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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 없이 서울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김유경의 '문화산책']<19> 서촌 2 - 사직단에서 정조임금이 물은 것, 그리고 예술가들

사직동에는 사직단이 있다. 조선왕조를 세우며 궁의 서쪽에 토지신과 곡식신을 받드는 사직단을 두었다. 1908년 이래 제사를 폐했다가 1988년부터 되살아나 9월 셋째 일요일마다 사직대제가 거행된다.

사직단 구역은 많이 축소되어 옛 그림에서 보이는 건물도 사라지고 지금은 2개의 담과 8개의 홍살문을 겹겹이 두른 사직터 만이 보존된다. 그 안에 화강암 장대석을 3벌로 쌓아올린 네모 반듯한 평면의 사(社)단과 직(稷)단이 나란히 있다. 단 주변 4방향에서 올라가는 계단도 3층이다.

높이 1m, 사방 7.65m의 정사각형 단에는 황토 흙을 깔았다. 원래는 오색토를 깔았는데 자꾸 혼합되어서 아예 황토로 대체했다. 나쁜 기운을 제거하는 황토의 역할이 생각된다. 1980년 충남 은산별신제 때에도 집집마다 대문에 금줄을 치고 그 앞에 황토 흙을 소금처럼 뿌렸던 것이 생각났다. 황토가 이처럼 고전적으로 쓰이는 의례는 이런 제(祭)뿐인가 한다.

▲ 높은 데서 바라본 사직단. 2겹의 담과 8개의 홍살문이 둘린 가운데 토지신인 사단과 곡식신인 직단 두 개의 단에는 황토 흙이 깔려있다. 서울에서 보는 가장 고대사적 풍경이다. ⓒ 이순희

종묘제례와도 달리, 땅과 신위가 그대로 통하게 만들어진 사직단은 그 생김새부터 독특한 기운이 느껴진다. 사와 직 두 개의 단에는 원래 위패처럼 밑부분은 네모나고 윗부분은 둥근 (天圓地方) 화강암 신위 돌이 황토 땅에 박혀 있었다. 석주(石柱)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국사(國社) 국직(國稷)으로 불리던 신위가 고종의 황제국 대한제국이 되면서 태사(太社) 태직(太稷)으로 승격될 때 이들 과거의 석주는 땅에 묻고 태사 태직 신위는 새로 제작했다. 이때 사단의 국사 석주만큼은 다 묻지 않고 윗부분이 드러나 보이도록 해서 그 존재를 남겨두었다. 지금 사단 황토 땅에 남아 있는 천원지방의 돌이 그것이다.

돌은 오래되어 보이고 윤이 나고 어딘지 신비롭게 느껴진다. 정조(재위 1776~1800)실록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 가까이서 본 사단과 직단. 세벌장대를 쌓아올린 사단(사진 위쪽)에는 매몰된 석주가 일부분만을 드러내 보이며 남아 있다. 정조 임금도 그 옛날, 이 돌이 무엇인가 물었다. ⓒ 이순희

정조 2년, 임금이 이곳에 들러 기물 등을 살피다가 '저기 사단(社壇)에 있는 돌은 무슨 돌인가?' 물었다. 책임자가'오례의에 사(社)가 있으면 석주가 있다는 글이 있는데, 단 위의 돌은 이를 따른 것입니다.' 하였다. 정조대왕도 보통사람처럼 단위에 있는 그 돌이 궁금했었다!

제례는 유교식이다. 평소 신위각 건물에 들어 있던 태사와 후토(后土, 태사의 배위) · 태직과 후직(后稷, 태직의 배위) 신위는 대제 때면 꺼내 제관들이 받들고 온다. 양 · 소 · 돼지 · 토끼 · 노루 고기 등이 날고기거나 장조림 되거나 삶아서 제물로 오르고 소금이며 곡식 · 떡과 술, 나물도 오래된 예법에 따라 올린다. 옻칠한 검은 그릇과 대소쿠리 그릇, 조각한 놋쇠제기가 쓰이는 것은 종묘대제와 같지만, 제수의 규모는 조금 다르다고 한다.

제사를 총괄하는 집례가 창을 하듯 제사의 순서('홀기'라고 한다)를 지시하면, 조선시대 제복차림의 제관 수십 명이 그에 따라 움직이며 술을 올리고 절을 하고 제물을 태우는 등 의례를 진행한다. 종묘제례에 쓰는 노란색과 구별해 사직대제는 서쪽을 상징하는 푸른색 헝겊으로 제상을 장식했다. 종묘대제의 축소판 같은 형식이고 붉은 관복 차림에 8줄로 맞춰 서서 추는 제례무인 일무와 국립국악원의 제례악 연주가 함께한다.

▲ 2011년 사직대제의 장면들 - 위로부터 석주가 보이는 사단에서 제를 거행하는 제관들, 제가 끝난 뒤에 공개된 사단의 제수차림, 신위의 철수장면(푸른색을 주목해 볼 것). ⓒ 김유경

사직단 옆으로는 단군성전, 황학정, 그리고 인왕산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서울도성의 성벽이 이어진다. 홍석창의 단군영정 등 유명한 예술가들이 만든 단군상, 서예가 김응현 손경식 글씨 등이 모여있는 단군성전은 서울시 보호문화재이다. 필운동 이 동네에서 살던, 선조때 임진왜란을 겪어낸 정치가 이항복의 글씨 필운대(弼雲臺)도 돌에 남았다. 조선시대 명랑얄개였던 이항복과 이덕형 두 신동 소년의 일화 배경도 이 부근인가? 황학정에는 고종 황제이래 지금도 활 쏘는 사람들이 모인다.

오래된 역사가 켜켜이 똬리를 틀고 있는 이 지역은 그러나 가뿐한 한나절 산책코스로 현대인에게 다가온다. 도시의 여유 한때인 하이킹을 즐기러 가는 이들이 계속 지나간다. 우연 같지 않게 사직동의 이들 유물은 하나같이 한국인에게 주어진 최초의 국가를 잊지 않으려는 의례와 함께 국가의 틀 안에서 영위되는 삶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모두 껴안고 있어 보인다. 사람들은 여기서 시장과 집터를 이루고 지금까지 오래오래 살아간다.

▲ 서촌 종로도서관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도서관 설립자 이범승 흉상. 한 소녀가 바라본다. ⓒ 이순희
근대사의 일면도 이곳에 있다. 사직단과 이웃해 있는 종로도서관에는 1920년에 최초로 종로3가 파고다공원(탑골공원) 옆에 근대식 사설 도서관을 세웠던 황해도 장련(長連)부자 이범승(1887~1976)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종로도서관이 그 후신이 된 것이다.

문화재청은 사직단 주변을 정비할 것아고 한다. 사직단에서 종로도서관이 이어지는 길에 볼품없던 담을 헐고 조선식 돌담을 쌓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며 사는 오랜 삶의 형태에 이 동네를 떠나지 못하는 염지윤 씨는 "오래된 전나무가 저기 서 있는데 새로 쌓는 돌담에 어울린 풍경이 이곳을 근사한 길로 만들어 줄 거라고 기대해요"라는 기쁨을 말했다.

서촌의 오래된 역사에는 인왕산이 배태한 예술가, 지식인들의 활동도 있다. 권력자와 애국자들의 거처 흔적도 있는데 이는 또 다른 장에서 풀어갈 이야기다.

옥인동 꼭대기 수성동(水聲洞) 기린교 있는 계곡을 보면 이 동네 시모임 옥계시사를 이끌던 천수경 등 이곳에 모이던 이들의 풍류와 시흥이 짐작된다. 1817년 김정희가 효자동 백송(白松)이 있는 자기 집에서부터 찾아와 합류하던 자리, 그의 글씨 송석원(松石園) 세 글자가 새겨진 바위 등이 남아 있다.

화가 정선(1676~1759)이 그린 '비 갠 뒤 인왕산 풍경(인왕제색도)'은 억세게 생긴 인왕산 바위를 마치 그 앞에서 쳐다보는 것처럼 그렸다. 비 온 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그림에는 나무들이 많고 그 속에 집이 하나 있다. 이 집이 정선의 평생 친구 문장가 이병연의 집이라고도 한다. 인왕산 우람한 바위는 지금도 자하문로를 지날 때 마주 보는 풍경이다. 다만, 몇 채의 옛집 대신 셀 수 없이 많은 건물이 가득한 오늘의 삶이다.

또 다른 옥인동 풍경 그림들이 많다. 여러 화가들은 하나같이 서촌 사람들이 즐긴 풍류와 삶을 그림 속에 드러내 준다. 1970년대 이후 인왕산 깊숙한 곳에는 고급요정 선운각도 있으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가 기업의 연수원 같은 것으로 바뀌었다.

이 일대에는 현대의 예술가들 면면도 화려하다. 동양화가 박노수, 가야금산조의 명인 김죽파, 많은 건축가 등이 산다. 시인 이상의 하숙도 있었다 하고 소설가 현진건은 부암동 안평대군 무계정사 터에서 살았다. 인왕산 기슭 청운공원에는 종로구청이 만든 '윤동주의 언덕'도 생겼다. '윤 시인이 누상동에서 하숙 살 때 이곳을 거닐며 시상을 다듬었을 것'이라는 설명 옆에 시 한 편이 새겨진 돌이 있다.

▲ 정선의 그림 '수성동(水聲洞)'에 나오는 옥인동 기린교 주변의 최근 복원 공사 현장 ⓒ 이순희
▲ 부암동 안평대군 무계정사 터의 오래된 우물 중 하나. 빈터에 우물 두 개가 그대로 전한다. ⓒ 이순희

그 옆에 '인왕산에서 굴러 온 돌'이란 제목의 미술품이 있다. 2007년 세 명의 건축가가 인왕산의 유명한 바위 모양 철골을 만들고 지나가는 이들로 하여금 인왕산 돌을 그 안에 채워 넣도록 한 것이다. 지금 이 일대는 말끔한 도로가 돼서 꽤 멀리서부터 힘들여 돌을 찾아다 채워넣어야 한다. 둥근 타원형에 날카로운 돌멩이들 수백 개가 속속들이 드러난 모양이 '수류탄이 터진 것' 같은 야성이 전해진다.

▲ '인왕산에서 굴러 온 돌' 윤동주 언덕의 설치미술. ⓒ 이순희

'예술가'들은 곳곳에 있다. 인왕산에 가장 가깝게 난 필운대로 안쪽으로는 오밀조밀한 골목에 살림집들이, 길가에는 주택을 개조한 생활형 가게들이 많다. 정육점, 농산물할인점, 수퍼마켓, 문방구점, 생맥줏집 사이에서 30세의 주의미 씨는 한옥의 2평짜리 사랑방 한 칸에 재봉틀로 손수 만든 헝겊 공예품들, 잡화 등을 진열해 놓고 판다.

▲ 누상동 길가에서 본 작은 가게. 그 옆의 오랜 헌책방은 문닫았다. 생활에 밀착된 이런 가게들이 얼마나 더 버틸지 알 수 없다. ⓒ 이순희
"이 동네의 이런 조그만 가게에서 제 작업을 하며 장사하는 게 재밌어요" 한다. 헝겊 안경테도 있는데 아이보다 엄마가 더 좋아해서 사갔다. 옆에는 이 역시 가장 오래된 고서점이 있다가 결국 문을 닫았다. 큰길에 어린 소년이 꽃 한 송이를 장식한 생일잔치용 마분지 고깔모자를 의젓하게 쓰고 지나간다. 누군가의 수제품임이 보인다. 귀걸이를 10개쯤 한 가게의 젊은이가 문밖에 나와 담배를 피며 바람을 쐬는데 무슨 전위 예술가 같은 분위기가 풍긴다.

재래식 시장이 두 개나 성업 중이다. 아스팔트 포장에 현대화된 통인시장의 90개 가게에는 예술학도들이 몰려와서 가게마다 상품관련 설치미술을 붙여놓고 갔다. 칼 가는 할아버지를 시장 복판에서 오랜만에 봤다. 할머니가 어린 소년을 데리고 물건사며 돈 내는 연습을 시킨다. 올초 설 즈음해서는 이명박대통령 가족도 와서 과자랑 고기를 사갔는데 옷 얘기가 더 화제였다. 시장은 일상의 여러 광경들을 구경하고 재밌어하는 장소인 것이다.

그 아래 옥인시장('금천시장'이라고도 한다)은 땅 위에서 그대로 장사하는 중이다. 이 부근은 오래된 낡은 집들이 많다. 주민들은 한옥 보전에 반대해 곳곳에 '우리는 아파트를 원한다'고 써 붙여 놨다. 여기의 떡볶이 할머니는 화덕 하나와 종이상자 몇 개가 50년 된 가게 터이다. 젊어서부터 이 자리에서 순해 보이는 간장 떡볶이를 팔며 늙었는데, '고생이라기보단 재미있고 집에만 앉아 있으면 답답하다'고 한다.

어스름이 내리니 남정네들이 시장 안 술집으로 몰려와 자리를 차지하고 왁자지껄 흥겨운 시간을 보낸다. 시민들의 파티 타임이 시작된 것이다. 선뜻 시장 안 술집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주택가의 한 맥줏집 노천 테이블에 앉아 저녁 어스름을 바라본다.

▲ 인왕산 쪽에서 바라본 오늘의 서촌. 윗부분에 경복궁 서쪽 전각들이 모여 있고, 아랫부분 체부동 일대 양식 건물들 틈에 오래된 기와집 민가들이 보인다. ⓒ 이순희

연립주택들 많은 동네로 마을버스가 부지런히 사람들을 날라다 놓는다. 여기는 밤마다 주민들이 빠져나가는 여느 상업지구와는 다르다. 서촌 사람들은 동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편안한 일상풍경이지만, 서촌이라고 좋은 일만 일어나는 삶은 아닐 것이 분명하다. 한 지식인의 집안은 옆집도 모르게 야반도주해 나갈 일이 있었다. 그래도 수성동 계곡이 과연 원래 비슷하게 복원될지는 이들에게 좌우될지도 모른다.

체부동 한옥들 틈의 오래된 양옥은 건축가 손으로 지어진 집이 분명했는데, 노부부 둘만 남아 큰집의 1층만 쓰면서 살고 있다. 화분 여러 개가 이 조용한 집에서 지속되는 서촌 한구석의 삶을 말해준다. 이 집 앞으로 다시 지나가고 싶어 그 골목길을 찾지만, 번번이 실패하곤 한다. 이젠 너무 많은 서촌의 집과 골목 틈에서, 지나가는 이의 발걸음은 거기까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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