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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場을 文史哲서 詩書畵로 옮겨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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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場을 文史哲서 詩書畵로 옮겨야 하는 이유

신영복 고전강독<165> 제13강 강의를 마치며-19

6) 시문(詩文)과 정서(情緖)

우리는 한 학기동안 관계론을 화두(話頭)로 걸어놓고 고전을 읽었습니다. 그 강독과정에서 관계론에 대한 대체적인 이해도 전달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제 강의를 마치면서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다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과 함께 읽지 못하고 여러분에게 과제로 남겨두는 시(詩)와 산문(散文)에 대한 것입니다. 시정신과 산문정신이 별개의 것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크게는 정서(情緖)의 문제라고 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강의 중에 아마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고 기억됩니다만 한 사람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가슴(heart)이라고 하였습니다. 중심에 있다는 의미는 사상을 결정하는 부분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생각을 결정하는 것이 머리(head)가 아니라 가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조용히 반성하라고 해왔던 것이지요.

가슴을 강조하는 것은 가슴이 바로 관계론(關係論)의 장(場)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거대한 장(場)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가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성(理性)보다는 감성(感性)을, 논리(論理)보다는 관계(關係)를 우위에 두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가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이제 강독을 마치면서 새삼스럽게도 다시 가슴의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앞으로 시와 산문을 더 많이 읽으라는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시와 산문을 읽는 것은 바로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가슴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조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사철(文史哲)과 나란히 시서화(詩書畵)에 대한 교육을 병행하여 왔습니다. 이성훈련과 나란히 감성훈련을 중시하였다는 것이지요. 물론 오늘날의 시서화(詩書畵)가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그 정서적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그런 이유에서 지금까지의 고전강독에서는 반드시 시와 산문을 함께 읽어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강의에서는 함께 읽고 감상할 시간이 없습니다.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 부언해두려고 합니다.

첫째 사상은 '감성(感性)'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사상은 이성적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감성적 형식으로 인격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격은 기본적으로 감성입니다. 이성의 차원에서 논리화된 사상은 그 형식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육화된 사상이 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의 경우에도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은 법제적 정비수준에 의하여 판단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회성원들의 일상적 생활 속에서 매일매일 실현되는 삶의 형태로 판단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한 사회의 법과 제도는 문화로서의 실체성을 갖기 어려운 것이지요.

둘째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천과는 관계없이 단지 주장하였다고 하여 그것이 자기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말이나 글로써 주장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사상이 되지는 못하는 까닭은 자기의 사상이 아닌 것도 얼마든지 주장하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상은 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의 존재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된 것은 검증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 담론의 구조가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격으로서 육화(肉化)된 것이 아니면 사상이라고 명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책임이 따르는 실천의 형태가 사상의 현실적 존재형식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상은 지붕 위에서 날리는 종이비행기가 아니지요.

그러므로 사상의 최고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상은 이성(理性 Cool Head)의 형태가 아니라 감성(感性 Warm Heart)의 형태로 존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감성은 이성에 비하여 그것의 작동이 직접적이고 항상적(恒常的)입니다. 그리고 잠재의식층에 각인되어 있는 심층(深層)의 정서입니다.

감성은 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일차적이고 즉각적이고 그리고 가장 정직한 대응이며 그런 점에서 사고(思考)이전의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성형태로 갈무리되고 있는 사상은 판단 이전에 작용하는 본능적 대응과 관계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성적 대응은 사명감이나 정의감과 같은 이성적 대응과는 달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것이 감성적 대응입니다.

이러한 정서와 감성을 기르는 것은 인성(人性)을 고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면서 인성을 고양하는 최후의 방법입니다. 말 잘하고 똑똑한 사람보다는 마음씨가 바르고 고운 사람이 참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한다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사상(思想)의 장(場)을 문사철(文史哲)의 장으로부터 시서화(詩書畵)의 장으로 옮겨와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시서화(詩書畵)의 정신은 무엇보다 상상력(想像力)을 키우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의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며 그것이 바로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시서화로 대표되는 예술적 정서는 우리의 경직된 사고의 틀을 열어줍니다. 바로 우리들 자신을 조감(鳥瞰)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게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우리의 생각을 유연하게 해주는 것이며 우리의 사상을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경’편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이러한 예술적 정서는 우리의 생각을 열어줍니다. 하나의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게 해줍니다. 공간적으로 상하좌우의 여러 지점(地點)을 갖게 해줍니다. 그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춘하추동의 여러 시점(時點)을 갖게 해줍니다. 공간적 시점(視點)과 시간적 시점(時點)을 다양하게 해 줌으로서 우리의 생각을 열어줍니다.

우리가 무엇과 어떻게 관계되고 있는가를 깨닫게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인가?’를 깨닫게 합니다. 상투적이고 도식적인 사고로부터 총체적이고 동태적인 사고로 이끌어줍니다. 여러분은 ‘시경’편에서 시(詩)에 관하여 이야기한 것을 상기하기 바랍니다. 서(書)와 화(畵)에 대하여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없지 않습니다만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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