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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서 본 최태영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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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서 본 최태영 선생

민족과 함께 책과 더불어 103년, 최태영 <4ㆍ끝>

내가 선생을 알게 된 것은 1999년 초 박창암 장군을(박창암 장군에 대해서는 프레시안 연재 '김지하 회고록 146회 참조: 편집자) 따라 세뱃길에 동행하면서부터였다. 최태영 박사는 박 장군이 장도빈 선생과 더불어 존경해 마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때 노(老) 지식인의 맑은 기상과 서가의 오래된 책들, 그리고 두분이 주고 받는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아 나는 '기사로 써야할 것 같다'는 직감으로 주섬주섬 기록했었다.

<사진 1> 최태영 선생은 근영

본격적인 협업이 시작된 것은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 존 코벨의 책을 본 선생이 편역자인 내게 '코벨의 책을 만들 수 있었으면 (코벨과 사관이 많이 같은) 나의 역사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했기 때문이다. 선생이 발표한 역사서를 재편집하고 새로운 연구를 덧붙이면서 이후 4년에 걸쳐 선생을 도와 두 책의 원고를 정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정리자가 보아야 할 자료와 책 등을 집밖으로 최박사가 싸들고 나와 전했다. 내가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하면 이 노장학자는 눈도 깜짝 않고 "정 못하겠다면 할 수 없지. 그럼 나 혼자서라두 해야지" 하고 조용히 오래된 자료들을 만지작거리는 것이었다. 선생의 신당동 거처에서 강의와 여러 이야기들을 들은 대로 기록하고 분류하고 자료를 찾았다. 구월산이나 이병도 선생과의 일 등은 그의 역사 연구에 접하는 열쇠였다. 선생이 후지 미야시다(富士宮下) 문서를 보게 된 전후의 상황을 직접 들어 알지 못했던들 학술원 통신지에 간단히 기록된 답사기를 읽는 것만으론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작업이 정교해지며 칼럼형식의 글이 만들어졌다.

선생으로부터 보고 들은 일들은 역사연구에만 한정되진 않았다. 지난 1백년 동안의 사회사가 눈앞에 펼쳐지고 근대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 - 김구, 정인보, 최남선, 장지영, 김성수 등과 교분에 얽힌 일화를 들었다. 일제와 좌우익 혼란기, 해방 후의 학계에서 지식인으로 처신해온 면모가 주목되고 역사를 보는 안목 같은 것은 지성의 본질을 생각케 하였다.

심각한 내용만 전해들은 것도 아니었다. 우스운 일도 많고 유머가 있었다. 동경 유학시절 음악도 윤심덕과 나눈 이야기, 장련의 시라소니, 구월산 팔구손이, 대궐말을 쓰며 조선어 논문을 검열하던 일본인 통역, 친일을 어떻게 피하고 공산주의를 어떻게 파악했는지 등을 알게 되면서 그의 인생과 학문세계에 빠져들게 되었다.

장련의 눈 덮인 산 넘어 '동몽선습' 책을 들고 걷던 11세 소년의 모습이 그림같이 떠오른다. 이 책은 바로 단군 연구의 시발이 된 것이기도 했다. 그의 역사관은 '단군이 요동에 고조선을 개국한 조상'이라는, 조선사람 수천년 간의 교육 내용이자 일제가 한국사를 왜곡하기 전 세대의 사관에서 출발했다.

"단군의 자손이란 우리가 혈연상 단군의 피를 받았다는게 아니고 단군이 개국한 나라 백성의 자손이란 것이다. 어떤 역사학자는 '단군 할아버지라니 우리가 어떻게 단군의 (피를 받은) 자손이냐고, 따라서 단군은 없다'고 하니 우습다. 단군이 있었다는 것으로 우리는 일찍 각성했다는 긍지를 갖게 된다."고 선생은 말했다.

***친일, 친공, 친미, 종교, 금전이나 어떤 권력에도 휘거나 편중되지 않아**

두 권의 책을 만드는 동안 선생과의 협업이 귀중하게 생각된 것은 학자로서의 강한 신념에 힘이 느껴지면서도 한없이 부드럽게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껏 선생의 일상은 "책을 읽으면 거기서 발전할 게 하나둘 나와요. 아주 좋아."라고 표현되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순수한 학문의 길이다. 책을 읽으면서 늘 요점을 메모해 놓았고 그렇게 해서 그 많은 책의 어느 부분에 무엇이 있는지를 정확히 제시하였다.

<사진 2> <인간 단군을 찾아서> 프레시안

<사진 3>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 프레시안

"오늘도 책 하나 읽다 보니 부여, 고구려 초기에도 단군으로 왕의 칭호를 삼았음을 알 수 있어. 최남선이 개아지(해의 아들의 뜻) 조선이라 한 것은 고조선 단군에서 부여 단군, 고구려 단군으로 이어져 갔다고 바꿔 설명하는게 좋겠소. 신라는 차차웅, 거서간, 마립간이라 했는데 다 뜻은 같아. 그런데 백제는 임금을 어라하(於羅瑕)라 불렀다는 거야. 이능화 책을 보면 그렇게 설명하는 것 알게 돼.

그런데 최동(崔棟; 전 세브란스병원장. 의학박사, 문학박사. 『조선상고민족사』라는 국·영문 저작을 남겼다)이 아주 재밌어. 그 사람이 책 이것저것 많이도 봤어. 그렇지만 환인을 설명하면서 엉뚱하게 기독교적 해석을 빗댔는데 어라하는 또 어떻게 쑤셔냈는지 재미있단 말야. 혼자 싫컨 웃었어. 그 의사양반도 나처럼 무당 굿하는 책 많이 본 것 같아. 어라하는 무당들이 굿할 때 부르는 노래나 경기민요의 '어라 만슈(萬壽)'라는 대목과 통해요. 어라 만수는 임금 만세라는 뜻이 확실한 거거든.

라이샤워가 쓴 일본사의 한일 고대사부분은 헛소리이고, 신채호의 역사서는 역사는 볼 것이 많은데 전통사상이나 법이념엔 언급이 없어요."

젊어서는 책을 무지하게 빨리 읽었다. 지금은 돋보기에 확대경을 대고 눈을 까박까박 애써 가면서 하는 독서이다. 거의 전투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하루도 책 없이는 견디지 못한다. 만 103세를 바라보는 오늘에도 선생의 기억력은 선명하고 판단력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확인할 내용이 생기면 몇 시간이 걸리든 찾아서 제시하고 아무리 어려운 내용이라도 쉽게 풀어 설명하는 총기가 살아있었기에 만년의 두 역사연구서 정리가 가능했다.

***"세계화를 한다는 것이 바로 자기 역사를 포기한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컴퓨터를 직접 쓸 수 있었다면 그의 연구활동은 배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년 전부터 세 개의 인터넷 사이트에 그의 본의와는 다른 역사 이야기가 그의 이름을 내세워 나돌고 있음을 뒤늦게 알고는 만류하고 주변사람들에게 이에 현혹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선생의 연구는 이제까지는 오직 책으로 발간된 것뿐임을 선생의 청으로 이에 명확히 밝혀 둔다.

선생은 젊은 시절 「화엄경」에 나오는 '부동지(不動地)'란 말을 좋아했다. 부처로 성불하기 전의 수행단계로 어떤 일을 자기 판단에 맞게 하면 큰 과오없이 옳은 방향으로 처리되는 경지를 말하는데, 그 경지에 들어갔다고 생각하기보다 거기까지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그가 사회사와 법학, 역사를 보는 눈은 송곳처럼 날카롭고 두려움이 없으며 친일, 친공, 친미, 종교, 금전이나 어떤 권력에도 휘거나 편중되지 않았다.

오랜 친구인 영문학자 김주현 박사는 선생을 두고 '참으로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의 학문은 '역사를 훑어 찾아낸, 순수한 코리아놀로지(한국학)의 정립을 위한 연구'라고 황윤주(黃胤周) 전 상명대 대학원장은 말했다. 선생을 이 시대 지성의 한 표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사람 같다'고도 표현했다.

<사진 4>

"내가 하는 역사는 국수주의를 하자는 게 아니에요. 내 주장은 밝힐 건 밝히고 옛 역사는 그것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덮어놓고 중국한테 매어 살았다거나 일본한테 쩔쩔맸다는 식의 밑지는 생각을 가지면 용기도 자신감도 없어져 앞으로도 잘되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다. 요임금, 순임금이 우리 족속이고 우리는 일찍이 요동에서 활동하던 조상과 고조선이라는 근원을 가졌다. 중국과 맞서 겨뤄 이겼으며 우리 족속이 일본에 건너가 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을 알아야지요. 사대주의 때문에 망쳐 놓은 게 많아요. 세계화를 한다는 것이 바로 자기 역사를 포기한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역사를 한다는 것은 사상의 유행을 따라 아는 지식을 내보이는 것은 아니외다"고 선생은 말했다.

<인간 단군을 찾아서> 이후 2년여에 걸쳐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 원고가 정리됐다. 선생은 "순하게 됐다"고 했다. 그동안 최박사의 책을 국내외 도서관 등에 보내주곤 하던 김영경(金榮經) UTI 사장 등 많은 분들이 고령인 선생의 안위를 염려하며 책 쓰는 일이 무사히 끝나기를 기원했다. 최박사가 건강하게 이 책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고마운 일이다.

선생이 집필해 놓은 '조선시대 법철학 연구', '중국 법철학 연구', '고대 가무사', '장보고' 등의 원고가 출판되지 않은 채 파묻혀 있다. 선생의 인생에서 중요한 동반자였던 장서들은 역사 연구가 끝나면 서울대 법대 도서관에 일부 기증될 것으로 보인다.

***요즘 최태영 선생은...**

최태영 선생은 현재 노인들을 위한 시설의 신당동 거처에서 24시간 간병인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언제든 의료 보살핌을 받을 수 있고 방문객을 맞기에 편해 선생 스스로 아들 딸 곁을 떠나 수년전 옮겨온 곳이다. 이 건물 내에는 선생같은 분들이 많다.

지난 가을 책을 낼 때까지만 해도 운동실에 가서 왱왱거리는 벨트를 5분간 등에 걸고 있거나 움직이는 발판 위에 서 있다 오는 '기계체조'를 했다. 최근에는 방문 앞의 복도를 왔다 갔다 하는 '걸음마'가 외출의 전부이고 기력도 많이 떨어졌다. 그러나 정신은 맑다.

제자들이 들러서 선생을 붙들고 창 밖을 보며 걸음마산책을 같이 한다. 그럴때면 중요한 문답도 나오고 1백미터 밖에 안되는 복도에 '머나먼 길, 꽝(하고 넘어질라)!'하는 한탄도 나온다. 가장 최근에는 선생에게 와서 세배하겠다고 떼쓰고 역사이야기를 묻던 고등학교 1학년생 소년 친구가 생겼다. 오래 전의 법조계 이야기를 들으려는 젊은 법조인, 역사왜곡에 대해 묻는 관리 등도 왔다. 어렵사리 만족할 만한 대담이 이루어진다. 민관식 전 장관은 가족보다 자주 오는 손님이다.

방에는 자주 보는 책들만 수백책 갖다놓았다. 학문하는 분들이 서로 별말없이 저서와 편지를 주고 받는 일들이 보이곤 한다. 최근에는 일본서 미야시다문서를 같이 가본 분이 저작을 보내주어 읽었다. 아직도 새 책이 오면 그 자리에서 읽어내고 밤중에 깨어 책을 찾아 읽지만 잔 글자를 보는 일이 점점 힘들다고 호소한다.

사탕과 초콜릿을 잘 드셔서 방문객들이 온갖 초콜릿을 갖다 드리는데 밤중에 서랍에서 꺼내다가 주변에 잔뜩 흘려놓기 일쑤다. 매일 새벽 새 날의 시작으로 떼어낸 일력 종이를 오려 백지를 만든다.

선생은 보통사람이라면 못 참고 홧병 날 만한 사안에도 전혀 흥분하는 일이 없다. 절대로 성급한 결정을 내리거나 교묘한 술수에 속아넘어가는 법도 없고 우울하지도 않다. 그러면서 어느 한 면 어린애같은 선생을 보면 초인의 어떤 상이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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