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컴퓨터에게 말을 건넬 수 있는 수단이 키보드에 불과했던 시절에 컴퓨터는 신전(神殿)에 모셔다 놓은 신성불가침의 존재와 다름없었다. 컴퓨터라는 존재 자체가 귀하기도 했지만, ‘유닉스(Unix)'로 대표되는 난해한 명령어에 기꺼이 친숙해질 정도로 ’신앙심‘이 깊고 성실한 사람이 아니면 보통 사람들은 컴퓨터에게 말을 걸 수 있는 기회조차 갖기 어려웠다.
화면은 검정이나 초록색 바탕 위에 흰색 글씨가 단조롭게 깜빡거리는 ‘텍스트 모드(text mode)'가 전부였다. 요즘처럼 간단하게 버튼이나 아이콘(icon)을 눌러서 명령을 실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컴퓨터가 (혹은 컴퓨터가 사용하고 있는 운영체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명령어를 점 하나, 빈칸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입력할 수 없으면 컴퓨터는 그저 빈깡통에 불과했다.
이렇게 신전에 고이 모셔져 있던 컴퓨터가 지금처럼 대중의 삶 속에 자리잡기까지는 크고 작은 혁명이 여러 차례 필요했다. 스티브 잡스와 워즈니악의 애플 컴퓨터, IBM 호환 PC의 등장, 마이크로소프트의 도스(DOS) 운영체제, 워드프로세서(word processor)나 스프레드시트(spreadsheet)와 같은 응용 프로그램의 확산, 인터넷의 등장, 그래픽 기반 브라우저인 모자이크(Mosaic)의 출현, 이메일, 음악 파일 교환 등의 확산은 모두 컴퓨터의 대중화에 뚜렷한 기여를 한 혁명의 일등 공신들이었다.
***마우스의 탄생**
이러한 ‘공신’들 중에는 그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기억할 만한 것으로는 오늘날 널리 사용되고 있는 ‘마우스(mouse)'가 있다. 이제는 컴퓨터와 떨어뜨려 놓고 생각할 수 없는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기 때문에 누구나 당연하게 사용하지만 사실 마우스는 컴퓨터의 대중화에 박차를 가한 여러 가지 ’기술 혁신(innovations)' 중에서도 한 복판에 자리를 잡고 있는 혁명의 전범(典範)이다. 마우스가 존재함으로 해서 컴퓨터의 화면은 사용자에게 화려한 그래픽을 마음껏 보여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우스라는 존재의 의미는 단순히 ‘그래픽’을 가능하게 했다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철학자들은 사람들이 컴퓨터를 이용할 때 키보드만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을 이용해서 컴퓨터의 손(즉, 마우스)을 따뜻하게 감싸쥐는 행위에 주목했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컴퓨터를 빠르게 ‘두들김으로써’ 말을 듣게 하는 것이라 부드럽게 손을 잡아 ‘이끎으로써’ 의사 소통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의사 소통 방식의 진보에 감격한 나머지 컴퓨터가 인간 인식 구조의 연장이라는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컴퓨터란 인간의 신체가 확장된 외연이라는 급격한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한 주장을 어느 정도 사실로 인정할 것인가 여부를 떠나서 적어도 마우스의 등장이 사람과 컴퓨터 사이의 인터페이스(interface-사람이 컴퓨터를 이용하는 방식)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만큼은 누구에게도 분명했다.
***터치 스크린의 등장**
이와 같이 사람과 컴퓨터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노력에 있어서 마우스에 못지 않은 공헌을 한 기술이 바로 70년대에 개발된 ‘터치 스크린(touch-screen)'이다. 터치 스크린은 화면에 나타난 버튼(button)이나 그림을 직접 손끝으로 건드리기만 하면 되는 시스템이다. 마우스에 비하면 활용의 범위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지만 터치 스크린은 다양한 영역에 적용되어 컴퓨터와 사람, 특히 컴퓨터와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 절대 다수의 사람 사이에 놓여 있던 간격을 대폭 단축시켰다.
터치 스크린이 사용되는 예는 많다. 박물관이나 공항 같은 공공 장소에서 정보를 제공하는 단말기는 대부분 터치 스크린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레스토랑이나 대형 슈퍼마켓과 같은 곳에서 손님들의 주문을 처리하거나 재고를 관리하는 컴퓨터도 터치 스크린 방식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은행에서 설치하는 ‘현금 자동 지급기(ATM)'의 화면도 물론 터치 스크린을 사용하고 있다. (간편한 것을 떠나서 만약 ATM에 키보드와 마우스를 붙여 놓는다면 기상천외한 해커들의 공격을 당해 내기 어려울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터치 스크린 시스템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매우 편리하고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투표 시스템(voting system)'과 같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의미를 갖는 장치도 가능하게 만든다. 큼직한 화면에 나타난 후보들의 이름이나 기호를 손끝으로 건드리기만 하면 되므로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도 투표 과정에서 실수를 범할 가능성이 매우 낮아진다. (지난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드러난 투표 용지의 형편없는 디자인과 개표 과정에서의 정치적 대립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컴퓨터 투표 시스템은 민주주의의 정착에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투표 시스템이 실제로 활용되기까지는 넘어야 할 기술적인, 혹은 정치적인 산들이 많다.)
이러한 터치 스크린을 발명한 사람으로 알려진 미국 벨연구소(Bell Laboratory)의 웨슬리 타운센드(Wesley Twonsend)가 얼마 전인 9월 6일에 60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반평생인 30년을 미국 뉴저지주에 있는 벨연구소에서 연구와 실험으로 보낸 그의 죽음은 벨연구소의 사내 신문과 뉴저지의 지역 신문인 ‘스타-레저(Star-Ledger)'지에 짤막한 기사의 형식으로 실려서 관심 있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터치 스크린 기술의 뿌리**
터치 스크린의 기술적인 뿌리는 오크 리지 국가 연구소(Oak Ridge National Laboratory)의 샘 허스트(Sam Hurst)가 켄터키 대학(University of Kentucky)에서 2년 동안 강의를 하는 동안에 발명한 ‘엘로그래프(Elograph: electronic(전기)과 graphics(그래픽스)의 합성어)'로 알려져 있다. 허스트가 켄터키 대학에 도착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차트(chart) 정보였다고 한다. 혼자 힘으로 그 많은 정보를 정리할 수 없었던 그는 마치 한국의 ’교수님‘들처럼 대학원 학생 둘을 동원하여 두 달 여에 걸쳐서 자료를 정리했다.
한국의 ‘교수님’들이라면 눈도 깜빡 하지 않을 일이었겠지만 샘 허스트는 이와 같은 ‘단순 노동’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고민했다. 그리하여 그는 화면에 입력된 그래픽 정보를 전기적인 정보로 변환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장치를 발명했는데 그것이 바로 엘로그래프였다. 자신의 발명품이 지니고 있는 상품성에 주목한 그는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회사를 설립하여 70년대 초반 당시로서는 결코 적은 가격이 아닌 한 대 당 $8,000의 엘로그래프를 카펫 회사 등에 수 십대 팔았다. 지금 보기에는 투박하여 전자 제품이라기보다는 골동품에 가까운 모습을 한 엘로그래프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컴퓨터와 사람 사이의 인터페이스에 새로운 장을 열 준비를 마쳤다.
사람의 손끝이 일으키는 미세한 전기적인 신호를 감지해서 위치를 파악한 다음 인식된 위치에 따라서 컴퓨터 내부에 존재하는 소프트웨어를 동작시키는 터치 스크린 기술은 초기에는 많은 기술적인 장벽으로 인해서 쉽게 현실화되지 못했었다. 화면에 묻은 사소한 먼지나 주변 온도의 변화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여 쉽게 오동작(malfunction)을 일으키기 일쑤였고, 때로는 화면에 입력되는 사람의 손끝을 인식하지 못해서 묵묵부답이 되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터치 스크린 기술의 발전은 컴퓨터 공학이 이룬 업적이라기보다는 화학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가 서로 협동하여 이룩한 값진 성취였다.
***아담의 창조**
웨슬리 타운센드의 쓸쓸한 죽음에 대한 기사를 읽으면서 터치 스크린 기술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문득 로마 시스틴 성당의 천장에 그려져 있는 미켈란젤로의 그림 ‘아담의 창조’가 떠올랐다. 워낙 거장의 그림이다 보니 그저 관성적으로 잘 그린 작품인가 보다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손가락과 아담의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꿈틀거리면서 서로를 향하고 있는 모습은 지극히 부드러우면서도 가슴이 뛰는 긴장감이 느껴져서 (사진을 통해서 보았을 뿐이지만) 그 느낌이 간단하지가 않다. (그림 속에서 하나님은 손가락 끝을 통해서 자신이 창조한 아담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그렸던 당대의 사람들은 아담이 하나님의 콧김을 통해서 창조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콧김’을 ‘손가락’으로 대치함으로써 도전적인 상상력의 깊이를 보여주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위치를 부여하려는 독신(瀆神)의 의도는 없다. 하지만 컴퓨터와 인간의 관계를 생각하다 보면 그것이 어쩐지 아담과 하나님의 관계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렇다면 혹시 사람들은 컴퓨터 화면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창조물인 컴퓨터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아닐까. 마치 ‘아담의 창조’에서의 하나님처럼.
터치 스크린을 발명했던 타운센드는 세상을 떠났지만 컴퓨터와 인간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영적 능력이 진보할수록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 가려고 노력하듯이, 컴퓨터와 인간 사이에 놓여 있는 거리가 좁혀질수록 컴퓨터는 점점 인간의 모습을 닮아 가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컴퓨터가 장차 인간의 어떤 모습을 닮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온전히 사람의 할 탓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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