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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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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1997년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손광식의 '1997 비망록'> (1) 한보 부도의 폭음

'1997년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프레시안은 오늘 10월11일부터 손광식 프레시안 고문(65)의 <1997 비망록>을 48회에 걸쳐 매일 연재한다.

왜 지금 와서 뜬금없이 5년 전을 되돌아보고자 하는 것일까.

1997년은 올해와 마찬가지로 대통령선거가 있던 권력누수기이자 권력이동기로,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극한적 정쟁과 반전이 거듭됐었다. 아울러 정치적 무정부 상황하에서 경제가 심각한 위기국면에 빠져든 한국경제사 최악의 비극기였다.

2002년 지금 상황도 결코 1997년 못지 않다. '권력'을 향한 각 정파의 극한대립이 계속되고 있고, 요즘 들어선 일각에서 '세계공황' 가능성이 거론될 정도로 국내외 경제의 돌아가는 모양새가 간단치 않다. 위기의 시대, 혼란의 시대다.

이럴 때 1997년은 또하나의 '중요한 선택'을 앞둔 우리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혼미할수록 '역사의 눈'이 필요한 때문이다.

경향신문 편집국장, 주필, 문화일보 사장을 거쳐 현재 삼성경제연구소 및 본지의 고문으로 재직하고 있는 필자는 앞서 본지에 지난 40년간 기자생활 동안에 기록해둔 <한국의 이너서클>이라는 권력내부 비사를 연재해 폭발적 인기를 모은 바 있다. 이 연재물은 책으로 엮어져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1997 비망록>은 <한국의 이너서클>의 후속편으로 손 고문이 집필한 방대한 분량의 기록이다. 1997년 당시 틈틈히 적어놓은 기록과 모아둔 자료들을 바탕으로 완성된 대기록이다.

이제 장대한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주

<차 례>

1. 한보부도의 폭음
2. 원죄
3.'깃털'은 구속되고
4. 검찰을 고발한 사장
5. 낙원시대는 끝나는가
6. 강경식과 도강세
7. 세론의 표적이 된 김현철
8. 황장엽이 몰아 온 '북풍'
9. 북의 진실은 이랬다
10. 파산 도미노
11. 추락하는 국가경쟁력
12. 대권게임
13. 사라진 '민중경제론'
14. 난마같은 시국
15. 박경식 청문회 흔들다
16. "문민도 썩드라"
17. 한 시사지의 진상보고
18. 증인의 돌연한 자살
19. YS, 대선정국 볼모되고
20. 산은총재 이형구 미스테리
21. 구속되는 대통령 아들
22. 마감이냐 시작이냐
23. 여당의 헤게머니
24. 두 가지 베팅
25."저승에서나 봅시다"
26. 경제지표 정상?
27. 찬반만 무성한 '금융 빅뱅'
28. 국가위험도는 곤두박질
29. '기아 쇼크' 일어나다
30. 국민정서라는 해법
31. 국제금융계의 경보
32. 시국을 덮은 아가냐 폭음
33. 기류 바꿔 놓은 조순
34. 정권 재창출 적신호
35. '한국은 다음번 희생자'
36. 요동치는 환율.주가
37. 난장이 된 정치무대
38. 사태 오판케 한 숫자들
39. 이회창 강압한 칼럼
40. 비자금 폭로와 제로섬
41. 검찰총장의 반전극
42. 두 정적의 악수
43. 소가 대를 먹기
44. 달러의 철수행렬
45. 아무도 보고하지 않았다.
46. YS의 심야통화
47. 신문에서 사라진 정치기사
48. 이틀동안의 거짓말

***1. 한보부도의 폭음**

96년 12월 롯데호텔 34층 프랑스 식당 쉔브론 특별실. 한보회장 정태수는 정력적인 모습으로 홀 안으로 들어왔다. 자신의 아호를 딴 정암언론재단 창립을 위한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대학총장, 변호사, 언론계 등 초청 인사들은 그의 얼굴에서 어떤 그늘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하긴 주택사업으로부터 철강산업으로 그룹 사업규모를 확장하는 시기에 '이익의 사회환원'을 위해 언론재단을 세우고 50억원의 기금을 내 놓겠다는 포부이고 보면 항간에 유포되고 있는 자금핀치설은 연말이면 터져 나오는 상례적인 것 쯤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는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자신의 성공비화를 얘기했다.

"사업은 운이다. 세무공무원을 하다가 사업에 뛰어든 것은 모리부덴 광산 하나가 미국업자에게 봉이 되어 일확천금을 하게 되었고 밑천이 생겨 계기가 되었다. 아파트 건설도 그랬다. 한보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는데, 물건이 안 나가 빚더미 위에 올랐다. 완전한 도산 일보직전인데, 부동산 붐이 일어나더라. 돈이 쏟아져 들어오고 나는 파산 직전에서 일약 재벌급이 되었다. 세상만사 다 시와 운이 있는 거다."

그는 문제의 한보철강에 대해서도 내심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건 되는 사업분야이다. 운과 때가 분명히 기다리고 있다. 지금 자금 핀치에 몰리고 있지만 성공한다. 정주영이 말했는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고. 한보 아파트 위기도 수서사건 위기도 나는 넘겼다. 이 나라에서 사업에 성공할 수 있는 문법을 나는 다 마스터 했다.'

그는 활기찬 모습으로 초청 인사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돌아갔다. 이 날 그는 청와대쪽으로부터 추가자금 지원 통고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한보는 구조적인 자금 보틀넥(병목)에 걸려 있었다. 금맥 로비에 뛰어났던 총수의 역량이 한계에 도달했고 유능한 금융참모가 없었다. 그룹 수뇌들은 시시각각 조여들어오는 자금압박을 타개할 묘안이 없었다. 밀월관계를 유지해 왔던 권력 패밀리와 은행권에서 '정치적 변화'의 흐름이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1년 앞에 둔 대통령 선거라는 정치적 변수였다. 이 권력의 이벤트가 1개월 후에 터질 '한보 사태'의 전개 과정에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문법에 의해 발전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간과한 것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보회장 정태수가 경험하고 배우고 성공했던 과정에서 확고하게 다진 것은 정치권력은 만능이며, 이 세력을 움직이는 것은 그 지배세력이 바뀌더라도 금맥이라는 사실이었다. 권력은 수서 사건으로 한때 감옥에 갇혀있던 자신을 빼내 주었고 그 권력을 동원한 것은 바로 금맥이었다.

97년 1월23일 미증유의 재난을 몰아올 태풍의 눈이 형성되었다. 한보가 드디어 부도가 난 것이다. 그리고 태풍의 눈은 폭풍과 비바람을 동반하기 시작했다. .

파동의 발단은 심플했다. 은행이 돈 더 못 꾸어주겠다고 일제히 발을 뺀 것이 그 발단이었다. 그러니 한보는 부도가 날 수밖에 없고 부도가 나니 경제적 파문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돼 있었다. 수조원대의 돈을 은행으로부터 꿔갔으므로 경제적인 문제도 문제려니와 정치적, 사회적 관심을 펌프질하기에 아주 좋은 호재였다. 권력 주변을 중심으로 냄새가 너무 오랫동안 배어 있던 기업이 일으킨 사태라 파장은 엄청났다. 게다가 사회적 불만은 고조되는 시기였고 여야의 집권경쟁이라는 큰 흐름은 사건을 증폭시켰다.

작가 이문열은 이 사건에 즈음하여 한 신문칼럼에서 '마음 속의 호랑이'로 사회심리를 비판했다. 즉 생산자인 성공자에 대한 질투와 자신의 게으름이 범벅이 된 '호랑이 심리'가 지금 한보사태를 맞아 으르렁거리고 있는 소리속에 녹아 있다는 지적이었다.

한보의 부도설은 어제오늘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96년 연말,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면 2년전 수서사건 발생 이후부터 수년간 간단없이 지속되어 왔다. 부도가 난 97년 1월23일을 전후해서 일어난 몇가지 징후들은 부도발생까지 두갈래 흐름을 짚어보게 했다. 그 하나는 '한보 살리기'요, 다른 하나는 '한보(정태수) 죽이기'였다.

조선일보 1면에 한보가 부도로 기울고 있는 상황이 톱기사로 보도되고 있던 날, KBS TV는 "당진제철소를 비롯한 한보그룹 기업들이 월급도 동결하고 무쟁의의 해를 선언하며 열심히 (국가시책에 호응해) 일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런 상반된 흐름은 2~3일간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돌연 부도처리가 결정되었다.

이런 사태의 흐름을 짚어볼 때 한보는 이미 기울어진 대세를 모면키 위해 필사적 노력을 기울였으나 역부족인 상황으로 밀렸다는 추측을 가능케 했다. 믿는 구석이 없이 한보가 헛발길질을 했을 리 없다고 본다면 이번 사태의 이면에는 맞대결한 두 세력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크게 읽어 낸다면 '경제세력'과 '정치세력'이다.

경제세력들-청와대 새 참모진, 은행장, 경제관료-이 "더 이상 못한다"고 들고 나오자, 정치세력-청와대 가신그룹, 정치참모, 실세그룹 그리고 들러리 비호세력-이 "모르겠다"고 길을 터줘 한보사태가 터졌다는 추정이다.

그러나 한보의 정태수는 또다른 제3의 각본, "당진 제철소를 현대로 넘긴다"는 '3자인수 시나리오'를 주장했다. 현대는 제철에 대한 집념이 그만큼 강했으며, 정치대결에서 실패한 정주영의 부활을 제철사업에 걸고 있었다.

한보의 부도-파산의 흐름이 조성된 데에는 물론 시국 정황이 고려됐을 법도 했다. 정국 긴장의 표적을 바꿔야 할 필요성이다. 어떻든 이 사태의 발생으로 노동법, 안기부법 사태는 허리가 끊겼으며 노조의 파업에 대한 여론호응도는 크게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다 금융개혁위원회의 발족과 '금융빅뱅' 이 걸려 있었다. '금융빅뱅'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결단과 집행이 문제였다.

실천력은 모든 반발을 압도할 수 있는 물리적 리더십을 말한다. 물론 문민시대에 총칼로 밀어붙인다는 방식을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행정권력의 압도적 위치 확보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임기 마지막을 보내고 있는 YS가 예의 뚝심과 밀어붙이기로 나간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었다. 그는 임기의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어 있던 힘도 사라질 때였다. 곪아터진 은행의 실체가 낱낱이 해부되고 백일하에 드러나는 전국가적 '긴장'의 연출없이는 '빅 뱅'은 근처에도 못가고 김새는 소리만 낼 수밖에 없었다.

한보사태는 '금융 빅뱅'을 단안해낼 수 있는 큰 재료가 될 수 있었다. 한보부도를 최종적으로 결정한 청와대 경제수석 이석채는 "망하는 데는 은행도 예외일 수 없다"고 말했다. 정보통신부 장관에서 YS의 경제참모가 된 그는 열혈청년의 기질을 갖고 있었으며 반재벌론자였다. 그 스스로 EPB(전 경제기획원) 국장 시절부터 이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그는 96년 10월 청와대에 들어와 한보문제를 챙겼다고 했다.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한보건을 챙기는 곳이 한 곳도 없을 뿐더러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문의를 해도 관련부서는 물론 은행에서도 파악이 되지 않아 스스로 이 문제에 태클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YS의 차남 김현철과는 이른바 'K2(경복고)'의 동문이다. 그 어떤 정치적 고려가 없이 이 일을 터뜨렸다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은행감독원 원장 이수휴는 이석채의 스탠스가 당초부터 '한보 죽이기였는가'에 의문을 제기했다. 적어도 그가 '한보 죽이기'를 내심 소신으로 가지고 있었더라도 정치권력의 압력 때문에 '한보 살리기'로 나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살리되 명분이 있어야 했다. 그 카드가 바로 정태수의 한보철강 주식 포기각서였다.

하지만 정태수는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는 권력을 믿었다. 이미 그는 수서사건에서 자신을 건져 재계에 부활 시킨 것은 노태우라는 정치권력이었다는 사실을 경험한 바 있었다. 그의 믿음은 정확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가지 문제를 간과했다.
정치권력과의 밀월관계는 정치적 이유에 의해 하루 아침에 적대관계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아무리 금력지원을 했다 하더라도 정치권력은 자신들의 방어를 위해 정치의 이름으로 하루 아침에 '구팽'을 해 버린다.

다른 하나는 부패에 편입된 세력들이라도 정치변환기에는 알리바이를 주장하기 위해 부패구조를 스스로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가 금맥으로 지원했던 권력이 바뀌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대통령선거가 흐름을 바꾸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문민정권' 등장 이후 과연 우리의 정치권력은 구각을 탈피했을까.
"달라진 것 없다"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많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세상이 엄청나게 변하고 있고 새 권력은 5년 후 어떻든 사람이 바뀌는 것은 물론 그 구조도 바뀔 수밖에 없는 전제조건 아래서 행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는 어떤 권력자의 역사인식이나 투철한 사명감, 이런 것으로 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그것은 환경 압력과 결합됨으로써 이루어진다.

독재와 민주의 큰 차이를 말한다면 바로 그 바탕에 권력의 '무한성'과 '유한성'에서 오는 힘의 크기라 할 수 있다. 독재는 대포를 들고 나올 수 있지만 문민은 권총 정도로 참아야 한다. 물론 이것은 권력을 행사하는 쪽에서 볼 때의 이야기다. 실제적으로 YS의 권력행사 패러다임을 이런 측면에서 예민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즉 그의 집권 이후 일어난 여러 사태나 사건을 그는 어느 정도의 이니셔티브를 쥐고 진행시켰을까. 여기서 예를 들 수 있는 것이 '전·노 재판'이다.

전·노재판은 도입부가 있다. 이른바 노태우 전임 대통령의 비자금 발각이다. 세상은 신권력이 이니셔티브를 잡고 이 문제를 파헤쳐 간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이 진실인가. 제일 먼저 이 사건에 불씨를 지핀 것은 '서석재 발언파동'이다. 3천억원인가 4천억원인가 비자금을 노씨가 숨켜두고 있다는 오프 더 레코드(off-the-record)가 조선일보에 온 더 레코드(on-the-record)가 됨으로써 일어난 이 사건은 으레 최고 권력이 관련된 사건의 처리가 그러했듯 없었던 일로 어물어물 덮어버리고 총무처장관 서석재의 목을 날리는 것으로 처리됐다.

이런 결과로 끝내는 것이 세상은 잘 모르는 권력 대 권력 사회의 관례요 묵계인지는 알 길이 없다. 나중에 노씨의 비자금 은닉 사실이 박계동의원에 의해 폭로되었을 때에도 이런 패러다임은 마찬가지였다. 청와대는 출발부터 그런 사실이 있을 수 없다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그런 인식은 신권력이 그만큼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세상을 보는 눈이 상대적으로 선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복합정치세력, 그것도 장기집권을 해 온 여당의 세력을 규합하고 그 뿌리에서 권력을 잡은 것이 YS의 신권력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아주기로'하는 '마피아적 계율'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게 보다 정확할 것이다. 권력 내부의 안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태는 엉뚱하게 번져나갔다. 당시 YS는 서동권 전 안기부장을 불러 노씨쪽에 가서 이 문제를 확인해 보도록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안현태 전 경호실장은 이를 전적으로 부인했다. 보고를 받은 YS는 당시 총리였던 이홍구를 불렀다. 이 문제를 들고 대여 공세를 펴고 있는 야당에 대해 적극대응을 할 것이며 공세적으로 나갈 것을 지시했다. 이홍구 총리는 다음날 여의도에서 자신에 찬 목소리로"이 사건을 철저히 밝히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 속에 숨어있는 뜻은 사실도 아닌 것을 가지고 공격을 하는 야당쪽을 잠재우겠다는 쪽에 더 비중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사태는 급전직하로 변했다. 문제가 발생한 상업은행 적선동 지점에서 비자금의 실질 소유주를 불어버렸고, 연희동 노통쪽에서도 사실임을 실무책임자였던 전 청와대 경리과장이 불어버렸다.

YS에 대한 보고는 다시 수정되었다. YS는 대노했다. 아니 상황변전에 따라 방향을 바꾸고 새로운 시나리오를 짜기 시작했다. 검찰에 철저한 조사를 명령했다. 같은 뿌리에서 태어난 권력자이기에 YS로서는 공동혐의를 벗어날 적극적 알리바이가 필요했다. 권력 위기에 대한 강력한 방탄막이 필요한 순간으로 사태의 진전과정이 급박하게 돌아간 것이다. 일찍이 YS는 예의 '부산 초원복집 사건'때 다 기울어진 해를 잡아 대통령의 자리를 쟁취했던 전력을 갖고 있다. 그는 정치적 상황변전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단순한 듯하지만, 밀어붙이는 힘이 없이는 구사할 수 없는 독특한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전·노 비자금 사건'은 상황의 산물이지 스스로 이니셔티브를 잡고 밀어붙인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게 보다 정확할 듯 하다.

일찍이 노재봉 전 총리는"정치란 문제를 스스로 던지고 스스로 풀어나가는 과정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자칫 오해하면 정치공작적 수준으로 폄하해서 이해할 수도 있을 터이지만 그래도 학자출신이란 점을 감안할 때 그의 말 뜻은 아마도 정치권력의 생산성에 주안점을 둔 것이라고 믿어진다. 그런데 '긴장을 통한 생산성'이란 것은 스스로 창업한 자와 남의 기업을 인수한 자 사이에서는 엄청난 낙차를 드러낸다. 다시 말해 YS는 '민주시대의 정치'를 창업한 것처럼 보여지지만 기실 그는 '그렇게 되어간 나라'를 인수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해 그는 '오너 회장'이 아닌 것이다.

물론 그 원죄는 그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그가 이니셔티브를 잡고 문제를 던지고 스스로 해결해 나간 것이 있다면,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손을 댔던 부정부패 척결작업일 것이다. 그러나 역부족으로 곧 손을 뗐다. 그 후에 더러 부정부패 적발 작업이 진행되곤 했지만 연결성, 철학성은 이미 빛이 바랬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할 것이다. 그 증거는 바로 장학로 사건에서 드러났고 한보사태로 폭발했다. .

지금도 검찰의 기소과정에 의문을 남기고 있지만, 장학로가 직무와 관련하여 먹은 뇌물보다 '떡값'으로 받은 액수가 크고 그 떡값은 기소사유가 되지않았다. 그런데 그 떡값은 무려 21억원이었고 뇌물죄에 얽힌 돈은 불과 6억원이었다. 일벌백계로 치겠다고 그렇게 서슬 퍼렇던 검찰이 '떡값 부스러기'로 면죄의 길을 찾아준 것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 답은 쉽게 내려질 수도 있다. 그냥 정표로, 관행상 의례적 표시로 한 것을 부정으로 다스릴 수야 없지 않느냐는 논리이다. 그러나 검찰의 '떡값 불기소'에는 엄청난 부패구조를 키워온 배경이 있다. 10.26사건 직후 바로 자신이 비판의 표적이 되자 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은 "떡고물을 조금 손에 묻혔다"고 말했다. 어쩌면 이 말은 뇌물을 받는 정치인·관료·금융인·언론인의 자기변론이 되었을 것이다.

떡값이든 떡고물이든 간에, 손에 묻히거나 잡수시는 분들 치고 직무와 관련하여 혹은 지위를 이용하여 압력을 넣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여기서 분기점이 나타난다. 모두가 무죄이되 (혐의자들은 떡값이라 주장하므로) 검찰은 유죄자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러나 진실은 모두가 공모한 유죄혐의자들이다. 다만 그 재단(裁斷)은 검찰총장이나 혹은 법무장관이 정치권력의 의중과 국민정서를 저울질해 가면서 이리도 자르고 저리도 자르는 것이다.

검찰이 경제적 해석에 입각하여 '떡값'이라는 면죄의 구멍을 만들어 놓았을 리는 없다고 보지만, 경제계에서는 '기름칠'없이는 경제의 흐름이 막힌다고 말한다. 또 맑은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 수 없고, '흐린 물 속에서라야 붕어가 노닌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비약하여 그런 흙탕물이랄까 떡값이랄까 그런 것이 있어야 자본주의는 잘 굴러간다고 말하는 사람들마저 있다. '박통시절' 경제가 잘 나가고 신바람나게 일한 것도 '떡값 커넥션'을 슬쩍 슬쩍 눈감아주면서 달려나갔기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일화가 있다.
H씨는 박통의 유능한 경제관료였다. 이 H비서관이 하루는 결재서류를 대통령에게 올렸는데 그 속에서 봉투가 하나 붙어 나왔다. 박대통령은 본인을 불러 그 봉투를 던져주며 질책을 했다. 그러나 원안 결재 서류엔 허가 사인을 해 주었다. 이미 박정희는 부패구조를 알고 있었으며 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관대한 입장을 갖고 있었지 않은가 보여진다. 그는 아마도 정치적 권력의 안정과 개발독재의 과정에서는 유능한 관료들이란 먹기도 잘하고 쓰기도 잘하는 자들이란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성취감만으로 다른 보상이 없이 일만 열심히 한다는 것은 특수한 경우나, 그만큼 수준 높은 의식이 없고서는 어렵다.

전직 경제장관 가운데 학자출신의 한 사람은 그의 부처가 부패스캔들에 휘말려 검찰소환이 빈번할 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젊은 사자는 썩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 제군은 젊은 사자들이다. 비록 허기가 지더라도 성취의 기쁨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 장관이 성취만을 보상으로 하여 박통에게 충성하고 국가 정책을 이끌어나가는 데 열심이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는 사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명절때 들어오는 것만 가져도 이거나 되는데, 왜 뇌물들을 먹지?"

그가 말하면서 펴 든 손가락은 다섯개였다. 50만원? 5백만원? 아니면 5천만원? 하여튼 당시 웬만한 집을 5채 정도는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에게는 이건 썩은 고기가 아닌 것이다. 그냥 명절에 상대가 떡값 정도로 보낸 것일 뿐이다. <동물의 세계>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사자도 배가 고프면 썩은 고기를 먹는다. 그런 생태계의 지식을 가지고 반박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중기준을 말하려 함이다. 이것이 떡값의 진정한 실체이며 해석이다.

적어도 장학로 사건에서는 나중 '전·노 재판'에서 부정부패와 벌을 받아야 할 뇌물의 범위를 직위와 관련, 포괄적으로 본 것처럼 새로운 정의를 내린 것 만큼 법해석의 진전이 있었어야 했다. 그러나 청와대 비서직인 장학로에겐 '떡값 무죄'가 나왔고 모든 권력 일가의 형님 아우들은 '기술적 부패'가 아직도 살아남을 수 있음에 안도의 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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