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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에서 온 희망의 소식 - 글리벡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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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에서 온 희망의 소식 - 글리벡에 대하여

hari-hara의 '생물학 카페' <14> 신약 개발 이야기 (3)

스위스의 다국적 제약그룹인 로슈는 신종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 치료제 `퓨전(Fuzeon)'의 연간 판매가를 사상 최고액인 1만8천9백80유로(2만7천8백70 스위스프랑)로 책정했다고 현지 언론이 24일 보도했다. 로슈는 현재 시판되고 있는 에이즈바이러스(HIV)/에이즈 치료제 가격의 두배가 넘는 고가(高價)를 부과한 것은 1백단계 이상의 공정을 거쳐야 하는 제조과정의 복합성에 기인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로슈는 퓨전이 고가의 치료비 부담으로 인해 개도국에서는 사용하기 어렵다는 점을 시인함으로써 에이즈 치료제의 저가공급을 둘러싼 논쟁을 가열시키고 있다고 스위스국제방송은 전했다. 퓨전은 일반 에이즈 치료제와는 달리 에이즈바이러스가 건강한 인체의 면역세포에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며 기존 치료제에 내성이 있는 환자들을 위해 개발된 신약이다. `T-20'으로 불리는 퓨전의 개발비는 마케팅 비용을 제외하고 8억4천만 프랑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로슈측은 퓨전의 수익마진에 관해서는 언급을 회피했으나 연간 판매액이 최고 5억 프랑에서 10억 프랑에 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2003. 2. 24 연합뉴스


지난 주까지 전반적인 신약 사업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죠?

오늘은 좀더 세부적인 이야기로 글리벡과 이를 둘러싼 미묘한 대결에 대해서 풀어보기로 하죠.

글리벡이 처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건 2000년 말이었습니다. 그 시작은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이었죠. 인터넷을 통해 만성 골수성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환자들은 조기 시판을 호소하는 민원을 제기했고, 드디어 2001년 5월, FDA는 이례적으로 임상 2상만을 통과한 글리벡을 승인하여 판매를 허가했습니다. 이때 글리벡의 제조 회사인 노바티스는 월 최소 2천4백달러(약 3백만원)를 받고 전세계에 팔겠다고 주장했습니다. 물가수준이나 국민소득을 고려하지 않고 전세계의 약가를 모두 동일하게 책정하겠다는 방침에 따라, 노바티스는 한국내 글리벡의 약값을 1알당 2만5천원으로 공시했고, 이때부터 백혈병 환자들의 모임과 노바티스사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글리벡에 대한 대립을 좀더 살펴보기 전에, 글리벡이란 과연 어떤 약인지 살펴보기로 하죠.


1960년, 아직 분자생물학이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이전, 인간의 염색체가 46개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도 겨우 4년전이었으니, 아직 이 분야는 깨어나기 이전의 시대였죠. 이때 펜실베니아 의대 병리학 교실의 종양 생물학자 노엘(Peter C. Nowell)과 헝거포드(Hungerford) 박사는 막연하게나마 악성 종양과 유전자의 변이에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염색체 연구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던 그는 어느날 현미경 하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죠. 만성 백혈병 환자의 염색체 중 22번 염색체의 길이가 정상인의 것보다 조금 짧다는 것이었죠. 그는 이 변이를 자신이 살던 도시 이름을 붙여 필라델피아 염색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만성 백혈병 환자의 경우 91%가 이 필라델피아 염색체를 가지고 있을 정도여서 이 염색체와 백혈병과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심증이 굳혀졌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이 관계를 캐내는 것은 오래 걸려서 1973년에서야 이 필라델피아 염색체는 22번 염색체의 일부분과 9번 염색체의 일부분이 교차를 일으켜 자리바꿈을 하면서 형성된 결과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 결과, 9번 염색체에 있던 Abl(Abelsom oncogene)과 22번 염색체에 있는 Bcr(Breakpoint cluster region)이라는 유전자가 결합해 Bcr-abl이라는 형태가 되어서 이 유전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타이로신 인산화 효소가 백혈병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는 것이 알려진 건 1987년이었습니다.

이후 드러커 박사(글리벡을 만든 사람)가 시바가이기(Ciba-Geigy) 제약회사에서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한 것이 1993년이구요(노바티스는 1996년 산도스(Sandoz)와 시바가이기가 합병해서 이루어진 회사입니다). 이후, 2001년에야 글리벡이 FDA 승인을 받았으니 최초의 원인이 밝혀진 이후, 결정적인 치료제가 나오기까지 4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던 것이죠.


(사진> 필라델피아 염색체, 22번 염색체 한 쪽 끝이 짧아져 있습니다.

이렇듯 제가 필라델피아 염색체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글리벡은 바로 이 지점에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사진> 글리벡(STI571)의 작용기작. Bcr-abl에서 생성된 물질에 결합하여 이후의 신호 전달 체계를 방해해서 만성 골수성 백혈병을 일으키는 것을 막습니다.

위 그림에서 보듯이 글리벡은 필라델피아 염색체에서 생성된 이상 단백질에 작용해 그 단백질이 이후에 기능하지 못하도록 하여, 백혈병의 증상을 없앱니다. 글리벡의 임상 2상 실험 결과 만성기의 백혈병 환자 중 88%에게서 혈액학적 완전 관해(혈액 속에 비정상적인 백혈구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 병이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완치'대신 '완전 관해'라는 단어를 씀) 현상을 보일 정도로 효과가 뛰어났습니다.


글리벡은 그 자체로도 항암제 역사의 새로운 장을 쓸 정도로 대단한 발견입니다. 기존의 항암제는 사실 암세포와 일반 세포를 구별하는 능력이 약해서, 암세포도 죽이지만 다른 정상적인 세포도 한꺼번에 공격하기 때문에, 항암제 치료를 받는 환자들은 구토, 무기력감, 전신 피로, 머리카락과 손발톱의 탈락 등 많은 부작용을 겪어야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체력이 뒷받침되어주지 않으면 항암제 치료로차 받을 수 없는 경우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러나, 글리벡은 정확하게 암세포의 특정적인 부분만 공격해서 정상 세포는 다치지 않고 암세포만을 공격하여 무력화시킵니다. 따라서, 이에 따르는 부작용을 급격히 줄였을 뿐 아니라, 치료 효과도 월등하게 뛰어나서 사람들이 초기에는 기적의 항암제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환자들의 기대도 잠시 지나치게 높게 책정된 약값과 완전치료제가 아니어서 약을 계속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들의 어깨를 짓눌렀습니다.

최초에 노바티스가 요구한 것은 1알당 2만5천원이었습니다. 오랜 줄다리기 끝에 10%를 무상지원한다는 조건 하에 2만3천45원에 책정된 글리벡의 가격은 그래도 너무 높습니다. 또한 환자들을 더욱 절망하게 하는 건 글리벡은 완전 치료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 글리벡의 작용지점은 이미 필라델피아 염색체가 형성된 이후라서, 필라델피아 염색체 자체를 없애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백혈병의 완전 치료는 이론적으로는 골수 이식밖에는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글리벡은 한 두번, 또는 한 두달 먹어서 백혈병을 완치시킬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약값이 지금보다 더 비싸더라도 참고 사먹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골수 이식을 하거나 기타 다른 방법으로 백혈병이 완치될 때까지 글리벡은 매일매일 비타민을 먹듯 꾸준히 먹어야 하는 약입니다. 단발이 아닌 일상이 될 때, 2만3천45원이라는 약값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지나친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인도의 제약회사 나코(Natco)의 비낫(Veenat)입니다. 비낫은 글리벡과 동일 효과를 가지면서도 가격은 2-3달러 수준으로 글리벡의 1/10에도 못미치는 값싼 가격이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인도는 2016년까지 지적재산권협정(TRIPS, Intellectual Property Rights, 특허, 의장, 문학, 예술 등 지적인 재산에 대한 독점적인 권리를 인정해 주는 것)의 이행의무에서 벗어나 있는데다가 인도 내에서는 제법 특허만 있을 뿐 물질 특허가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물질 특허가 없다는 것은 같은 물질이라도 다른 경로를 통해서 만들어 낸다면 둘 사이에는 특허 침해가 없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낫은 글리벡과 성분은 거의 유사하나 다른 경로를 통해 만들어졌기에 물질 특허가 없는 인도 내에서는 아무 문제없이 생산, 판매가 가능한 것이죠(지금까지 인도의 제약 회사들은 이런 방식을 통해, 지나치게 비싼 선진국의 신약들을 값싸게 생산해온 주된 공급선이었습니다). 이리하여 글리벡 공대위(glivec.jinbo.net)에서는 글리벡 약가 인하의 강제 실시 내지는 비낫의 수입 허가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특허의 보장과 생명의 권리. 이 문제는 지적재산권 협정에 제약 특허가 들어가면서부터 끊임없이 제기된 문제였습니다. 지적재산권협정은 특허라는 이름으로 신약의 독점기간을 20년으로 보장해주고 있기 때문에 시장 독점성이 보장되는 상황에서 약값은 가장 높은 가격으로 결정됩니다. 이때 기준이 되는 것은 북미, 유럽, 일본 등의 선진국시장으로 이들이 전체 제약시장의 82%를 점유하기 때문에 이들에게만 비싸게 팔아도 충분한 이윤을 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 최고의 가격은 환자가 약을 먹을 수 있는 가격이 아니라 제약회사의 이익을 최대로 할 수 있는 가격이기에 문제가 됩니다(예를 들어, 대표적인 불치병으로 불리는 에이즈는 현재 여러가지 약제를 섞어 사용하는 칵테일 요법으로 환자의 생명을 10년 이상 연장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칵테일 요법에 사용되는 돈은 년간 1만달러 정도인데, 대부분의 에이즈 환자들이 밀집해있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의 평균 1인당 GNP는 1천5천달러를 밑돕니다. 그들에게 있어 에이즈 치료제는 정말 꿈속의 약이나 다름없답니다).


사실 노바티스가 환자들에게 10%의 무상 지원을 제시하면서도 약값을 내리지 않는 이유는 한국시장에서 어떠한 이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한국 시장은, 특히나 만성 골수성 백혈병 시장은 매우 작습니다. 만성 골수성 백혈병은 10만명당 1명씩 발병하는 희귀질병으로 우리나라의 환자 수는 5백여명입니다. 전세계를 상대로 장사를 하는 노바티스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무시해도 좋은 작은 시장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입장이 강경한 것은 전세계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속셈으로 전세계 약가통일, 의약품 특허권의 강화라는 다국적제약자본의 이윤 창출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에 의거하면 미 상공회의소와 유럽연합상공회의소가 '한국의 복지부가 선진 7개국의 평균가에 근거한 약값결정기준을 완전히 무시하고 혁신의약품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고 있다'며 노바티스를 방어하고 나서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노바티스가 스위스와 미국의 약가를 근거로 한국의 글리벡 약가를 제시했듯이 같은 방법으로 40개국이 넘는 곳에서 글리벡 가격은 2만5천 원 안팎에서 결정되었습니다. 한국의 약값이 2만5천 원에서 대폭 하락할 경우에 전세계 곳곳에서 항의가 빗발칠 것이고, 비싸게 책정된 곳에서는 약값이 더 싼 나라를 찾아 수입을 추진할 것이기 때문에 엄청난 이윤이 걸려 있어 아무리 환자들이 목숨을 걸고 눈물겨운 투쟁을 시도하더라도 노바티스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을 태세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글리벡이 어떤 경로로 작용하는지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한 대략적인 고찰이었는데요, 다음주에 한 번 더, 이 문제를 다루겠습니다. 신약 개발은 현재 많은 사람들을 질병에서 해방되게 해주겠다는 이상적인 목표보다는 제약회사의 이윤을 최대로 창출해낼 수 있는 질병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음 주에는 그 문제와 함께 노바티스에 대해서 좀더 얘기해보기로 하지요.

- hari-hara(harihara@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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