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23세의 나이로 독일의 대표적 시사주간지 슈피겔을 창간한 후 독일 전후 언론사에 큰 족적을 남기며 '20세기의 언론인'으로 추앙받던 루돌프 아욱슈타인(Rudolf Augstein)이 향년 79세를 일기로 7일(현지시각) 폐렴으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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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1월 4일 슈피겔을 창간한 후 타계할 때까지 슈피겔 발행인을 맡아온 아욱슈타인은 50년대와 60년대를 거치며 슈피겔이 독일 국내정치 부정부패를 폭로하며 '민주주의의 보호막' 역할을 수행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투쟁하는 언론인이자 발행인으로, 또 오늘의 슈피겔을 있게 한 성공한 기업가로 평가받고 있다.
슈피겔이 오늘날의 명성을 얻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아욱슈타인이 1백3일간의 투옥생활을 겪어야 했던 이른바 '슈피겔 사건(die SPIEGEL-Affaere)'을 통해서다.
사건은 1962년 10월 26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 집권하에 있던 독일 정부는 슈피겔이 '팔렉스 62(Fallex 62)'라는 나토훈련 내용을 '제한된 국방상황(bedingt abwehrbereit)'이란 기사로 폭로하자 국가기밀을 누설했다며 슈피겔 편집국을 압수 수색하고 클라우스 야코비 편집국장과 한스 데트레프 베커 편집인, 한스쉬멜츠 편집장 등 간부들을 구속했다. 당일 부재중이었던 아욱슈타인은 다음 날인 10월 27일 자기 발로 경찰서를 찾아가 1백3일간의 투옥생활을 자처한다.
슈피겔은 당시 기사에서 '팔렉스 62'란 나토훈련은 구 소련이 독일에 핵폭탄을 투하할 경우 서독에게 어떠한 피해가 나타나는지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라고 폭로했다. 이 기사는 당시 국방장관인 프란츠 요셉 슈트라우스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슈트라우스는 아데나워 총리의 동의를 얻어 슈피겔 편집국에 공권력을 투입시킨 것이다.
슈피겔 사건은 그러나 독일은 물론 세계 각지의 거센 항의를 불러와 당시 아데나워 정부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돌이킬 수 없는 실패작으로 끝난다. 슈트라우스 국방장관은 이 사건으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당시 독일 국민들은 아욱슈타인이 투옥된 형무소로 몰려와 "아욱슈타인을 풀어주고 슈트라우스를 감금하라"고 외쳤다.
아욱슈타인에 대해 아데나워 전 총리는 '조국의 배신자'라고 비난했지만 슈피겔은 후일 관련기사에 보도됐던 내용들이 모두 적법한 취재를 통해 이뤄진 것임을 증명하는 후속기사를 내보냈고 아욱슈타인에 대한 모든 비난은 근거없는 것으로 판명됐다.
슈피겔 사건은 당시 독일이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서 비롯된 권위주의 국가의 탈을 벗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당시 테오 좀머 디 차이트 편집국장은 "(먼 훗날) 우리가 이번 사건을 회고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슈피겔 사건을 통해 하나의 정부를 잃었지만 용기있는 민족을 얻었다"고 썼으며 그의 희망은 이뤄졌다고 독일 쥐드도이체차이퉁(SZ)은 보도했다.
이후 슈피겔은 정확한 보도와 성역 없는 비판을 통해 '권총잡지'라는 별명을 얻었고 전 세계적인 정론지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아욱슈타인은 후일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1백3일간의 투옥생활에 대해 "한 사람의 긴 인생에 있어서 1백3일이란 투옥기간을 통해 이토록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면 가치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아욱슈타인은 슈피겔을 "우리는 자유로운 좌파를 지향하며 혼동스러운 경우엔 좌파잡지"라며 그 길을 포기한 적이 없으나 동시에 기자들에겐 익명으로 기사쓰기를 허용하는 등 거의 무한한 자유를 보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슈피겔은 아욱슈타인에 대한 회고기사를 통해 그가 남긴 가장 큰 정치적 업적은 아욱슈타인이 민주적 독일 언론인으로서는 최초로 '독일이 2차세계대전 패배로 잉태된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무엇보다 "서독은 독일 통일을 위해 2차대전 패배로 굳혀진 폴란드와의 국경선을 인정해야 한다"며 "동독 또한 이를 수용해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아욱슈타인은 또 1974년에는 자신이 보유한 지분 50%를 슈피겔 직원들에게 선물했다. 이에 앞서 1971년 애초 아욱슈타인의 슈피겔 창간 당시 공동소유주였던 독일의 대표적 출판사 그루너+야르가 슈피겔 지분 25%를 사들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아욱슈타인은 무상으로 슈피겔 직원들을 회사 최대주주로 만든 것이다.
슈피겔은 당시 아욱슈타인의 선물이 슈피겔 직원들에게 책임감과 애사심을 부여해 오늘의 슈피겔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소유권 세습을 당연시 여기는 한국 언론사주들이 본받을 만한 행동이 아닌가.
아욱슈타인은 50년대와 60년대에는 옌스 다니엘이란 필명을 사용해 아데나워 시대를 비판했다. 당시 그의 초점은 역사조명을 통해 바라 본 독일 정치의 현 주소였다. 그는 또 정치적 주제를 다룬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의 저서 가운데는 '반사(Spiegelungen 1964년)' '콘라드 아데나워(1964)' '독일, 통일조국? 논쟁(1990, 공저)' 등이 있다.
아욱슈타인은 1999년 미디어전문지인 '메디움 마가진(Medium Magazin, 매체잡지)'에 의해 '20세기의 언론인'으로 뽑혔다. 그는 또 2000년 5월에는 국제언론인협회(IPI)로부터 지난 반세기 동안 언론자유에 기여한 '세계의 50대 언론인과 발행인'으로 뽑히며 '세계 언론의 영웅'이란 칭호를 받았다.
요하네스 라우 독일 대통령은 아욱슈타인의 별세에 대해 "독일은 아마도 독일이 낳은 가장 위대한 언론인 가운데 한 명을 잃었다"며 "독일은 그의 죽음으로 가난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나는 아욱슈타인의 판단에 큰 가치를 두었다"며 "그의 임종 전까지 많은 충고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슈뢰더는 또 "(70년대 브란트 총리가 시작한) 동방정책도 아욱슈타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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