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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ㆍ일본어상용도 거부

민족과 함께 책과 더불어 103년, 최태영 <2>

***상경**

13세때 서울에 와 영어시험을 치르고 경신학교에 입학했다. 언더우드가 세운 이 학교는 시설이 서울의 여느 학교보다 좋아서 학생 1인당 현미경이 한 대씩 있었고 계단식 교실에 수세식 화장실이었다. 장지영 선생에게서 국사를 배웠다. 장 선생은 '기자조선은 사대주의의 영향으로 끌어다 접목한 허구요, 고려사는 조선왕조에서 왜곡한 거짓이 많다'고 누누이 말했다. 또 유득공의 발해고를 통해 '신라가 삼국을 완전히 통일한 것이 아니라 남조(南朝)인 통일신라와 북조(北朝)인 발해국이 병립하여 있었는데 고려가 그 역사를 정리하지 못한 것은 큰 잘못'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수학과 물리에 뛰어나 김형배선생(후일 서울대 수학과 교수)의 사랑을 받았다. 체육광이었고 소년신사의 명예인 체육부장을 했다. 정답고 경우에 밝지만 비적극적인 서울아이들은 그와 씨름을 하게 되면 지레 겁을 먹고 '곱게 메쳐라'했다. '오냐' 하고 메쳤다.

음악에도 뛰어나 피리연주를 듣고 악보로 옮기고 성악과 바이올린을 했다. 그러나 곧 싫증이 나서 그만두었다. 오래 전부터 음악을 듣지도 않지만 그의 인생에 관련된 중요한 일의 설명에는 반드시 음악이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이 태어나던 해 군악대가 설치됐고 광진학교 폐쇄때 노래가사를 담장 안에 감춘 음악설명이 그러하다. 그가 결혼하여 새색시가 된 김겸량과 함께 집으로 오던 날 동구밖에서 이들을 맞아들이며 국악패가 연주한 곡목은 후일 그가 학술원에서 저술상을 받을 때 들은 경축음악과 같은 것이었음을 회상하였다. 향가연구에서 그가 기억하는 것들이나 '한국의 고대 가무사' 논문을 만들어 놓은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보인다.

***도일**

경신학교를 졸업한 뒤 동경에 유학하기로 했다. 미국유학을 하고 온 사람들은 취직도 어렵고 별 활동을 못했다. 부친은 태영에게 영미법학을 배워오라고 명했다. 1918년 메이지(明治)대 법학부 예과에 입학했다. 이때 한문학의 사사가와(笹川臨風) 박사를 알게 되었다. 쇼와(昭和)황태자의 스승으로 일본 대궐 안에서 얼마든지 책을 읽었던 사사가와는 그에게 일본 고대사서인 上記에 대한 암시를 주기도 했던 사람이다.

<사진 1>

철학과 영어, 법학을 좋은 스승들로부터 배웠다. 철학은 근대일본의 제2세대 학자인 다카시에게 배웠는데 '철학은 과학의 과학이다'라고 쓴 답안을 보면서 최태영에게 '넌 더 쓸 것 없다'고 했다. 상법 중에 뉴욕의 유가증권법을 배웠다. 후일 보성전문에 와서 학생들에게 시의 적절하게 가르치고 세계통일법이 나왔을 때 이를 해설했다.

동경제대 미노베 법학교수는 그때 '일본의 천황은 신이 아니라 국가기관이다'라고 해서 학교에서 쫓겨났지만 같은 주장을 편 메이지대학의 법학자 소에지마 교수는 가르친 데가 사립대학이었던 만큼 안 쫓겨나고 무사했다.

국제법논문으로 국제연맹에 대해 '이들은 싸움이나 하고 별 활동하지 못할 것'이라고 썼는데 '국제연맹이면 모든 일이 다된다'고 하늘같이 믿던 국제법의 이즈미는 성을 내고 80점을 주었다. 선생은 '다카시라면 내 논문을 알아보고 좋은 점수를 주었을 것'이라고 했다. 기히라, 하세가와처럼 한국사를 폄하하고 반한감정을 고취하던 선생들도 있었다. 이들과는 한마디도 말을 나누지 않았다. 심리학과 독일어를 가르치던 하야미즈(速水)는 1924년 서울에 경성제대가 설립되자 총장으로, 국제법의 제국주의자 이즈미는 법학부장이 되어 왔다.

조선에 그때까지 대학이 없었다. 당시 동경에는 1천명의 조선학생이 유학해 있었는데 불과 10명 남짓이 경쟁이 치열한 입학시험을 거쳐 예과 본과 과정에서 공부했다. 대부분은 입학이 어려울 것 없던 전문부 학생들이었다. 동경제대 교토제대 등에는 도지사의 추천을 얻어 특권층의 자제들이 거저 들어가기도 했다.

***춘원 이광수의 애정행각**

장련에서는 10여명의 학생이 이 때 동경유학을 했다. 그중 손두환이 있었다. 대단히 잘생기고 뛰어난 인물이었다. 장련에서 언풍(言風)놀이할때 '오리'를 주제어로 내면 '십리 절반 제 이름' 하고 나왔다. 언제나 그의 글이 제일 좋았다. 일제의 고등문관고시에 패스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는 않았다. 모든 사람을 코 아래로 보고 찬송가는 전부 처녀 총각 연애하는 것으로 바꿔 부르든지 '며칠후 둘러메칠후...' 하는 식이고 사방으로 외도질이었다.

<사진 2>

그 당시 소설 쓰는 이광수의 빈번한 연애행각이 화제였다. 최태영은 그것을 잡스럽게 여겼다. 그가 또 한 여성을 짝사랑하고 호소하는 'P에게' 라는 글을 썼는데 끝에 가서 'P는 남자다'라고 덧붙였다. 최태영과 손두환은 '여성인 줄 뻔히 아는걸 끝에 가서 남자라고 뒤집으니 세상을 놀리는 더러운 남색이야기냐. 연애에 그처럼 모랄이 없느냐'고 공박하는 글을 썼다. P는 이광수같은 사람을 쳐다도 보지 않는 똑똑한 여성이었다. 이우창(고시원장, 대구대학장을 지냄)이가 보고 재밌다 하고 잡지하는 최남선에게 보냈는데 묵살돼 버렸다.

손두환은 독일어를 하다가 공산주의가 내렸다. 독립운동 한다고 상해 임정에 갔다가 월북하여 건설부 차관을 지냈다. 나중에 김구에게 손두환 일을 물으면 '아이고 그놈 때문에 얼마나 골이 아펐는지 말도 마라'고 했다. 잘나고 뛰어났던 그가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애석했다. '어리석다'고 선생은 평했다.

***윤심덕과 최태영**

1918년 메이지대학에 입학할 때 그는 전 유학생중 유일한 미혼이었다. 여성은 이보배, 김필례, 나혜석 자매, 허영숙, 윤심덕, 황신덕, 박순천 등 20여명이 있었다. 도쿄음악학교에 다니던 윤심덕은 아주 활달한 여성이었다.

어느날 백남훈 선생이 윤심덕이 그를 찾는다는 전갈을 했다. 그러면서 '그 여성은 한번 알게 된 남자라도 사람 많은데서 너, 아무개야 그렇게 부르니 조심해라'고 했다. 그는 백남훈 선생 댁에 온 윤심덕을 보게 되었다. 아랫방에 앉아 웃방에 앉은 그녀를 보고 '날 찾으셨소?' 했다. 그랬더니 첫마디가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고 멀찍이 떨어져 점잔빼고 앉은 그를 아주 같잖아 했다. 심덕은 자기 기숙사 사감한테 가서 그날 유학생 체육회 준비로 기숙사에 못 들어간다고 전해 달라고 했다. 그런 일은 물론 기꺼이 할 수 있었다.

윤심덕은 그다지 미성은 아니었지만 '사의 찬미'라는 노래를 남겼고 김우진과 연극판을 벌이곤 했다. 두사람이 현해탄에서 사라졌다 할때 죽었다고 믿지 않았다. 점잖고 바이올린을 잘 하던 김우진과 어딘가에 도피해서 사는 줄 알았다. 이혼풍조가 들어와 조강지처를 버린 사람들이 많았다.

그 시절 양서점 마루젠과 고서점 간다에서 많은 책들을 사다 읽었다. 양서점에서는 신간이 들어오면 그에게 가져다 줄 정도였다. 고서점에는 어떤 책이 어느 선반에 있는지도 알았다. '어떤 책이 어디 있는지를 아는 것도 공부'라고 했는데 금전적으로나 공부를 위해서나 유학시절 그렇게 많은 책을 사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니시다(西田)의 '善의 연구'등 근대일본 1세대 학자들의 저서는 일본의 근대화를 말해주는 골동적 가치를 지닌다.

***삼일만세운동**

1919년 동경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때 그는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삼일만세운동이 나자 그는 장련에서의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부친 최상륜이 서울서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내려왔다. 미리 장련, 안악에 까지 알려두고 여러 동지가 모여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어 장날 3천명의 군중에게 나눠주며 연설했다. 이 때문에 해주감옥으로 잡혀가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때 장련 박명식(朴命植) 순사의 큰 도움을 받았다.

동경유학생들은 이 해에 동맹휴학을 하여 천여명의 유학생 대부분이 1년 유급으로 저항했다. 다음해 1920년 동경에서는 조선 YMCA가 주동하여 삼일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강행했다. 붙잡혀갔다 나온 최태영에게 대학의 일본인 동급생들이 물었다.

"너도 졸업하고 조선독립운동 할 테냐?"

"물론이다. 그러니까 될수록 사진같은 것도 안 찍어 내 모습을 남기지 않는다."

그는 무력으로 항일한 투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때의 맹세를 후일 친일하지 않은 것으로 지켜냈다고 생각한다.

1924년 영법학과를 최우등 졸업했다. 영어로 시험쳐 입학하고 영어로 진행된 경제학과목 등에 우등을 하면 주어지는 영어교원자격을 가진 유일한 졸업생이기도 했다. 총장은 그를 경성법전 교수로 추천했다. YMCA가 이때 와세다대학 스코트홀에서 조선 유학생 졸업 환송연을 열었다. 그는 여기서 '조선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곳, 내가 아니면 안되는 일을 하겠다'고 큰소리쳤는데 후일 역사연구를 한 것도 '그때 말한 것처럼 내가 아니면 안될 일이니 했어'라고 말했다.

***보성전문 교수로**

귀국한 그는 관립인 경성법전을 마다하고 사립인 보성전문 교수로 갔다. 김병로(대법원장)가 권한 일이었다. 동시에 경신학교 부교장, 교장, 2차 설립자, 영어교사를 겸직했다. 이때부터 해방이후까지 지식인으로 친일과 공산주의에 함몰되지 않고 살아남는 험난한 시기를 넘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특히 매력적인 부분은 바로 일제 강점기간중의 배일(排日)행적과 공산주의와의 대결이다.

<사진 3>

동경 유학에서 돌아와 25세에 경신학교 부교장으로 부임했을 때 한 첫 연설은 '호랑이한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일본인 선생에게 기울어 있던 친일적 분위기는 며칠만에 바뀌었다. 최 교장은 신중하고 유하여 그런 일을 표나지 않게 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간 중 교육책임자로 있으면서 한 번도 일본 왕에게 절하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다. 경신학교는 사이토 총독이 와서 영어 연설을 하던 교육기관이었기에 역사가들은 그가 어떻게 신사참배를 피했는지 놀라움을 표한다.

"그럴 수도 있었다. 일본인을 대신 보내고 내가 반대 입장이라는 걸 내세우지 않고…"

일본경찰의 앞잡이 격이던 조선인 형사들이 그를 감싸 준 것이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들과도 진정을 갖고 통했다. 고향 장련이나 동대문서는 내가 참배 않는 것을 알고도 문제삼지 않은 것이다."

그가 이제까지 못 잊어 하는 친구 하나가 바로 장련 경찰서의 박명식(朴命植) 순사부장이다. 방학 때 귀향하면 붙어 다니며 모든 얘기를 나누던 그를 통해 일본 경찰이 정보 수집한 각국 독립운동 비밀보고서도 보았다. 그걸 보다 잉크를 엎질러 큰일났다 했는데 박부장이 "무슨 걱정이냐. 내가 쏟았다고 하면 되지" 하고 덮어주었다.

***신사참배**

1937년 선교사 모펫 등이 평양에서 신사참배 반대안을 결의할 때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 최태영이었다. 기독교적 이유를 내세워 조선인으로서 일본 신사참배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앞서 다섯명의 선교사들이 신사참배를 어떻게 볼 것인지를 의논하는 비밀회의에 참석하여 선교사들에게 신사의 본질을 설명했다. 일인들이 알았다면 목숨이 날아갈 사안이었다. 그때 같이 옵서버로 참여했던 김모 박사는 회의 내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사진 4>

그의 전공인 법지식을 활용한 반일 행적은 특히 흥미롭다. 경신학교가 세금납부의 예외가 된다는 항목을 알고는 일본 대장성에다 총유(總有)등록을 함으로써 일제에 세금 내는 일을 아니한 것이다. 조선의 법원에서는 이 법을 모르고 있었다. 이 당시 많은 학교들이 일본인 손에 넘어가고 관립이 되었지만 그가 교장으로 버틴 경신학교는 일본인들이 뺏어가지 못했다. 학교이름을 '사꾸라' 같은 일본식으로 고치라는 위협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광수가 옆에서 '그러다 죽을라. 말을 듣는게 어떻냐'고 했을 정도였다.

***학병**

조선학생들에게 정신대나 학도병으로 나가라는 연설도 한 적이 없다. 이 점은 특히 인상에 남는다. 윤치호 이광수 장덕수 김활란 등 많은 지식인들이 반민족적인 이런 연설을 행할 때, 그는 보전 정교수의 자리에서 스스로 강사직으로 내려 앉아 연설자로 지목되는 데서(전임강사 이상의 교수들에게 연설이 요청되었다) 소리없이 비켜서는 무서운 결단력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총독부에 직접 교섭하여 실탄을 가져다가 일제 치하의 학생들에게 실탄 총기훈련을 시키고 청나라 말을 가르쳤다. 이들이 학도병으로 끌려갈 때 "나갈 수밖에 없다 해도 총 잘 쏘고 청어(淸語)를 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고 하면 학생들은"알겠습니다" 하고 떠났다. 총을 잘 쏘아 만주군과의 접전 지대에 배치된 조선 학생은 그날로 만주 중국군 부대로 탈출해 살아났다. 그의 휘하 학생들은 거의 모두 살아서 귀환했다. 이런 스승을 잊지 못하던 보전의 제자들이 많았다.

보전논집은 1934년 김성수와의 밀약으로 어떻게 해서든 조선말로 씌어진 논문을 발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점점 총독부 검열이 삼엄해졌다. 이때의 검열관은 대궐말을 쓰며 광무황제 고종의 통역을 하던 일인이었는데 '황공하옵나이다. 이것은 빼겠나이다.' '이 논문은 고치겠나이다' 하면서 제 마음대로 뽑아내 삭제해 버렸다. 나이도 많은 이 '하옵나이다'(필자 주: 최태영선생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는데 순종비 윤황후의 조카 윤건로씨의 증언에 따르면 田中德太郞일 것으로 짐작된다.)와 매일같이 양보 못하는 부분들을 갖고 싸웠다. 그러나 3집을 내고 난 1937년 이후에는 더 낼 수가 없었다.

***일본어 상용**

1945년에는 총독부 회의에서 '조선인에게 일본어를 언제 어디서나 쓰라는 것은 안 될 말'이라고 반대했다. 그 회의에 같이 참석한 세 명의 조선인 교장이 '조선말을 하면 엄벌을 하자, 고급하고 아름다운 일본말을 쓰게 하자, 꿈도 일본어로 꾸게 하자'며 일어 상용(常用)에 찬성한 것을 뒤집는 그의 반대 연설은 강점기간 중의 역사에 남을 명연설이다.

"4천년이 넘게 써온 조선말이다. 조부모는 일본어를 못한다. 우리 부모세대도 일본어를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일본어를 상용하라는 것인가. 저희 나라 말을 저희 집에서 하는걸 가지고 엄벌을 하자는 말은, 말이 그렇지 실제로 벌을 주지 못한다. 또 아름답고 고급한 일본말을 쓰게 하자는 게 무엇이냐. 보통사람은 보통말만 하려 해도 죽을 지경인데 무슨 고급 상등 일본말을 쓰게 한단 말이냐. 꿈도 일본어로 꾸자는 게 무슨 소리냐. 생시에도 안 되는걸 어떻게 꿈에 할 수 있단 말이냐.

나도 일본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듣겠다니까 하는 것이다. 머릿속에서 한국어로 우선 생각하고 이를 생각해 가며 힘들여 일본어로 옮기려니 분주하기 짝이 없다. 너희가 아무리 그래도 이 회의를 파하고 나가면서 우린 당장 조선말로 이야기 나눌 것이다. 생각해 봐라. 그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너희들이 이런 식으로 하면 반감만 생겨날 것이다."

가정에서까지 일본말을 쓰게 하려는 일본어 상용정책을 공개석상에서, 그것도 총독부 고관들 앞에서 반대한다는 것은 목을 내어 논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기간 중 일본어 상용을 공식 반대한 것은 최태영이 유일한 기록으로 꼽힌다.

식은땀 나는 회의가 끝나고 나올 때 뜻밖에 후루데라(古寺) 경성시장과 시오자와(鹽澤) 학무국장(교육부장관)이 따라나와 절을 하며 개인적인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죽을 일이 뻔했다. 사람 보는 데서는 깍듯이 그를 받들던 일인 학무과장 기무라는 그와 단둘이 되자 "너 이 자식(오마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겠다"고 했다. 실제로 그렇게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장덕수의 형 장덕준도 그렇게 죽었다.

도청에서 나와 경신학교를 발칵 뒤집어 일본어 상용을 어긴 자료를 수색해 갔다. 그러나 최교장을 살리려고 든 총독부의 조선인 장학사가 뒤이어 수색에 나와 그의 교육자적 입장을 살린 자료를 찾아내 일본인의 음모로부터 그를 구해냈다. 며칠 후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지고 조선은 광복을 맞아 그는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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