈 만하게 뚫려있고 모퉁이를 돌아서면 또 다른 동네가 시작된다. 북촌의 정수는 이 골목길을 지나는데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 하다.

<사진 1> 6백년 넘은 재동백송. 하지권

영국인 앵거스 해밀턴이 1901-1903년 한국에 왔다가 쓴 글에 서울거리를 언급한 구절이 있다. 금강산 기행문을 남긴 그는 당시 한국을 독립국가로 인식하는 데도 인색하지 않았다.

"서울은 조만간 동양에서 가장 수준높고 깨끗하고 흥미있는 도시가 될 것이 분명하다. 밤이 되면 거리엔 흰옷을 입은 남성들이 지나다니는게 점점이 흩어진 흰점들처럼 보였다. 등불을 든 계집종을 앞세우고 땅에 드리우는 불빛을 따라 발걸음을 내딛는 이들의 모습은 한낮이면 전부 흰옷 입은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거리가 채워지는 것 못지 않게 서울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06년에는 헤이그 밀사로 파견되는 정사 이상설과 부사 이준이 일의 준비차 서정순, 이용익, 대궐의 고종 등을 비밀리에 찾아가 협의하는 과정이 그의 사위 유자후가 쓴 이준선생전(1947년 서울 동방문화사 발행)에 나온다. 명절날이면 어디 다니는 것을 주변에서 특별히 의심하지 않는 것이니 터놓고 심방할 수 있는 그해 1월 대보름 날을 택해 직접 집으로 찾아가 만나는 길이 묘사되어 있다.

"저동 프랑스교회당 부근에 살던 이상설선생은 아침일을 마치고 나섰다. 그는 명동으로 내려와 구리개(을지로) 네거리에 당도하여 동서남북의 시정을 한번 바라보고 운종가(종로)로 향하여 종로의 종각을 지나쳐 典洞屛(안국동)門으로 올라와 안동 별궁 동향 담을 끼고 한참 올라오다가 北署安洞(안국동) 11통 16호의 문패가 붙은 집에 이르러 통자하였다. 그 집 주인은 이준선생이었다"

<사진 2> 지금까지 남아있는 조선시대 관청건물 종친부. 하지권

"이준선생은 안동별궁 지나 동십자각을 지나 경복궁 광화문앞에 다달아 고종황제의 황제즉위를 기념하는 황토현 기념비각(광화문비각)까지 내려와서 서궐 흥화문(신문로 경희궁의 정문)을 향하여 올라오다가 남쪽으로 뚫린 골목으로 들어서니 이곳이 즉 五宮골(신문로)로서 이 오궁골에서 제일 큰 집이 탁지부대신 이용익의 집이었다. 청직이를 통하여 면회를 청하니 .."

"대궐의 박상궁은 밤중에 별궁에서 사오채 지나 이준선생의 댁을 비밀리에 찾아왔다. 부인 이일정여사는 한번도 보지 못하던 상궁내인이 웬일인가 하고 의아의 눈으로 좌우간 일어 맞았다.
'이 밤중에 웬일로 찾아계십니까' '다른 일이 아니라 종현 이참판(이상설)의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부인은 딸 금영이를 불렀다. '너 저 어멈하고 사랑에 나가서 손님이 오셨으니 아버님 잠간 들어오시라구 여쭈어라' 금영이 예! 하고 어멈의 등에 업혀나가서 아버지를 맞아들여왔다."

수많은 길과 집들 사이로 거미줄같이 연결된 인맥을 따라 바삐 다니던 이런 움직임이 지금까지 역사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궁궐이 있고 아직도 조선시대 흔적이 그래도 몇 개는 남아 있는 북촌길을 걷노라면 오래전 일에 관련된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여서 서로를 맞아들이며 일을 진행했을지가 보인다.

재동 헌법재판소 구내에는 6백년도 더 된 거대한 백송이 있다. 멀리 떨어진 큰길에서도 나무줄기가 희게 빛나 보인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마치 청백색 레이스같다. 지금은 구내 테니스장에 주차장으로 휑하니 보이지만 고종때 이 나무가 있던 곳이 바로 구한말 개화파의 산실 박규수의 집이었다.

박규수는 청나라를 통한 실학문물 도입을 외친 연암 박지원의 손자다. 할아버지의 북학사상을 계승한 그의 집 사랑에는 오경석 유대치등 실학파와 양반청년관료인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박영교등이 모였고 이들은 한말 개화세력의 주체가 되었다.

<사진3> 재동 백송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고종의 사촌 한상룡이 지은 집 솟을대문. 백송아래 박규수나 민영익,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등의 집도 대충 이런 모양이 아니었을까. 하지권

민비의 조카로 고종과 민비가 주도한 개화정책의 선두이면서 민씨족벌이 속한 기득권 수구세력의 대표이던 민영익의 집도 여기 헌법재판소 구내에 있어 그의 집에 1880년대 외교통상을 담당하던 외아문이 설치됐다. 서광범의 집은 송현동 덕성여고터에, 김옥균의 집은 화동 정독도서관자리, 박영효의 집은 인사동 경인미술관 자리에 있었으니까 바로 지척에서 이들은 호흡을 같이하며 살고있었다. 같은 20대 나이의 젊은 그들은 민영익의 사랑에도 드나들며 시대를 논했다. 아마 서로의 사랑에 같이 드나들었을 것이다.

이들은 일본과 미국시찰을 함께 다녀왔고 개혁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받아들였던 청년관료들이었다. 이들의 모습은 1883년 보빙사로 미국을 다녀온 즈음의 기념사진, 1884년 일본에서 최초로 양복을 입고 나폴레옹처럼 오른손을 가슴에 찌른 포즈로 남긴 사진에서 익숙하게 보인다.

이들은 모두 말끔하게 면도를 해서 조선시대 남성 모두에게서 지겹게 보는 수염같은 것 없는 얼굴이다. 관복이나 조선옷차림 또한 최고양반답게 동정이 어그러지거나 하는 것 없이 엄정하고도 지극히 자연스럽고 품위있어 보인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연에서 일어난 갑신정변에서 이들은 김옥균 홍영식 일파 대 민영익이 속한 수구세력으로 갈려 죽고 죽이는 관계로 대결했다. 역사는 이들의 운명을 뒤흔들었다. 민영익은 죽다 살아나고 홍영식 박영교는 청나라군대에 죽었다. 가문이 멸족되어 홍영식의 아버지와 아내는 자살하고 서재필의 두 살난 아들은 역적집안이니 버려진 채 거둬주는 이가 없어 굶어죽었다.

일본으로 망명했던 김옥균은 끝내 민영익이 보낸 자객손에 죽었다. 오조약후 망한 나라를 떠나 중국에 망명했던 민영익은 거기서 이등박문을 사살한 안중근에게 변호사를 대며 석방운동을 벌였으나 수포로 돌아갔고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1914년 홍콩에서 죽었다.

<사진 4> 1883년 조선보빙사로 미국을 다녀온 개화파 청년정치가들과 주변인물. 한가운데 민영익, 서광범, 뒷줄에 유길준, 변수 등이 보인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인지도 모른다. 서광범은 손에 사진앨범을 들고 있고 민영익도 무언가 기념품을 들고 있는 듯하다. 수염을 면도한 새로운 스타일이다. 민영익 옆의 소년은 누구일까.

홍영식이 역적이 되어 죽으면서 백송 아래 그의 집터는 물론 몰수되었을 것이다. 불과 넉달후 그의 집터가 미국인 알렌이 담당하는 신식병원 광혜원이 되고(알렌이 민영익을 치료해 살렸으니 특혜를 받은 법도 하다) 이후 이 자리는 줄곳 국가재산에 속해 경기여고 창덕여고가 번갈아 자리했다가 1993년 헌법재판소가 지금의 건물을 짓고 들어섰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역적이 되어 죽은 이들은 10년후 미국망명에서 돌아온 서광범 법무부장관의 노력으로 모두 복권됐다.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 사이의 진검승부라 할까, 현실의 비장함과 이를 덮어가는 세월의 흐름이 북촌의 정신을 만들어 주는 듯하다. 시대는 그들을 넘어서 지금까지 진전해왔다. 이런 역사의 주인공들은 북촌 일대 '길'에 많은 흔적을 남겼다.

중학동 지금의 이마빌딩 자리도 조선을 개국한 일단의 한사람 정도전의 집터였는데 왕자의 난에 밀려 태종에게 죽은 후 축사가 되었다. 이곳은 강남개발붐으로 강북도 들썩이기 전까지 서울 기마경찰대가 있었다. 피차간에 정적끼리 가혹하게 짓밟아 태종의 마굿간이 된 그터와 기마대자리가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서대문 농협본부 자리는 세종때의 김종서 대감집이었다. 수양대군이 길을 가다 쓰고있던 사모의 뿔이 떨어졌다며 급하게 들른 척해 그를 맞으러 나온 김종서부자를 척살한 것도 사대문안 북촌에서 벌어진 일이고 그후 역사는 변했다. 이들은 2백년 뒤에 복권됐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적죄로 죽은 사람의 집터는 못을 파버리거나 해서 흔적을 없애고 국가에 귀속시키든지 승리한 자들이 차지하는 모양이다. 수년전 죽은 차우체스쿠 루마니아 독재자의 집은 아스팔트로 깔아버렸다는 뉴스를 들었었다.

김동인의 소설 <젊은 그들>은 대원군과 그를 받들어 활약하는 젊은 남녀들 이야기를 쓴 것이다. 또다른 젊은 그들이 개혁을 위해 죽고 죽였다.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북촌의 핵심에 서있는 재동 백송은 이런 정신이 응집된 땅에 뿌리박고 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