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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ㆍ환인ㆍ환국 - 민족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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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ㆍ환인ㆍ환국 - 민족사를 찾아서

민족과 함께 책과 더불어 103년, 최태영 <3>

***해방과 미 군정**

일인들이 쫓겨가 이젠 일을 한국인 뜻대로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둔한 미 군정은 한국인을 전혀 신임하지도 알지도 못했다. 패전 일인들한테서 학교를 접수하는 자리에 한국인 아닌 미국이 내세운 일인들이 와서 접수하는 것을 보고 그는 절망했다.

<사진 1>

"나는 미 군정때 미국의 본심을 금방 알았어. 미국이 나선 것은 한국을 믿고 위해서라기보다 저희들한테 꼼짝못하도록 우릴 묶어 두려는 야심이 만만한거야. 그건 일찍이 루즈벨트 대통령의 가쯔라 밀약때부터 알 수 있는 것이요. 우리는 미국이 반대해서 핵도 못 갖게 됐지. 그러니 북에 쩔쩔매게 됐잖아. 미국은 판단을 잘못했어요. 우릴 보다 신임했어야 해요. 일본은 그새 우리 덕에 저렇게 부흥했는데"

***이승만과 헌법제정**

그는 건국 후 정권에도 부닐지 않았다. 학자로서의 길만을 고집했고,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았다. '헌법을 내가 작성했다면 이승만과 싸웠을 것이고 그럼 죽었을 것‘ 이라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끝까지 휘하에 끌어들이고 싶어했으나 그는 끝까지 자유인으로 남아 대법관도 장관, 주일대사도 마다했다. 이런 그를 무서워하고 싫어해 어떻게든 제거하려던 친일파들의 중상이 없지 않았다.

책만 보겠다는 게 목표였지만 대학교육 경험이 가장 많은 그에게 여러 군데의 대학을 건설하는 일과 공산주의와의 대결이 기다렸다. 좌우익 혼란기 그에게 닥쳤던 위기는 테러와 맞서야 하는 것이었다.

해방 직후 부산대 인문대학장으로 벡커 총장과 함께 부산대를 건설했다. 경신학교 대학부에서 가르치던 벡커 총장이 '최태영이 같이 가주어야겠다' 하고 유억겸 문교장관이 권유하여 된 일이었다. 여기서 6개월째 동맹휴학 중이던 좌파 학생들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토론을 벌였다. 학생들은 밤마다 공산당 선배한테 가 ‘학습’하고 와서 그와의 토론에 나서곤 했다. 긴 설전 끝에 학생들이 ‘졌다’고 하면 강의실로 들어가 공부하게 하여 동맹휴학을 풀었다.

스탈린 혁명 초기부터의 공산주의를 알고 유물론의 본질적 허점까지 파악했던 학자로서 가능했던 일이고,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대토론이었다. 공산당양성소가 들어 있던 국유건물을 무력으로 되찾아 인문과학대학 건물로 마련했다. 일본인 교수들이 모두 쫓겨난 뒤 강의할 사람이 없던 수산대 학생들에게 강의를 받을 수 있도록 조처했다. 그때 건물을 뺏기고 동맹휴학도 깨진 공산당들이 최학장을 죽이려 들었으나 미리 알고 피해 테러를 면했다. 그가 묵고 있던 부산호텔 옆방에서 공산당들이 하는 모의를 들었던 것이다. 그는 그날로 서울집으로 왔지만 부산진 경찰서장이 이들에게 피살됐다. 부산대 건설은 목숨을 걸었던 일이었다.

***"서울대보다는 성균관대가 국립이 됐어야"**

이어서 서울대를 건설하는 중차대한 일에 참여했다. 이춘호 총장이 최태영과 서광설 변호사에게 서울대 평의원(이사 같은 것)을 맡기고 건설부문 총책을 위임했다. 이에 청량리에 있던 법학연구소와 사간동 의과대 부속건물을 모두 서울대 건물로 하여 청량리 건물을 팔아서 새 건물을 세울 것과 사간동 건물을 서울대 제2병원으로 할 것을 예정해 놓았다. 그러나 당시 문교장관이 청량리 건물은 안기부로, 사간동 건물은 육군에 내주어 현재의 기무사, 육군병원이 들어섬으로써 계획이 모두 틀어져 곤란한 지경이 되었다. 당시 음악대학은 남산 일본 신사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법대는 학장실도 강의실도 없었다. 결국 공과대학을 태능으로 내보내고 음대, 미대, 법대를 동숭동 캠퍼스에 모아 놓았다.

그러나 서울대는 식민지 조선인을 차별하던 경성제대를 거부하는 오기도 없이, 어떤 못난이들은 이를 자랑으로까지 받들며 국립대학으로 경성제대를 이어받았다. 사실은 전통이 긴 성균관이 국립으로 됐어야 옳고, 서울대는 건국의 기풍에 맞는 새로운 학문풍토를 진작했어야 됐을 것이라고 그는 비판했다.

서울법대 교수겸 학장 재직 중에도 좌파의 테러가 심각했으나 장택상 경찰청장이 서울대에 파견한 형사들의 도움으로 살아 남았다. 그를 죽이려 한 3인조 테러단은 돈암동에서 애매한 사람을 죽이며 테러연습을 하고 있다가 붙잡혔다.

공산당으로부터의 위협은 끈질긴 것이었다. 6.25 때 납북 대상자가 되어 동대문 내무서에 잡혀갔을 때 생각을 바꿔 '석방자 줄에 가서 재주껏 나가시오'라는 말로 그를 놓아 주었던 빨갱이 청년은 정권이 바뀌어 좌파들을 처형할 때 이번에는 그가 구해내는 것으로 보답을 받았다.

그는 이때 역사학자 정인보가 납북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 "정인보만 살았어도 역사가 지금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란 것이다. 그와 정인보는 서로 잘 알아 김성수의 계동집 사랑에서 온갖 토론을 벌이곤 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보통 다방에서 많이 만났지만 부자들은 집의 사랑에서 교분을 나눴다. 이때 사랑채의 손님접대는 화장실 대신 요강 50개를 내오는 백상규 보전교수 같은 집도 있었다.

***김구**

임정 주석이던 김구의 여러 면모도 최태영의 회고로 드러난다. 군정때 하지 중장의 고문이던 언더우드(원한경)가 김구를 만나고 싶어했다. 두 사람을 잘 아는 최태영이 그의 집에서 이들을 만나게 했는데 김구는 미국 측의 지원을 얻어낼 수 있는 이 기회를 잘 활용하지 못했다. 이승만과 김구가 충돌하니 사람들은 두 정치인과 가까운 허정과 최태영에게 ‘당신네 들이 각각 말을 잘해서 두 사람이 잘되게 하라’하여 허정·최태영은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우정을 맺었다. 그러나 두 정치인은 끝내 화합이 안됐다.

김구에게 임정요인이라고 같이 귀국한 인물 중 ‘유능치 못한 인물들을 많은 돈을 위자료로 줄테니 떼어내라’고 당시 미두(米豆)재벌이던 강익하가 제안했지만 김구는 ‘같이 호떡먹고 고생하던 동지라 안되겠다’고 했다. 최태영은 이를 김구의 또다른 실패라고 보았다.

그래도 장련의 어린 시절부터 김구선생과 가까웠던 최태영에게서 듣는 김구의 소박한 일화가 많다. 안명근사건으로 감옥에 갔다 나온 김구는 잔치를 벌였는데 기생들도 와서 뚱땅거리고 놀았다. 그런데 김구 선생의 어머니가 이를 알고 ‘너 감옥 있는 동안 네 처가 뒷바라지 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네가 기생을 불러 노느냐’하고 종아리를 때렸다. 김구는 그 매를 고스란히 맞았다. 김구선생은 떡보이기도 해서 그를 대접할 때는 떡을 해드렸다.

***단군, 환인, 환국**

역사에 대한 그의 역할은 해방후 본격화되었다. 건국 이후 고시령에 국사가 들어간 것은 그의 국사관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 가르쳐진 국사라는 것을 뒤늦게 알고 크게 놀랐다. 정인보의 ‘조선사연구’부터 다시 읽으며 역사연구에 들어갔다. 해박한 한문과 일어를 통한 방대한 독서가 그의 연구를 다각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부인 김겸량여사는 1975년 작고했다. "충격이었지만 나는 계속 학문에 정진했다. 그럭저럭 내 나이 백살이 되었다"고 선생은 회고했다.

<사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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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나는 이 분이 역사 연구에 이것저것 깊이 들여다보고 학문적 직감이 길을 찾아 동하는 것을 주목했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석유환국이 진본이고 석유환인은 날조된 것이다’ 는 말을 듣고 교보문고에 나와있는 10여종의 삼국유사를 보았다. 환국으로 분명하게 기재된 3,4종의 책 말고는 다 환인으로 되어 있었다.

어떤 학자의 책은 1판에 환국이라고 했다가 2판에 가서 다른 역자가 ‘불교용어가 틀려서 바로잡는다’는 머리말과 함께 환인으로 돌아가 있었다. 어떤 삼국유사는 한글번역은 환인인데 사진판으로 소개된 원본에는 환국이었다. 판본을 밝히지도 않았다. 서울대에는 석유환국이라고 적힌 진본 삼국유사가 소장돼 있는데도, 많은 학자들의 논문이 실린 단군책은 아무 의문도 제기함 없이 환인이라고 기정사실화하여 연구를 개진하고 있었다. 북한 학자들의 것도 교보문고에서 본 책에는 다 환인으로 표기돼 있었다.

환국이라고 표기된 책자는 민족문화추진회가 영인 발행한 서울대본 삼국유사와 최남선 본의 삼국유사, 삼국유사 교감연구, 그리고 동경대 발행본임을 밝히지도 않고 갖다 쓴 어떤 책 정도를 보았다. 학계의 삼국유사 연구가 어떤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병도선생이 1956년에 국역한 삼국유사는 석유환인으로 되어있는데 1973년 그가 ‘최선을 다한 교감이다’ 라고 감수한 민족문화추진회 발행 삼국유사는 서울대 소장본을 저본으로 한 것으로 석유환국으로 되어있다. 이병도도 환인 아닌 환국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최태영 선생은 ‘이병도가 환국을 인정하게 된 것은 거저 된 일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환인과 환국의 차이에 대한 이병도 선생의 설명이 없어 못내 궁금하다. 그리고 대세에 휩쓸림 없이 석유환국으로 기재된 판본 구하기에 열올리고 환국이 환인으로 변조된 것을 1979년 자신의 법학논문에서 설명한 최태영 선생의 학문적 자세를 신뢰할 수 밖에 없었다. 시라소니 얘기보다 더 사실적이었다.

그러한 일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학자로만 지내오면서 시대를 통찰하는 역사학자의 자질 같은 것을 생각게 하였다. 그의 이런 연구는 고조선 및 한일 고대사 연구의 중요한 진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선생은 조선사편수회의 위원회에서 ‘환인이란 환국이 변조된 것’임을 폭로한 최남선을 상기시키며 ‘동경대 발행 삼국유사를 최남선이두 그때 볼 수 없었나봐. 그에게 보여주고 싶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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