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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 없이 서울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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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 없이 서울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김유경의 '문화산책']<18> 서촌 1 - 영추문 앞 효자동 안쪽에서

경복궁 서쪽에서 인왕산 기슭에 이르는 지역을 '서촌'이라고 부른다. 효자동, 사직동, 옥인동 등 15개 동네가 여의도의 절반을 좀 넘는 좁은 터에 모여 있다. 북촌 영역에 비하면 그 3분지 1쯤 된다. 대궐 서쪽의 입지인 만큼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나타내는 사직단이 세워진 곳이고 인왕산 풍광이 한 발걸음 안에 있어 유력자들의 거처와 별장에다 예술과 풍류가 일찍 꽃피었던 곳이다.

그러나 더 강조되는 서촌의 특징은 이곳이 윗대(청계천 위쪽이란 말)라고 불리던 지역으로 환관, 별감, 아전 등 대궐 관리들의 주거지이자 근대 들어 중인계급의 부르조아적 진취성이 모습을 드러낸 터라는 것이다.

여기서 만들어진 오래된 생활의 자취는 요즘 와서 다시 향수를 자극한다. 서울 사람들의 마지막 자존심 같은 주거지 북촌과 함께 이곳 '서촌'이 없이 서울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 경복궁의 서문 영추문 앞의 한적한 지난 가을 풍경. ⓒ 이순희

경복궁의 서문 영추문 있는 효자로에서 서촌 산책을 시작한다. 길가에는 고도제한을 받는 야트막하면서 현대적 건물이 가득하다. 남아 있는 한옥들도 대개 근대 건물이다. 길은 생명을 지닌 구조인 듯 서촌에서는 효자로, 자하문로, 필운로 등 3개의 큰길로 나뉜 지역마다 개성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경복궁이 융성했을 때처럼 청와대 코앞인 효자로에는 관청 건물들이 많아 거리에서부터 공무원 풍의 남자들이 많이 보이고 관료적 분위기가 강하다. 옛날 이 지역에 대궐과 양반가에 딸린 관리들이 많이 살아온 전통이 현대판으로 바뀌었을 뿐이란 생각을 한다.

서촌은 1980년대 이후 큰 길이 계속 남북으로 확장되고 집들 사이를 뚫고 소방도로 등이 나면서 옛 동네의 원형은 많이 사라졌다. 이 동네 사람인 건축가 황두진 씨는 "이 동네에 있던 옛 환관들의 집은 문간서부터 안방까지 찾아가는 통로가 미로처럼 생긴 구조였는데 재개발 바람에 모두 헐렸다'고 했다. 거의 획일적인 구조의 한옥만 남아난 지금 이런 집 건축은 어떠했을지 보고 싶어진다. 단 몇십 년의 시차로 서울은 귀한 건축유산을 많이 상실했다.

그래도 정부 관련 건물들이 자리 잡은 터만큼은 그리 변하지 않은 듯, 그 주변 좁은 골목길 틈틈이 남은 옛 자취가 있다.

▲ 서촌의 한 골목. 주택들만 모여 있는 이런 풍경은 아주 드물게 남아 있다. ⓒ 이순희

길가 건물 뒤 실핏줄 같은 뒷골목 사이로 들어가 보면 어쩌면 수백 년 전 구조였을 것 같은 좁은 길 그대로가 남아 있다. 동 규모가 작아서 몇 걸음 걸으면 금세 동네 이름이 달라지지만, 인왕산과 어울린 주거지의 모습에다 시장과 작은 가게 등 동네와 밀착된 상업시설들이기에 더욱 친근하다.

크고 작은 한옥들이 반은 양식화 된 채로 붙어 있는데 어떤 골목은 100미터가 채 안 되는 길이 6번이나 꺾어지면서 미로를 형성한다. 한낮인데 비밀스러운 느낌이 들 만큼 조용하고 인기척도 거의 없는 살림집들이다. 환관들 집이 어렴풋이 느껴지는 듯도 하다. 최근엔 조용한 분위기를 찾는 출판사가 많은 것도 이해가 되고 직장인 풍의 남자들이 드나드는 주택 형식의 음식점들도 많다.

▲ 서촌의 다른 골목. 직업적 예술가들이 아닌 동네 자체에서 우러난 미감이 옛 서울에 대한 향취를 일깨운다. ⓒ 이순희

▲ 서촌 또 다른 골목의 매력. 이 지역이 쇼 같은 상업지구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이순희

'이곳과 북촌만이라도 서울의 옛 주거지다운 분위기를 지켜주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버텨낼 수 있을까. 북촌에 이어 서촌이 주목을 받으면서 자꾸만 화려해지는 화랑과 음식점을 필두로 삼청동 비슷한 유흥상업지구가 되어간다. 땅값이 널을 뛴다고 한다.

북촌은 이미 주거지 분위기가 깨지다 못해 어느 골목들은 일본 관광객을 접대하는 상점가 같은 아류들의 거리가 되었고 원주민들은 놀라 다 도망간 빈껍데기 동네가 되었다. 6개월 단위로 높은 집세를 내는 업종들로 바뀌는 상점마다 집주인이 아닌 '알바'들로 채워져 이웃 간의 교류도 없고 모래알 같은 인간관계로 바뀌었다.

점잖고 오래된 동네 분위기는 전연 고려하지 않고 몰려다니는 관광객만 눈에 보이는 듯 집채만한 간판과 진열장을 만들어 달고 교태 어린 쇼처럼 장사에 나서는 업소 풍경은 충격적이다. 대한민국 문화를 대표한달 수 있는 북촌의 생활상을 보존하기 바란다면 정책상 이 거리는 주거지의 기본을 해치지 않도록 강력히 규제했어야 한다.

이제 서촌마저도 머잖아 상업지구로 변모된다면 서울은 옛 정서와 역사를 모두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서촌 산책은 그래서 더 변하기 전에 찾아보며 생활의 근저를 확인해보는 일정이다.

▲ 효자동-통의동의 백송은 이미 말라 죽고 둥치만 남아 있다. 동네 온갖 기물들이 어지럽게 주변에 들어서 있다. ⓒ 이순희

이 동네 한복판에 통의동 백송(白松)이 있다. 수령 600년으로 서울의 나이와 맞먹은 흰 둥치의 거대한 소나무였는데, 십여 년 전 고사했다. 빙 둘러싼 집들 사이 공간에 흰 표피가 일부 보이는 나무 밑둥치가 남아 있고, 주변은 새끼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이 백송이 온전히 살았을 때의 사진이 어느 집 담에 걸려 있기도 했는데 아주 보기 좋았다. 지금은 근처 집들의 기물인지 술 상자며, 장독, 죽은 화분 같은 것들이 어지럽게 터를 점령하고 있다. 그걸 보면 이 동네 사람들이 특별히 자연과 나무의 아름다움을 누리고 사는 것 같진 않다.

▲ 서촌의 또 다른 골목 풍경. 오래된 주택가의 여유가 느껴진다. ⓒ 이순희

그래도 주변 골목길은 여유가 느껴져 허물다 만 담장에 기타가 하나 장식돼 그림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사실 이 옛 동네의 가치는 작위적인 예술을 감상하기에 앞서 동네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풍겨 나오는 유형·무형의 오래된 생활 속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 있다.

이곳 통의동 백송이 있는 장소를 망설인 없이 한 번에 찾아갈 수 있다면 분명 서촌 일대를 잘 아는 사람이다. 길가에는 화랑과 카페 투성이다. 이 지역에 속속 모여드는 예술가들이 보여주는 전시 품목은 온갖 취향을 드러내는 가지가지 물건들이다. 오래된 여관건물 안 房房마다구조 그대로 '예술을 파는 구멍가게' 가 되어 초현실적인 전시작품들이 들어서 있기도 하다. 근대 모더니즘의 시인 이상(李箱)의 난해한 시가 추상화처럼 흐트러져 쓰인 창문 안을 사람들이 기웃거린다.

▲ 담벼락의 낡은 회벽에 그려진 꽃나무 벽화가 있는 서촌 길. ⓒ 이순희

영추문에 비치는 하오(下午)의 서녘 햇살이 눈에 부신데, 건너편 그늘 속에 한 젊은이가 의자를 내놓고 앉아 책장을 넘기며 천천히 빵을 먹는다. 길가 집의, 회칠이 한 꺼풀 벗겨진 담벼락에는 자주색 꽃나무 벽화가 그려졌다. 마치 겉칠이 벗겨진 속에 처음부터 들어 있던 소중한 그림 흔적 같다. 무식한 소견으로 '예술가가 그렸나?' 생각 한다. 무표정한 한 남자가 뭔가 도구를 가득 들고 철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가 이 집의 예술가인가?

이들 사이 인도로 끊임없이 지나가는 인파는 예술 구멍가게의 창문과 담벼락 그림에 눈을 던지는 둥 마는 둥 동네사람에다 이 거리로 원정 구경 나온 한 떼의 젊은이들이 뒤섞여 있다. 가을 오후 '영추문 앞 효자동' 의 살아 있는 캔버스 같다.

200년 전에는 서예가 김정희(1786~1856)가 백송 있는 곳 어디쯤 살면서 서촌 끝 옥인동의 풍류객 친구들을 찾아 나들이했다. 이곳 효자로에서 자하문로를 건너 사직동, 옥인동까지는 걸어서 15분이면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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