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봄, '장기수에 대해 약간은 알고 있었지만 관심은 그리 많지 않았던' 김동원 감독에게 두 명의 노인들이 맡겨졌다. 둘 다 30년씩 복역하고 갓 출소한 '간첩'이란다. 당시 봉천동에 살며 빈민운동을 하고 있던 김 감독을 아는 민가협 신부님의 부탁이었다.
"92년, 다큐멘터리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이 있었지만 두 아이의 아빠로서 생활의 유혹을 느끼고 있던 때였다."
제작 기간 총 12년, 촬영에 쓰인 테이프만 5백여개, 총 8백시간의 촬영분량, 한국 최초의 미국 선댄스 영화제 '표현의 자유상' 수상...등 갖가지 '기록' 리스트를 가지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 <송환>(19일 개봉)은 김동원 감독이 장기수들을 처음 대면하러 가는 길의 불안한 읊조림으로 시작한다.
빈민촌 철거 현장을 누비며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 등을 내놓은 김 감독이었지만, 그 역시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간첩'이라지 않은가.
<사진 3>
출소해도 딱히 갈 데가 없었던 비전향장기수 조창손, 김석형씨를 받아준 것은 봉천동 산동네였다. 감독은 이들과 한동네에 살게 되면서 특히 감독의 아이들을 예뻐하고 정많던 조창손씨와 친해지면서 이들의 거침없는 이야기와 일상생활을 카메라에 담는다.
야유회에서 거침없이 '김일성 찬가'를 부르는 모습에는 이질감과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감독은 동시에 남한 여성과 결혼하고 싶다는 노총각 할아버지의 걸출한 노래·춤판부터 송환 전 마련된 여행길에서 아이처럼 물장난치고 즐거워하는 모습까지 꼼꼼히 챙겼다. '우린 이미 여러번 성서 읽었다'며 꽃동네 오웅진 신부에게 오히려 마르크스 읽기를 권유하는 장면과 취재온 조선일보 기자에게 점잖게 충고하는 모습에서는 빙그레 미소짓지 않을 수 없다.
장기수로 인해 고통받아온 남쪽 가족들, 눈물 흘리며 조 할아버지를 보내는 봉천동 주민들, '송환'은 말도 안된다며 울부짖는 납북자 가족까지 여전히 살아 펄떡이는 아픔을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현재 진행형의 현대사의 굴곡이 그대로 펼쳐진다.
<사진 4>
***장기수 할아버지들과 조근조근 쌓아온 관계를 잔잔히 펼쳐보이는 영화**
영화 <송환>은 결코 '장기수란 이런 것이다'라고 정의하며 관객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12년 동안 찍었다기보다는 김 감독은 그저 장기수 할아버지들과 조근조근 관계를 쌓아왔을 뿐이다. 2시간 반의 영상에 맺어온 관계를 꾹꾹 눌러담았다가 관객들에게 가만가만 펼쳐보인다. '겪어보니 이럽디다'라며 속삭이듯이. 이것은 '내 경험이고 내 느낌이요'라고 강조하듯, 감독의 나레이션은 이렇게 끝난다.
"조 할아버지가 날 아들처럼 생각하신다는 말에 별 해드린 것이 없어 부끄러웠다. 그 부끄러움이 이 작품을 마칠 수 있게 한 힘이었다. 조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
<송환>은 2003년 영화진흥위가 시작한 전국예술영화관 네트워크인 아트플러스가 독립영화 배급사 인디스토리와 함께 배급하는 첫 영화로 아트플러스 소속 8개 극장에서 전국 동시 상영된다. 비디오와 디지털카메라 등으로 찍은 화면을 필름으로 바꾸는 데는 영화진흥위의 독립영화 지원금 7천만원을, 극장에 상영할 프린트 비용은 '태극기 휘날리며'의 강제규 감독으로부터 지원받았다. 3월 8일 열린 시사회장엔 이장호, 하명중을 비롯해 김지운, 박찬욱, 강제규 감독과 안성기, 유지태, 배두나 등이 자리를 함께해 <송환>에 대한 따뜻한 지지를 표했다.
감독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기 위해 10년 넘게 지켜온 그의 둥지 <푸른 영상> 사무실을 찾았다. 마침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이 숨가쁘게 진행되던 12일 오전이었고 '이래서 개봉이나 제대로 하겠어'라며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김동원 감독은 겨우 진정하고 인터뷰에 응했다.
***"1인칭을 쓰지 않으면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스토리"**
프레시안 : 관객 입장에서는 영화 내내 함께한 감독의 나레이션이 관객과 장기수 할아버지들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관객들이 느낄 이질감과 거부감을 감독이 읊조려 불필요한 긴장을 미리 걷어낸다고나 할까요. 감독 입장에서 다큐 영화에 1인칭 시점을 썼던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김동원 : 1인칭을 쓰지 않으면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스토리였습니다. TV다큐에서는 멋있는 목소리의 성우가 권위있게 얘기하면 거부할 수 없는 '사실'로 느껴지잖아요. 하지만 사실 '성우'와 '다큐내용'은 아무 관계도 없거든요. 관객은 도대체 누가 저런 의견을 가지고 있을까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대화를 통해서 자기를 드러내듯이 다큐도 그럴 수 있거든요. 전지전능한 목소리보다는 감독의 개성과 느낌을 더 잘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레이션을 넣었습니다.
프레시안 : 감독님은 장기수들이 3-40년 동안 그 좁은 공간에서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들에 대한 전향공작그 자체였다. 명백한 악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인간적인 자존심 때문'이라고 하셨지만 어떤 장기수 할아버지들은 '영화에 감옥 안에서의 동지애와 사상투쟁이 생략되어 불만'이라 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한 인간이 과연 '군중 없이' 십자가를 질 수 있을까 의심스럽거든요. 장기수 할아버지들에게 그 군중은 바로 옆의 동지들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 분들이 감옥 안에서 했다는 사상투쟁과 동지애 등 그들만의 소통방식,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의미부여가 '이쪽의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에 절제하신 것인지요.
<사진 1>
***"공식적이고 흔한 것보다는 내 느낌과 경험을 중심으로 '새로운 해석'하고 싶었다"**
김 : 사실 그 분들이 제일 많이 하신 이야기가 감옥 안의 이야기입니다. 감옥 안에서 3-40년을 사셨으니 가슴속의 응어리가 좀 많으셨겠어요. 전향하지 않은 이유로 동지애와 죽은 사람들에 대한 부채감을 들구요. '늘 독방에 갇혀 있었고 고문받을 때는 격리돼 있었지만 옆방의 동지들에게 실망을 주면 안된다'이런 식으로 자신을 다잡은 거지요. 감옥생활을 꼼꼼하게 할까 고민하다가 영화 '선택'이나 MBC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에서 자세히 다뤄져 다른 방식의 접근을 택했죠.
인터뷰로 구성해야 하니 감옥 안 장면을 재연할 수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나의 관점'에서 본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너무 공식적이고 흔한 것보다는 내가 '선생'들을 만나면서 느끼고 경험했던 것을 중심으로 '새로운 해석'을 부여하고 싶었습니다.
프레시안 : 개인의 정체성이 없는 사람은 특정 조직 안에서만 영웅이 될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북한의 식량난을 부정하고 납북이라는 용어를 인정하지 않는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꼬장꼬장한 모습에서는 답답함도 느껴지던데요.
김 : 그 분들은 북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언급을 자신의 신변에 대한 '위협'으로 느껴요. 감옥생활을 하면서 생긴 피해의식이 있어서... 저도 긴 세월을 같이 했지만 북한에 대한 질문이나 정치적 이야기는 몹쓸 짓을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되도록이면 피했습니다. 어떤 할아버지들은 제가 영화 안에서 '독립영화 감독은 북한 가서 힘들 것이다', '북한도 빈부격차가 남한 못지 않다'고 언급한 부분이 마음에 안 드셨겠지만 그래도 직접적으로는 별 말씀 안 하세요.
***"이 영화에 대한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반응을 종합하면... B-는 되지 않을까"**
사실 영화에 대한 장기수들의 반응은 다양해요. '고맙다. 대단한 일 했다'부터 '다 좋은데 북한 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미국에 함께 싸워야지 남북한이 싸우면 안된다'까지...종합해서 학점으로 따지면 B-라고나 할까.(웃음)
그 분들 머리에는 50-60년대 북한 체제의 모습이 그대로 있는 거죠. 긴 세월 감옥 안에서만 있었기 때문에 청춘을 바쳤던 사회 이념과 희망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는 듯 했어요. 어리석어보이기도 하지만 순수해보였죠. 그 할아버지들이 옳은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충직한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프레시안 : 납북자 가족들과 6·25 참전용사 등으로 구성된 우익 단체에서는 장기수들의 송환을 반대하며 울분을 터트렸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김 : 그분들은 소통이 끊어진 채 증오하는 데만 익숙해졌잖아요. 그러니 인식의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고 흑백논리에 친숙해요. 그분들의 행동들은 당연히 이해합니다.
***"다큐는 여전히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프레시안 : 이념에 덜 압도된 조창손씨나 김영식씨가 주인공이 된 편집방향과 감독님이 스스로 '자유주의자'라 칭하는 것이 무관치 않은 듯 합니다. 영화는 '다큐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이 흔들리고 있던 시점이었다...'라고 시작하고 있는데 현재 다큐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 : 여전히,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큐는 정치적 주장이 강한 특징을 가지는 자기 생각의 표현입니다. 특히 저는 80년대 운동권 다큐로 시작했기 때문에... 이 송환도 그런 성격을 안 가질 수 없죠. 내놓고 그러지는 않지만 선동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선동성은 간곡히 얘기한다는 의미에요. 통일에 대한 관심도 환기하고. 다만 택한 방법이 아까 말씀하신대로 조근조근 얘기하는 것이었어요. 그것이 더 설득적이지 않나요? 그 아픔은 여전히 현실이고 현재진행형입니다.
프레시안 : 감독님은 특별한 감독이 찍은 특별한 사람들의 다큐라고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라고 하시지만 '다 죽으면 끝이야'라고 옛 동지의 무덤 앞에서 절규하는 김영식씨를 보면 너무 가슴이 짠합니다. 이 영화로 인해 현재 2차 송환운동을 벌이고 있는 전향장기수들의 운동이 잘됐으면 좋겠다 하는 바램도 있으실 것 같은데요?
김 : 물론 2차 송환운동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죠. 그 운동이 지금은 좀 활기가 죽었거든요. 김영식씨는 전주에 살다 2001년 서울 낙성대 '만남의 집'으로 옮기셨어요. 2선에 계셨던 분들이 1선에 나서서 2000년에 송환되셨던 분들이 해온 일들-학생들 만나고 여러 집회에 참여하고-을 이어받아 하고 계시죠.
<사진 5>
***"오히려 실미도와 태극기 뒤에 나와서 운이 좋았다"**
프레시안 : 송환 직전에 '송환' 대신 '결혼'을 선택하신 안학섭씨나 김선명씨의 연애 이야기가 좀 더 나왔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부인들이 어떻게 할아버지들과 연애를 시작하게 된거죠?
김 : 민가협 후원회원으로 할아버지들을 만나다가 가까워진 분이 많으세요. 얼핏 보면 이해가 잘 안 갈 수도 있지만 일반인들이 짐작하기 어려운 수준의 성격의 사랑인 듯 해요. 애정과 연민과 존경심이 뒤섞인...겉으로 말씀들은 별로 안하세요. 할아버지들은 애정표현도 돌려서 하시고. 예를 들면 결혼도 '사랑해서'가 아니라 '결혼 안하면 그 사람이 힘들어 할 것 같아서'라는 식으로.(웃음)
프레시안 : 12년의 기록을 2시간 반으로 압축하는 게 보통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작업에 착수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김 : 생각보다 별로 힘들지 않았어요. 시작을 했으니 끝내야겠다는 생각이었고 나를 정리하고 싶었어요. 뭐라고 표현하기는 힘든데 정리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힘들 것 같았죠. 영화는 제가 게을러서 지금에서야 나온건데 이 영화는 시사적인 가치 뿐 아니라 인간적인 이야기도 있기 때문에 송환운동이 치열하던 시기가 아닌 지금 나왔다고 의미가 반감된다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어쩌면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에 나온 것이 운이 좋은 것인지도 모르죠. 영화의 기형적 산업화에 대해서 언론에서 문제제기를 하고 있던 시점에서 나와서, 또 선댄스 영화제 가서 상도 타왔다니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져주는 것 같구요.
<사진 2>
프레시안 : 참, 선댄스 영화제서 '표현의 자유상'을 수상하셨는데 어떤 면이 호소력을 가진 것 같습니까?
김 : 그 사람들이 제일 많이 한 말이 incredible, Unbelievable이었어요. 한마디로 너무 놀랍고 못 믿겠다는 거죠. 사람을 3-40년동안 감옥에 가둔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놀라울 뿐이라는 거에요. 만델라가 28년이었잖아요. 10년 넘게 찍은 것도 '언빌리버블'한 거죠. 게다가 한반도 상황을 잘 몰라요. 정치적인 동시에 인간적인 서사시로 정도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고통의 현장엔 늘 카메라가 있어야"**
프레시안 : 영화 안에서 삶의 현장과 사람의 상처에 카메라를 들이대는것에 머뭇거리고 미안해하는 감독님의 모습이 참 와닿았습니다. '역사를, 특히 비극을 다룰 때는 미안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도요. 저는 집회현장을 취재하면서 제일 곤혹스러운 때가 울부짖고 있는 사람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이었거든요. 근데 '이건 못할 짓이다' 생각하면서도 코앞에 들이대고 찍은 사진이 독자 입장에서는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는 것이기도 해서... 참 딜레마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김 : 기자들이 막 몰려가서 몸싸움하면서 사진 찍고 그러는 것을 보면 저는 우선 기자가 아니라는 것에 감사합니다.(웃음)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못할 겁니다. 대상에 대한 배려 없이 절규의 모습에 카메라를 바로 들이대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 같구요. 특히 카메라는 약자에 대해서 잔인한 것 같애요. 사진을 통해 고통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 일정 영향력은 있지만 고통의 이유라든가 큰 맥락은 사진 한 장으로 전달할 수 없거든요.
그를 위해서는 카메라가 늘 그 자리에 있어야죠. 그러면 경쟁이 심하지도 않고.(웃음) 예를 들면, 기자들이 보통 집회하면 연단 앞에 바글바글 모여 있잖아요. 그게 아니라 집회를 준비하거나 마무리하는 과정이라든지 집회가 끝나고 한참후의 사람들의 이야기라든지 그런 게 중심이 되어야겠죠. 다큐가 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현장의 이면의 것들을 잡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 : 요즘 작업하시는 게 있다면? 그리고 앞으로 계획은?
김 : 상계동, 봉천동, 행당동 그 뒤의 얘기를 작업하고 싶어요. 2차 송환운동 얘기도 그렇고. 아마 죽기전에 다 못할 것 같습니다.
***"개봉을 앞두고는... '송환'을 앞둔 느낌"**
프레시안 : 시사회 반응은 아주 좋던데 개봉을 앞둔 소감을 말씀해주신다면?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파고들 거라고 확신하시는지?
김: 개봉 앞두고는 기대도 되고, 두렵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송환을 앞둔 기분이죠.(웃음) 보는 사람마다 개개인의 배경이라든지 감수성에 따라서 반응이 다르겠지만 다큐관객은 차별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영화를 부담없이 보고 쉽게 문제를 지적할 수 있는 일당백 관객일 것입니다. 10만이 목표에요. 일당백이니 10만이 보면 천만이 본 효과 아니겠어요?(웃음)
김대중 정부 이후 진전된 남북관계를 바탕으로 99년 본격적인 송환 운동이 시작된 후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과 함께 송환 운동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크고 작은 갈등 끝에 비전향 장기수 63명은 2000년 9월 2일 가까스로 북으로 송환된다. 갖은 고문 끝에 전향해 송환되지 못한 이들은 2000년 전향무효소송을 내고 지금까지 2차송환운동을 벌여오고 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탄핵정국과 3-40년을 견뎌내고 돌아가는 혹은 돌아가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니, 이렇게 안 어울리는 조합이 있을까. 허나 어쩌면, 격랑에 휘말리기 쉬운 지금일수록 12년이 넘는 긴 호흡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