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중용(中庸)’ 독법
‘중용’ 역시 ‘예기’ 제31편으로 들어 있다가 따로 단행(單行)된 것입니다. 물론 주자가 장구(章句)한 것이지요.
장구란 ‘대학’ 독법에서도 이야기하였습니다만 장(chapter)과 구(paragraph)로 문장을 재분류하는 것입니다. 주자가 ‘대학’에 이어 ‘중용’을 주목한 까닭이 무엇인가를 먼저 밝혀야 합니다.
주자는 ‘대학’ ‘중용’의 장구뿐만 아니라 ‘논어’ ‘맹자’에 관한 이전의 모든 주(註)를 모으고, 재해석하는 소위 집주(集註)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사서집주’를 통하여 사회의 기틀을 새로이 만들려고 하였던 것이지요.
‘논어’와 ‘맹자’가 인(仁)과 의(義)를 기본 코드로 하는 사회학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읽었습니다. ‘대학’은 좀 전에 이야기한 바와 같이 세계와 나의 통일적 관점에 관한 이론입니다. 주자가 ‘중용’에 열중한 까닭도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음은 물론입니다.
‘중용’은 미리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당시의 사회적 과제를 완벽하게 반영하고 있는 텍스트입니다. 죽는 날까지 책상에 앉아서 ‘대학’을 장구하던 주자의 학문적 동기에 관해서는 이미 이야기하였습니다. 당시를 풍미하는 해체주의적 문화와 무정부적 상황을 개변하려는 노력입니다. 건축적 의지로 일관된 사회학적 동기이며 사명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伋)가 지어서 성조(聖祖)의 덕을 소명(昭明)한 것이라고 합니다.(孔潁達) 그리고 자사(子思)가 도(道)의 부전(不傳)을 우려하여 지었다고 합니다(주자의 주). 물론 이러한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언술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중용’을 장구한 이유가 바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중용’의 독법을 옳게 갖고 가기 위해서는 ‘중용’ 제1장을 읽기 전에 먼저 서두에 붙여놓은 ‘장구서(章句序)’부터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자는 이 서(序)에서 ‘중용’을 지은 목적이 무엇인가를 먼저 묻고 자답(自答)하기를 자사(子思)가 도학(道學)의 전통이 끊어질까봐 지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도학의 전통이 도통(道統)입니다.
이 경우 도학이란 주자가 체계를 세우려고 한 사회이론임은 물론입니다. 주자는 노불(老佛)에 대한 견제심리가 대단하였으며 그것이 역설적으로 도통론(道統論)으로 나타났으며 그것은 불교적 법통(法統)개념인 의발전수(衣鉢傳授)란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없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 서(序)에서 주자는 정자(程子)를 빌려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유가의 사회이론을 도통의 논리로써, 즉 학문적 전통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지요.
“정자가 말하기를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바뀌지 않는 것을 용(庸)이라 한다. 중은 천하의 바른 도요, 용은 천하의 정한 이치이다(子程子曰 不偏之謂中 不易之謂庸 中者天下之正道 庸者天下之定理). 이 편은 공문(孔門)에서 전수한 법이 오래되어 원래에서 어긋나게(差) 됨을 두려워하였다(此篇, 乃孔門傳授心法 子思恐其久而差也).”고 하였습니다.
천하에는 바른 도가 있다는 것을 선언하고 이 바른 도는 역사적 전통에 의하여 그 진리성이 검증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주자가 ‘장구서’에서 밝히고 있는 것이지요.
이 ‘장구서’에서 제일 눈에 뜨이는 것이 ‘실학’(實學)입니다. 공문(孔門)에서 전해지고 있는 것이 바로 실학이며 이 실학은 우주와 세상의 원리를 잘 아우르고 있으며 그 의미가 무궁하다는 것이지요(其味無窮 皆實學也). 이 실학이라는 선언이 바로 불교의 허학(虛學)에 대한 유학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것임은 물론입니다. 그리고 주자가 예기(禮記)의 이 부분을 주목하게 된 이유를 우리는 제1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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