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영미의 신자유주의자들보다 30년 먼저 케인즈의 개입주의를 맹렬히 비난한 사람이 있다. 서독 질서자유주의(Ordo Liberalismus)의 대표인 오위켄(Walter Eucken, 1891∼1950)이다. 2차대전 이후 서독은 패전의 폐허 위에 유럽 제일의 경제 강국을 건설한 '라인강의 기적'을 달성하였다. 2차대전 이후 서독은, 성장률, 물가, 고용, 국제수지의 모든 면에서 서양 선진국 중에서 가장 양호한 경제 성과를 나타내었다. 서독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뛰어난 경제성장이 그들만의 독특한 사회적 시장경제(die sozialen Marktwirtschaft)의 덕분이라고 자부한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경제정책의 체계, 혹은 이것이 실천된 경제체제를 의미하기도 한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오위켄의 질서자유주의에 노사 공동경영제도와 복지제도를 가미하여 사회정책적 국가개입의 성격을 강화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적 시장경제를 2차 대전 이후 영미의 개입주의적인 케인지안의 정책과 비교하면, 고용안정을 위한 정부의 단기적 경제개입을 반대하고 엄격한 통화관리를 통한 물가안정을 가장 중시하며, 완전한 대외거래자유화, 강력한 독점규제를 특징으로 하며 또한 노동자의 부분적인 경영참여(대량 해고나 회사의 합병 등 주요 경영문제에 노동자의 동의 인정)를 인정하는 것 등이다.
사회적 시장경제를 실천한 사람은 종전 후 서독의 경제부흥을 이끈 에르하르트(Ludwig Erhart : 1949∼63 경제장관, 1963∼66 수상)이었고, 이의 이론과 이념을 정립한 사람은 뮬러-아르막(Alfred Müller-Armack)이었다. 뮬러-아르막의 사회적 시장경제는 오위켄의 질서자유주의를 토대로 하고 여기에 강력한 사회보장제도를 결합시킨 것이었다. 사회적 시장경제에서 시장경제란 오위켄이 말한 자유로운 경쟁적 시장질서를 의미하며, 사회적이란 사회보장제도와 노사공동결정제도가 결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뮬러-아르막은, 자유로운 경쟁시장질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오위켄의 질서자유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였으나, 이에 더하여 정부에 의한 강력한 소득재분배, 튼튼한 중소기업 토대 유지, 공동결정에 입각한 인간적인 노사관계를 통한 탈(脫)프로레타리아화 및 경기 안정이 사회적 시장경제에서 정부의 핵심적 과제라고 주장하였다.
사회적 시장경제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독일 프라이부르그학파의 질서자유주의의 대표가 오위켄이었다. 프라이브르크학파의 중심 주장은 정치적 및 경제적 자유주의였다. 나치의 독재를 경험하였던 이들은 나치를 반대하여, 정치와 경제 모두에서 자유주의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들 질서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신자유주의로 불렀으니 이는 영국의 사회적 자유주의에 이은 두 번째 신자유주의이다. 오위켄은 철저한 경제적 자유주의에 입각하여 소련의 사회주의경제와 나치의 관리경제만이 아니라, 2차대전 이후 영미 케인즈(John Maynard Keynes)의 개입주의경제학도 자유시장의 효율성을 훼손한다고 강력히 비판하였다.
스미스의 낙관과 달리 현실의 자본주의 경제에서 나타난 시장의 실패는 빈부격차만이 아니었다. 주기적 불황과 독점화도 나타났다. 지난 칼럼에서 보았던 것처럼 1873년에 시작되어 20년 넘게 지속된 최초의 세계적 규모의 장기불황이었던 '대불황'(the Great Depression) 을 맞아 자유방임주의는 퇴색하기 시작하고 개입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대불황기에 보호무역주의가 다시 등장하고 제국주의 시대가 열렸을 뿐만 아니라 독점화가 크게 진행되었다. 스미스도 독점의 폐해를 중시하였으나 스미스가 보았던 독점(정확하게 말하면 독점과 과점)은 정부가 독점적 영업권을 부여하여 만들어진 정부가 만든 독점이었고, 자본의 집중과 집적으로 인하여 시장에서 저절로 형성된, 시장에 의한 독점은 아니었다. 구미에서 정부가 만든 독점은 중상주의와 함께 대부분 소멸되었으나,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서 시장에 의한 독점이 19세기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가격경쟁력이 강한 대기업들에 의해 중소기업들이 시장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특히 '대불황기'에서 많은 중소기업들이 도산하면서 독점화가 크게 진행되었다. 독일에서는 은행의 주도 하에 중화학공업에서 그 어느 나라보다도 심하게 독점화가 진행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독점자본은 그 후 독일 나치 정권의 경제적 기반이 되어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중요한 한 요인이 되었다.
오위켄은 독점이 자유방임 시장경제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이라고 보았다. 실업, 불황, 자원낭비 등 자유방임주의의 시장경제에서 나타난 중요한 폐해들이 거의 모두 독점으로부터 비롯된다고 그는 보았다. 독점은 가격기구를 왜곡시켜서 생산과 투자를 위축시킬 뿐만 아니라 불황이 발생하는 것도 케인즈가 주장한 것처럼 기업들이 위험을 두려워하여 투자를 감소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독과점 때문에 생산비가 비싸졌고 정부정책의 변덕으로 인해 투자의 위험이 증대한 때문이라고 그는 보았다. 독과점 때문에 생산비가 비싸졌다는 것은 철강이나 시멘트와 같은 기간산업이 독점화되어 가격이 상승하였고, 노동조합 때문에 임금이 높아졌음을 말한다. 오위켄은 시장경제에서의 분배의 왜곡도 사유재산제도 때문이 아니라 독점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았다. 노동의 수요를 독점하는 독점기업들이 임금을 부당하게 낮게 책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스미스는 정부의 규제가 없어지면 경쟁시장이 모든 곳에 저절로 형성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자유가 주어진 현실에서는 독점이익을 창출하려는 뿌리 깊은 충동이 모든 기업에게 존재한다. 따라서 영업의 자유가 부여되자 독점화 현상이 광범하게 발생하게 되었다. 특히 오위켄은 대기업이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새로운 권력임을 강조하였다. 이 때문에 오위켄은 독점의 금지와 규제를 물가안정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경제정책 목표로 삼았다.
독점화 다음으로 오위켄에게 각인된 경제의 재앙은 인플레였다. 오위켄의 조국 독일은 20세기에 들어와 극심한 초인플레를 두 번 겪었다. 첫 번째는 1차대전 이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인플레였다. 1차대전 종전 이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Weimar Republic; 1918∼33)의 4년 동안, 패전으로 생산기반은 무너지고 승전국에 대한 보상금 지불 때문에 대규모의 적자재정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한 통화 남발로 인해 1921년에서 23년까지 2년 동안 독일마르크의 환율이 1달러 당 62.5마르크에서 무려 42억 마르크로 폭등하였다. 벽지보다 돈으로 도배하는 것이 더 싸게 되었다. 2차대전 패전 직후에도 살인적인 초인플레가 발생하였다. 전쟁으로 생산시설은 폐허가 되어 물자는 부족하고, 정부는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통화를 남발하였기 때문이다. 이 두 번의 초인플레 기간 동안 화폐 경제가 무너져서 생산과 유통이 거의 중단되는 경제파탄을 겪게 되었다. 이런 경험 때문에 오위켄은 독점과 인플레가 시장경제의 가장 큰 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위켄은 완전경쟁시장만이 생산의 효율성과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유일한 경제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간의 경험을 통해 오위켄은 스미스와는 달리 자유방임의 시장경제에서 완전경쟁시장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므로, 국가가 인위적으로 완전경쟁시장에 필요한 조건들을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오위켄은 완전경쟁시장에 필요한 이러한 조건들이 모두 충족된 경제를 경쟁질서라고 부르고 이 경쟁질서를 국가가 책임지고 만드는 것을 경제헌법의 기본원칙이라고 불렀다. 이의 주요 내용은 셋이다. 하나는 규제철폐이다. 수입규제를 포함하여 가격과 거래에 관한 모든 규제를 철폐하여 완전히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하는 것이다. 둘은 철저한 독점금지정책으로 독점을 금지하여 경쟁시장을 만드는 것이다. 셋은 엄격한 통화관리정책을 통하여 물가안정을 유지하여 가격기구가 효율적으로 작동케 하는 것이다. 이 밖에 오위켄은 공공복지, 공해방지, 노동자보호의 정책들도 경우에 따라서 필요함을 인정하였다.
오위켄은 사회주의나 나치 하의 독일경제만이 아니라 자유방임경제와 케인즈의 개입주의까지 모두 비판하였다. 사회주의나 나치 하의 독일 경제와 같은 중앙관리경제는 생산과 투자를 시장가격기구가 아니라 국가가 결정하므로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으며 개인의 자유를 압살한다는 결함을 갖고 있음을 그는 지적하였다. 보통 나치즘을 사회주의경제와 정반대의 극우경제로 보지만 오위켄은 이와 반대로 나치즘도 중요한 생산과 투자를 국가가 결정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경제와 동일한 중앙관리경제라고 보았다.
케인즈의 개입주의경제도 오위켄은 엄격하게 비판하였다. 케인즈의 총수요확대정책은 가격규제와 인플레를 초래하여 시장가격기구를 왜곡시켜서 장기적으로는 생산과 투자를 감소시키며 불황을 초래할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불황의 진정한 원인도, 앞서 본 바와 같이, 케인즈가 주장한 총수요의 부족이 아니라 독과점으로 인한 생산비의 상승과 정부정책의 변덕으로 인한 투자 위험의 상승이다.
이처럼 오위켄은 영미에서 케인즈가 비판받기 훨씬 전에 케인즈의 개입주의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오위켄과 더불어 질서자유주의를 대표하는 뢰프케(Wilhelm Roepke)도, 경제를 마치 조정 가능한 기계장치와 같이 파악하였다고 케인즈를 비판하였다. 이는 케인즈에 대한 현대 신자유주의의 '합리적 기대가설'의 비판과 동일한 내용이다. 이런 점에서 서독의 질서자유주의는 미국 신자유주의의 선구이다.
국가는 경쟁질서(독점금지와 물가안정)의 확립만 책임지고 경제활동은 개인의 자유에 일임하라는 오위켄의 질서자유주의는 현대 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정수를 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오위켄의 원리에 입각하여 전후 서독은 독점금지, 물가안정 및 규제철폐를 경제정책의 기본으로 삼았다. 이런 오위켄의 이론에 입각하여 1948년 서독은 화폐개혁과 규제철폐(가격 규제와 무역 규제의 철폐 등)를 단행하였고 그 결과 물가안정이 달성되고 시장경제가 작동하기 시작하여 생산과 고용이 점차 증대하기 시작하여 라인강의 기적의 발동이 걸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서독의 전후 경제부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우리나라의 6.25가 발생하면서 군수물자 수출이 급증하면서 부터였다. 이는 일본 경제부흥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우리에게는 비극이었던 6.25가 서독과 일본에게는 하늘에서 떨어진 행운이었다.
현실적으로 오위켄의 질서자유주의가 서독 경제에서 그대로 실시된 것은 아니었다. 뮬러-아르막에 의하여 이미 1950년대 중반부터 공공복지제도가 강조되었으며, 1960⋅70년대에는 케인지언의 총수요조절정책을, 1980년대에는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의 통화주의정책을 각각 부분적으로 채택하여 영미의 경제정책과의 차이가 축소되었다. 또한 반(反)독점정책도 독일에서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는 평을 받는다. 생산규모가 커질수록 평균생산비가 하락하는 규모의 경제가 대부분의 산업에 존재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기업의 대형화에 따른 독과점을 인정하여 주는 경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공정한 시장경제질서의 확립만 책임지고 경제과정(시장경제에서의 민간의 경제활동)에는 간섭하지 말아야 하며 물가안정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오위켄의 주장은 여전히 살아남아서, 다른 나라에 비하여 독일정부는 가능한 한 시장경제에서의 민간 경제활동에 개입하는 것을 자제하여 왔으며, 물가안정을 위해 엄격한 통화관리정책을 유지하여 왔다.
오위켄의 질서자유주의의 주장 중에서 현실에서 가장 잘 실천된 것은 물가안정을 위한 엄격한 통화관리이다. 다음 칼럼에서 보는 바와 같이, 2차대전 이후 대략 1970년대까지 서독을 제외하고, 구미 선진국들은 대부분 케인즈의 주장에 따라서 고용증대를 경제정책의 첫째 목표로 삼고, 총수요를 증대시키기 위하여 계속 통화를 증발시켜 왔고, 그 결과 인플레와 재정적자가 점차 누적되어 왔으며, 이것이 현대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게 된 바탕을 마련하였다. 반면에 서독은 물가안정이 건강한 시장경제의 기초라는 질서자유주의의 원칙에 충실하여 엄격한 통화관리를 견지하여 왔다. 그 결과 서독은 2차대전 이후 수십 년 간 물가안정에 성공하여왔고 이러한 물가안정은 서독 경제가 고용, 재정, 국제경쟁력과 국제수지 등 모든 면에서 다른 구미국가들보다 더 튼튼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평가된다. 영미의 케인지안들은 고용증대를 위하여 다소의 물가상승이 불가피하다고 본 데에 반하여, 오위켄은 물가안정이 고용안정을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보았는데, 지난 50년간의 경험에 미루어 보면 이 두 가지 견해 중에서 오위켄의 견해가 맞다는 것에 세계적 합의가 형성된 것 같다. 유럽연합(EU)이 개별 회원국들의 화폐발행권을 폐기하고 공동으로 엄격한 통화발행을 관리하기 위하여 유로라는 단일통화를 1999년부터 도입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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