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설마하던 재계에 진짜 비상이 걸렸다.
18일 오후까지만 해도 재계의 분위기는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지난 주말 한나라당의 행정수도 이전 공방, 북한의 핵합의 파기 선언 등의 변수 출현으로 한때 노무현·이회창 후보간 지지율 격차가 근접하는 조짐을 보이다가 17일 대다수 언론사의 여론조사 결과 5~8%라는 오차범위 밖에서 더이상 좁혀지지 않자 노 후보의 당선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S그룹, L그룹 등 대다수 그룹이 그러했다.
그러다가 18일 밤 10시 20분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의 노 후보 지지철회라는 누구도 예기치 못한 막판변수가 출현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모그룹 구조본부 고위관계자는 이 뉴스가 보도된 직후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판이 엎어지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상당한 기대감이 읽히는 반응이었다.
선거당일인 19일에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그룹의 관계자들이 수시로 전화를 걸어와 3대 TV방송사가 실시한 출구조사 결과 등을 물으며 사태추이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이들은 투표율이 지난번 대선보다 크게 낮은 것으로 나타나자 "이 후보에게 유리한 징후가 아니냐"고 기대섞인 해석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출구조사 결과가 박빙의 접전, 시간이 흐르면서 노 후보에게 유리한 양상을 띠자 실망하는 반응들이었다. 모그룹 관계자는 방송사들이 공식적으로 출구조사 및 전화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기 직전에 전화를 걸어 "뒤엎기는 힘들겠지?"라고 묻기도 했다.
혹시나 했다가 체념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재계의 이회창 패인분석 "반DJ전선이 반창전선으로 전환"**
재계는 이번 선거를 어떻게 분석하고 있을까.
모 대그룹 구조조정본부 고위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지난 4월 국회의원총선과 6월 지방선거는 '반(反)DJ전선'의 승리였다. 반면에 이번 대선은 '반창(反昌)전선'의 승리가 아닌가 싶다.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10%대에 머물다가 후보단일화로 40%대로 뛰어오른 점이나,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철회에도 불구하고 노후보가 앞선 것이 그 증거다.
이회창 후보가 자신에 대한 세간의 부정적 인식을 씻어내는 데 실패한 결과로 보인다. 이 후보의 '데드 마스크(Dead Mask)'도 한 몫 한 게 아닌가 싶다."
"이 후보는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싸움에서 또 졌다. 질 수 없는 싸움에서 진 것이다. 고정표만 갖고 있었을 뿐, 새로운 지지층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이 후보의 한계가 아닌가 싶다."
***"집단소송제 등 도입하면 국내투자 안하겠다"**
재계는 지금 어떤 걱정을 하고 있을까.
한 대그룹 구조본의 임원은 19일 "우리 그룹의 정치와의 관계는 불가근 불가원"이라며 "기업이 장사만 잘 하면 됐지 큰 변화가 있겠냐"고 말했다. 다른 대그룹 임원도 "경제규모가 이처럼 커졌는데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큰 변화야 있겠느냐"고 말했다.
외형상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실제로 20일 경제단체장들은 회동을 갖고 노무현 당선자에 대한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동시에 재계의 바람도 함께 전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속내는 그렇지 않다.
모그룹 구조본 고위관계자는 '노 당선자가 증권 집단소송제 등을 도입하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대응할 거냐'는 질문에 대해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면서라도 반드시 막을 것"이라고 단호히 답했다.
그는 "만약 노 후보가 재계의 반발을 무릅쓰고 집단소송제 도입을 강행하려 한다면 모두가 짐을 싸서 외국으로 나가지 더이상 국내에 투자하는 기업들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는 현재 정부가 추진중인 회계감독기준 강화 등에 대해서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집단소송제 도입등을 놓고 새 정부와 재계가 한판 정면격돌할 가능성이 큼을 예고하는 발언이다.
한국은행은 내년에도 견고한 성장세를 유지하기 위해선 기업의 시설투자가 절실하다고 전망하고 있다. 올 하반기 들어 내수가 뚜렷한 위축세를 보이고 있고 중국을 뺀 나머지 해외시장의 경기도 불확실한 마당에 올해같은 견고한 성장세를 유지하기 위해선 기업들의 적극적 시설투자가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따라서 만약 재계가 시설투자를 무기로 노무현 당선자와 대립하는 양상을 보일 경우 한차례 파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금융계 반응은 '호의적'**
재계의 이같은 긴장 어린 반응과 대조적으로 금융계 반응은 상대적으로 덜 걱정하는 분위기다. 노 당선자가 공약으로 내건 증권 집단소송제, 회계감독 강화 등은 금융계 입장에서 보면 '악재'가 아닌 '호재'이기 때문이다.
한 투신운용사 대표는 "증권 집단소송제 도입 등은 기업들 입장에서 보면 죽을 맛 나는 소리겠지만 금융 입장에서 보면 상황은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집단소송제 등을 도입해 기업의 투명성이 높아지고 오너의 전횡이 줄어들면 그만큼 주가도 오를 것"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한 시중은행 고위관계자는 "블룸버그통신 등 월가의 주요 언론매체들이 최근 이회창 후보보다 노무현 후보를 선호한다는 입장을 밝힌 데서도 읽을 수 있듯 기업의 투명성이 한층 강화돼야 한다는 점에서 국내외 금융계의 이해관계는 일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노무현 당선자가 DJ노믹스를 승계할 것이 확실해 보임에 따라 IMF사태를 겪으면서 선진국 수준으로 도약한 금융산업은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감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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