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네거리 사방 얼마큼은 눈을 감고도 알 수 있다. 전국 도로의 기점을 알리는 비각(심의석이 건축한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비각)이 있고 이순신 동상 뒤로 경복궁과 북악산, 20차선의 넓은 차로와 사방으로 난 길, 양옆의 오래된 건물 등이 서울 심장부 광장의 모습이다.
<사진> @하지권 (광화문과 해태 조각, 광화문 일대는 광장의 진정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광화문 남쪽 덕수궁을 에워싸고 교육기관과 외국공관, 언론사, 상가 등으로 한국의 근대화가 시작된 이 앞을 수십년 지나 다니는 동안 얼굴에 와 닿는 바람의 속도감까지도 피부에 새겨지다시피 되었다.
서대문에서 광화문 방향으로는 중고등학교의 긴 담장, 의수족 가게, 오래된 한옥과 양옥, 육교 이런 것들이 있었는데 2000년도를 전후해 거리가 완전히 달라졌다. 역사박물관, 흥인문이 세워진 공원, 햄머를 들고 지나가는 사람 머리를 내려치려나 싶은 조각, 말쑥한 건물군 안에 전개되는 비즈니스와 상업 공간이 보여주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
광화문 일대는 광장의 진정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조선의 왕궁 경복궁이 처음 생겨날 때부터 광화문 앞은 큰 광장이었음을 사진으로 알 수 있다. 구한말에도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집회를 가졌다. 근래에는 붉은 악마들이 모여 축구를 응원했다.
도시계획상 광화문에서 비각, 덕수궁을 지나 원구단이 그대로 보전되어 끊기지 않고 한 지역 안에 밀집됐다면 이곳은 정말 아름답고도 역사적 흐름도 한눈에 들어오는 장소가 됐을 것 같다. 그나마 남은 한식 건축물이 유산처럼 남아나지 않았다면, 여기는 서울의 도심이 아니라 먼데 아무나라 도심이라 해도 상관없이 됐을 것이다.
교보문고와 세종문화회관은 이 일대에서 지난 수십년 간 제일 많이 들어가 본 장소였다. 이곳은 아주 가볍게 들르는 건물안의 광장같은 느낌이다. 바삐 종종걸음을 치면서도 누군지를 쉽게 마주치고 지나는 책의 정글, 그러면서도 전해 오는 광장의 느낌이 좋다. 땅값이 비쌀게 분명한 광화문 한 복판에 이런 데가 있어서 참 좋다는 생각을 가끔씩 했었다.
건물 안의 또다른 광장같은 대리석 로비에서 기다리는 사람과 동행을 이뤄 빨리빨리 움직여 가는 모습이 그대로 도심의 한 일상이자 이 일대 공간의 생활 스타일을 전해 주는 그림으로 다가온다. 라일락이 무성한 마당을 벗어나면 다시 넓은 차로를 면한 큰길가로 나온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던 교보문고와는 딴판으로 여기 큰길가는 한적해진다.
여기서 제일 친숙한 공간은 세종문화회관 주변이다. 그중에서도 소극강과 대극장 사이의 넓은 폭의 돌계단 있는 곳이다. 세종문화회관은 무대에 대한 사랑 같은게 있을 때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다. 공연무대를 살펴야 하는 일의 긴장감으로 꽉 차 있을 때도 그 돌계단은 이상하게 마음을 안심시켜주는 일종의 심리적 여유를 주는 광장이었다.
32개의 돌계단은 위에 다시 돌바닥 광장이 전개되고 반대편으로 빠져나가는 출구가 성문처럼 나있다. 양옆은 대극장 소극장의 입구와 측면이다.
돌계단과 광장은 1978년 처음 시공될 때 건축가가 애써 시도했던 편안한 느낌의 공간이었다. 애초에 그 돌계단은 지나가는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 지금보다 훨씬 낮게 계획되었다. 그러던 것이 갑자기 정치적 압력이 가해져 요인출입을 위한 지하차도가 그 밑으로 나게 되면서 계단이 높아졌다. 계단은 키높이를 넘기게 되어 인간적인 느낌이 좀더 위압적인 것으로 변모됐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은 엄앤이 건축회사의 설계대로라면 좀더 뒤쪽으로 물러나 건축되고 앞마당에는 연못과 느티나무를 심을 작정이었다. 극장내부도 좌석배치가 설계자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가 2004년 김신환사장이 개수하면서 건축적인 면을 살렸다.
특별히 소극장 이층 객석에 올라가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이곳은 모든 생김새가 반듯하고 무대와 관객까지를 어울리게 담아내는 건축공간의 미학이 느껴진다. 무대를 보호하는 공간의 절제감이 관객을 맞는다. 화강석 계단을 나선형으로 돌아올라가면서 가시철망을 끊어 뭉쳐놓았나 하는 현대적 느낌의 샹들리에 '청사초롱'에 눈을 주어 본다. 조각같은 구원의 느낌이 있다.
공연무대를 위해 외부광선과 소음을 차단하는 몇 개의 두꺼운 문을 밀고 꺾어져서 좌석에 앉는 것 자체로 관객은 드라마에 참여할 극장적 상상의 세계에 와 있음을 느끼게 된다. 나는 죽어서도 생전에 공연을 같이 가보던 친구와 '귀신으로 집에 나타나지 말고(그러면 무서우니까) 각자 여기 극장 앞에 와서' 만나기로 했다.
여기처럼 무대와 관객을 위한 호사한 배려가 고맙게 느껴지는 곳도 없다. 이 극장의 건축가는 대극장이 여러 가지 정치적 압력으로 설계외적인 공간으로 바뀌자 대신 소극장 건축에 공을 들였노라고 말했었다.
반대로 이 극장의 계단과 노천 테라스가 객석이 되고 공연은 노천의 돌광장에서 열린 적도 있었다. 땅거미가 어둠으로 바뀌면서 주변 높은 건물 창문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사람들이 이 야외 무대를 내다보았다. 이것은 내가 광화문에서 본 가장 예술적인 도시풍경이었다.
어느 날 막오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잠깐 스쳐가는 적막감에 가방 속 거울을 꺼냈다가, 그 작은 거울 속에 뒷자리에 비껴앉은 한 낯익은 작가의 얼굴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좌우익 사상의 충돌 속에 살았던 그 작가의 얼굴과 인생이 순간 파노라마처럼 거울속에서 스쳐갔다. 실제 드라머를 우연히 극장 객석에서 보았다는 묘한 느낌을 가졌다.
한바탕 소란한 무대를 보고 다시 광장으로 나서면서, 한밤 불빛에 비쳐 시든 꽃처럼 보이는 꽃다발 더미들을 다시 보았다. 꽃을 덮을 만큼 큰 리본에 쓰인 사람이름과 직함이 곧 현실감을 일깨워 준다. 인파도 피할겸 일부러 옆문으로 나가 밟아보는 화강암 돌바닥과 돌계단을 천천히 걷는 일은 공연내용이 어떻든 세종문화회관에 오는 일의 부가가치인 셈이다.
소극장의 노천 테라스를 내려와 밟는 소극장 대극장 사이의 광장과 돌계단, 후문 쪽으로 뚫린 출입구는 또하나의 다른 세계다. 집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총총해 지기 전 생각에 잠겨 걸을 수 있는 돌바닥의 산책로는 기하학적인 네모 광장과 32개의 계단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 돌바닥 광장에 붙여진 이름도 없지만 로마 스페인 계단(영화 '로마의 휴일'에 남녀주인공이 만나 던 곳)에 사람들이 모여있듯 이곳에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해 서울에서 가장 예쁜 아가씨중의 한사람이었을 지금의 아내를 이 세종회관 돌계단에서 처음 마주쳤던 남편도 있다. 전체 계단이 눈높이 보다 높아 가려진 느낌이 들긴 해도 트여진 공간이 아름답다. 이 돌광장의 고적한 느낌은 그 때문에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극장 대보수 이후 야외 조각장이 되었다. 창의성을 한껏 발휘한 이상한(?) 조각들이 현대예술의 이름을 걸고 벽에도 붙어있고 바닥에 내던져지듯 자리하며 사뭇 다가온다.
극장주변에는 공연을 전후해 출연자며 구경온 관객들끼리 웃고 떠들고 하던 자취가 서렸다. 서울을 가장 문화적인 공간과 광장으로 인식할 수 있는 곳은 이곳 세종문화회관을 중심으로 한 광화문 일대일 것이다.
지나가며 새삼스레 극장 안을 바라본다. 그곳엔 기쁜 날 밤을 밝히는 청사초롱의 이름처럼 환하게 불이 켜지고 무대를 위해 외부를 차단하는 육중한 문들이 돌아서는 곳마다 서있다. 극장 밖에는 북악 능선이 극장건물 처마너머로 드리워지고 돌계단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수놓은 것처럼 서있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가로등과 빌딩 창문과 자동차에 불이 켜지면서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으로 접어든다. 이때부터 뭔가 말하고 움직이고 시선과 정신을 집중케 하는 또다른 현실의 시간이 무대에서 시작된다. 하루를 마감하기 전 그런 극장에서의 시간이 마련돼 있다는 사실이 삶의 여백처럼 다가오고, 그런 미학의 바다에 빠져 어느 날 하루쯤 극장에 가서 지내고 싶은 생각이 강렬해진다.
비로드같은 어둠이 내린 극장 밖으로 나오면서 때로는 사람들과 어울려 이제 보고난 무대가 어떻고 토론에 들어가던 뒤풀이는 익숙해졌다. 혼자 보는 적막감을 즐길 때도 많고 떠들썩한 어울림, 때로는 공허감이 교차되곤 했다.
그런 뒤풀이도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광화문 인파에 섞이면서는 그런 감정조차도 다 잊어버린다. 공연을 보는 게 일이었다는 생각조차 나지 않을 만큼 멍해지고, 생존의 다음 단계 일상행위로 돌입해 버리는 것이다. 광화문은 그렇게 해서 광장의 느낌- 도시에서 많은 사람과의 접촉이 이뤄지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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