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회동과 안국동 일대, 북촌에 주택으로 남은 한옥은 대부분 1930년대 이후 지어졌다. 무엇이든 한국물산을 이용하자는 제 2차 물산장려운동(1929-1932)이 시작된 때였다. 이때 물산장려운동을 이끈 원로 법학자 최태영박사(학술원회원)에 의하면, 서울에서 택지를 작은 필지로 쪼개고 월부로 한옥을 지어 팔던 건양사라는 건설회사가 있었다.
경상도에서 면장을 지낸 정세권이라는 사업가가 조합형식으로 회사를 운영했다. 특징은 건축에 필요한 대목 소목 미장 구들장 토목 등 모든 기술인력을 조합원으로 하고 자사의 주를 이들에게만 분배하여 이익금을 재투자했다. 이때 계동 중앙학교 언덕받이는 콩밭이었고 앵두밭이던 혜화동 일대 땅값은 평당 15원이었다가 몇년 후에는 3백원까지 값이 뛰었다. 택지를 담보로 건축비를 지불하는데 월부제를 실시하여 돈이 많이 생기는 달은 많이, 아니면 적게 갚기도 했다. 초가집이나 일본집이 아닌 기와집을 짓고 구식 한옥의 불편한 점을 개량했으며 전기와 수돗물이 들어가는 시설을 했었다.
정세권(鄭世權)과 건양사(建陽社)라는 이름은 한옥주택을 연구하는 건축가들로부터도 꼭 듣게 되는 이름이지만,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는 않다. 유광렬(후일 한국일보 주필)이 물산장려운동회보를 편집했으며, 정세권의 아들이 보성전문과 서울대 상대를 다녔는데 회보도 인물도 찾을 방도가 없다.
동대문 밖 창신동과 숭인동에는 철종의 사위 박영효의 집 등 좋은 한옥들이 있었다. 한강이 수상운송의 거점이라 여기에서 재력가들이 많이 나와 이들이 동대문밖에 좋은 주택을 많이 지었다고 한다. 이들은 호사를 많이 부려서 동경 유학할 때 식모에 맷돌까지 가지고 와 빈대떡을 부쳐 먹었다.
삼청동 언덕 꼭대기의 한옥은, 문만 열면 아래로 까마득한 절벽과 그 아래 흐르는 개천이 내려다 보였다. 이곳에 세종때 명재상이던 고불 맹사성 대감네 집터가 그대로 남아있다. 맹대감 고불은 권력자의 모습보다는 겸손한 정치가에다 음악에 정통하고 피리를 즐긴 인물로 전하는데 이 언덕이 그가 소를 타고 피리불면서 다녔다는 길이다.
1939년도에 삼청동 35번지 방 5칸짜리 한옥이 9천5백원에 매매됐다. 평지의 한옥은 이보다 배를 했다. 여기서 살면서 겨울에는 언 길에 넘어져 팔다리 부러지는 일이 많아 조심스러운 곳이기도 했다. 북악산 물길이 내려오던 개천은 오래전 포장복개되고 지금은 은행나무 가로수가 활처럼 휜 길을 따라 서있는 근사한 길이 되어 삼청동 산책길의 멋을 내주는 명소가 되었다.
한옥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특별한 추억이 있다. 눅눅한 날이면 마른 걸레를 잔뜩 쌓아놓고 두꺼운 대들보와 마루를 반짝반짝하게 닦아놓고 보는 일, 수십개나 되는 문짝에 도배하기, 납도리 위에 굽도리(기둥 위를 가로지르는 둥근 재목을 말함)를 대어서 천장이 높은 집의 자랑스러움, 마당이 큰 집이라면 나무에 그네는 흔하게 매었고 연못에서 기르는 잉어가 달밤이면 솟구치는 소리를 방안에서 들었다. 도둑이 들었나 해서 나가보면 잉어가 수면위로 뛰어오르는 것이었다. 그림에 나오는 솟구치는 잉어모습이 그런 것인 듯 했다. 겨울의 추운 맛은 이구동성으로 나오는 얘기이고, 장마철 되기 전 맨발로 지붕에 올라가 깨진 기와 손보기, 집전체 높이의 3분지 1이나 되는 두꺼운 지붕에 서린 뱀 얘기를 하는 이들도 있다.
장교동에 있던 한규설 대감 집은 줄행랑이 달린 엄청나게 큰 한옥이었다. 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지은 집이고 문은 세겹이라서 다 닫으면 소리와 광선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1970년대 이 집의 별채가 주거용으로 남아있어 젊은 사업가의 신혼집이었다. 그때까지도 온돌은 한번 불을 때면 2,3일은 안 때도 될만큼 오래 따뜻했다. 세겹으로 된 문은 한식 건축의 진수를 보는 것 같았다.
99간 집이었지만 한규설 대감의 손녀대 이후 버티지 못하고 해체되기 시작했다. 안채는 열두대문집이라는 요리집이 되고 대문 양쪽으로 팔벌린 듯 붙어있던 수십개의 줄행랑방들은 모두 불하되어 작은 인쇄소들이 들어있었다. 대부분의 큰 한옥들이 이런 식으로 사라져갔다. 지붕과 뼈대만 남고 내부는 모두 변형되어 작은 상점들이 들어찬 99간 집들을 북촌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 일대에서 대대로 물려받은 한옥 저택을 지금까지 지니고 사는 대표적 서울 사람이 안국동 윤보선 전 대통령 집안이다. 워낙은 1870년경 당대의 세도가였던 민황후 척족 민대감에 의해 세워졌다. 지금은 윤상구씨가 1907년이래 5대째 기거하고 있는 문화재 지정 한옥이다.
솟을 대문과 중문을 지나 정원을 한참 들어가면 안채와 별채, 사랑채가 있다. 근대들어 손질한 시설들이 눈에 띄지만 여느 집에서도 보기 어려운 고상한 한식정원의 품위를 지니고 있다. 윤대통령이 퇴임하고 여기에선 국사찾기 강연이 열렸고 부인 공덕귀 여사가 지키고 있을 때는 운동권 인사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건축가인 지금의 윤상구씨가 거처하면서는 문화적 성격의 행사가 자주 열린다.
혜화동 김상협 전 국무총리댁도 오래된 한옥이다. 안주인 김인숙 여사가 차려내는 이 댁의 뛰어난 한식 상차림은 국제적인 외교무대에서 역할을 할 만큼 정평이 난 것이었다.
안방에서 드는 김여사의 상차림을 두고 독일 바이체거 대통령 부인이 '음식이 아니라 예술 같다' 고 평했었다. 전라도와 개성, 서울의 세련된 취향과 오랜 전통이 섞인 이 집안의 음식접대는 한번 맛본 이들에겐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어 중요한 의전에 큰 힘을 발휘한다.
정원에 큰 모과나무가 있어 가을에는 쿵 소리내며 익은 모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김여사가 손을 데어가면서 직접 참견하는 부엌에는 커다란 가마솥이 두 개, 장독대가 튼실하고 부엌살림이 대단하다. 손님을 맞느라 새로 갈아입은 옷의 긴 치마를 끌며 긴 마루를 바삐 지나가는 주인의 모습도 손님들은 인상적으로 받아들인다.
판소리 명창 고 김소희 선생이 살아계실 때 화동 한옥에서 가끔 여러 손님들이 모이면, 즉석에서 가야금 거문고 산조가 나오고 무용가의 살풀이가 벌어졌다. 부엌에서는 금방 부친 호박전을 소나기 비속을 뚫고 갖다주어 먹었다. 김소희 여사가 사석에서 부르는 노래 중에는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도 있었는데 정말 좋았다. 음식 이야기가 나오면 표현도 멋있어서 '소금을 첫눈 내린 듯 살짝 뿌려 절였다가...' 전을 부치는 설명이 그러했다. 더 오래 전에는 풍류객 박석태씨가 그의 사랑채에 여성친구들을 청했는데, 사이에 발을 쳐놓고 떨어져 앉아 거문고 연주를 들려주었다고 회고하는 여성이 있었다.
높은 언덕배기에 올라가면 가회동 일대 수천평에 걸치는 한옥 지붕의 장관을 다 조망해 볼 수 있다. 햇볕이 비칠 때, 눈 올 때, 비 올 때, 시시각각 아름답다. 이 일대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우진각지붕, 팔작지붕 등 여러 가지 지붕건축의 선이 드러나고 높이 솟구친 멋있는 솟을대문, 잘 가꾼 나무 등 정원일부가 보인다. 화가들이 그림그리는 이유를 알겠다. 북촌의 분위기를 아끼는 유명 인사들의 한옥도 많다. 모르긴 해도 그 집안에서도 멋진 삶의 형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회동 일대를 제외하고 한옥은 이미 연립주택 빌라로 대체됐거나 빌딩들 틈에 숨기듯 자리잡고 있다. 많은 한옥이 리모델링 중이다. 그러면서 주거만이 아닌 사무실 또는 상점으로 고쳐짓는 경우가 많다. 바닥을 마루로 전부 깔거나 벽난로를 들이고 현판도 달았다. 지붕과 기둥 몇개만 남기고 내부는 완전한 현대감각으로 마무리 되는데, 마당은 거실개념으로 통한다.
한옥 재건축을 많이 하는 김길성 대목이나 구가도시건축역구소가 보수하고 있는 집에는 대학의 건축과 학생들이 교수와 함께 현장답사를 나온다. '주춧돌에 그렝이질을 해서 반도체 생산하듯 기둥과 밀착시키고 건축의 어떤 부분이 잘됐고 안됐고 재목을 어떻게 쓴 것이고 마당공간이 어떤 구실을 하고' 등등의 '전문가적' 이야기들이 나온다.
김길성대목은 '한옥의 창은 요즘 양식건축처럼 높게 하지 않고 사람이 팔을 얹으면 팔무릎이 창틀에 얹어지는 높이가 바람이 잘 들어오고 거부감 없이 아주 잘 만들어 놓은 겁니다. 지붕 무게를 받치는 대들보는 활장같이 휜 목재가 힘을 받습니다. 흙 올라가고 무거운 기와 올라가는 지붕 큰 집에 쓰는 대들보 두께는 8치-9치가 되는 나무라야지요. 외국송보다는 육송을 써야 힘이 있는데 참 구하기 어렵습니다'고 한다.
여러 리모델링 한옥에 들어가 유심히 올려다 보게 된 대들보는 자연스레 휜 천연 목재로 된 보수는 아주 드물고 대부분 곧은 직선으로 된 수입목재 대들보가 과연 많았다. 한옥이면서도 어딘지 이질감이 느껴지는 부분이 그런 것 때문이었다. 구가도시건축 민도식차장의 말로는 '집주인이 일단 한옥의 본질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해서든 최상의 전통적 재목을 쓰고 싶어합니다'는 것이었다. 한옥의 평당 건축비는 아주 비싼 빌라와 비슷하게 먹힌다고 했다.
북촌이 서울시의 보호정책 아래 들어가면서 지원금을 받아 새로 고치는 집마다 연립주택처럼 똑같은 담과 창문, 대문, 통일된 색깔로 획일화된 어이없는 풍경도 눈에 띈다. 안국동 네거리 북쪽 재동초등학교에서 감사원까지는 소방도로와 도시계획아래 무자비한 직선도로로 대치되면서 양옆 가장자리의 잘생긴 한옥들이 중간에서 무 중동 짤리듯 했다. 차량통행도 그다지 많지 않은데 꼭 그런 식으로 길을 내야 했을까, 현대식 건설만이 능사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난다. 미국서 돌아와 가회동 옛 집터를 찾아보던 김남희씨(미 하버드대 한국어 교수)는 '이런저런 것 때문에 한옥동네의 위엄이 전같지 않아요' 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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