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는 ‘열린 보수’인가, 아니면 ‘열린 척하는 보수’인가.
연초부터 ‘업그레이드 코리아’를 주창하고 국가 10대 과제의 하나로 ‘정부예산 1% 대북지원’을 제시하며 남북간 화해협력과 공존의 길을 찾아보자던 중앙일보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부시 미국 대통령의 연두교서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오히려 한국 정부에 대해 한미간 정책과 인식의 이견차를 좁히라고 주문하고 나서 중앙일보의 정체성에 다시금 회의를 갖게 하고 있다.
중앙일보는 4일 '정부는 왜 말이 없나' 사설에서 정세현 통일부 장관이 지난 2일 KBS 심야토론에서 밝힌 ‘북한의 핵ㆍ생화학무기는 남한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체제방어 또는 강대국을 상대로 한 협상카드’ ‘핵무기가 있다 해도 북한이 한반도라는 좁은 땅에서 사용하려 들지는 않을 것’ 등의 발언에 대해 ‘어이없다’ ‘안이하다’ ‘무책임하다’고 비판했다.
정 장관의 발언에 대해 “대화와 교류는 냉정한 현실판단과 원칙에 근거해야 한다. 평화는 평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를 지킬 수 있는 힘과 원칙의 유지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중앙일보의 사설에 큰 문제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말할 수는 있겠으나 공개석상의 장관발언으로는 부적절했다”는 한 기자의 말처럼 그야말로 원칙적인 발언 수준이기 때문이다.
***남북화해에 기여한다더니 부시 '악의 축' 발언에는 침묵**
문제는 부시의 강경발언에 대한 중앙일보의 미온적 태도다. 한국 정부에는 원칙을 강조하는 중앙일보가 미국에 대해서는 아무런 입장표명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17일부터 24일까지 3회에 걸쳐 대북지원 1%를 선창하고 대북관계 개선을 위해선 햇볕정책만이 대안이라던 중앙일보가 한국 정부에는 한미공조를 깨뜨리지 말라고 질책하며 부시의 선전포고성 발언의 문제점은 전혀 지적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업그레이드 코리아를 위한 정부예산 1% 대북지원과 포용정책 지지라는 중앙일보의 화두가 쇼가 아니냐는 의심을 살 수 있는 대목이다.
구체적으로 중앙일보 사설은 “정부는 북ㆍ미간 강성 성명전이 연사흘 계속되는데도 아무런 공식논평 한마디 내놓지 못하고 있다” “아무런 원칙 표명없이 양쪽 눈치나 살피는 정부의 무원칙한 태도도 답답하지만, 그 총중에 이런 안이한 발언이 주무장관을 통해 나오니 국민은 더욱 헷갈릴 뿐이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미국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없이 그야말로 눈치만 살피고 있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사실 미 공화당의 대북 강경기조는 부시 행정부 출범부터 이미 한미간의 마찰요인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됐다. 또 부시는 엔론게이트ㆍ재정적자 반전 등에 대한 미 국민의 질책을 피하고 중간선거 등을 겨냥해 나름대로 잇속을 챙기겠다는 계산과 자신의 정치적 후원자인 군수산업 등의 지지를 얻겠다는 속내에서 북한 등 소위 ‘악의 축’을 대상으로 한 테러와의 전쟁이 유지돼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그래서인지 부시 연두교서에 대한 세계 각국의 언론반응은 비판일색이다. 당사자인 북한과 이란, 이라크는 물론이고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유럽언론들도 ‘전쟁만이 능사냐’며 부시가 전쟁분위기 조성을 통해 국내의 당면문제들을 희석하려고 시도를 비판하고 나섰다. 미국 뉴욕타임스도 지난 1일 '힘의 한계'란 기사에서 ‘부시의 발언이 방어를 원칙으로 해온 미국의 군사정책 기조를 선제공격으로 바꾸려는 시도가 돼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정작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한국언론은 한겨레 등 극히 일부언론을 제외하곤 미국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적 태도를 취하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지금까지 대부분의 한국언론, 특히 동아 조선 중앙일보와 같은 보수지들은 미국 대통령이나 행정부의 발언에 대해서는 거의 무조건적인 지지입장을 보이거나 비판은 커녕 관점도 없는 중계보도로 일관해온 것이 사실이다. 조선일보는 애초부터 현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에 회의를 표시하며 미국 정부의 대북 강경노선을 지지해왔으니 논외로 치자. 또 중앙일보가 조선일보 논조를 따라가겠다면 그 또한 논할 가치가 없다.
그러나 중앙일보는 지금 동아일보 조선일보와의 차별화를 통해 1등지가 되겠다고 공언하고 나선 상황이며 지난해 가판폐지, 사외이사제 도입, 노사 공동편집위원회 구성, 편집국 간부들의 전문기자 발령 등을 통해 신문업계의 변화를 선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차별화의 첫 번째 화두가 바로 대북포용정책을 상징하는 ‘열린 보수’다.
***사시와 논조, 기사 따로 놀아**
중앙일보는 그동안 기사와 사설, 사시가 따로 논다는 비판과 각 지면에 나타나는 기사의 논조가 엇박자를 이루고 있어 유기적으로 일체화된 지면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중앙일보의 한 기자는 “‘열린 보수’나 대북포용정책 지지 등이 중앙일보가 추구하는 논조이자 방향이라 할 수 있으나 아직 기자나 편집국 간부 개개인에게 녹아 있는 것은 아니다”며 “업그레이드 코리아 등의 아젠다는 중앙일보 내부적으로 논조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데 의의가 있지, 논조를 구속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 기자는 또 “중앙일보 나름대로의 논조를 만드는 과정은 지금 진행중이다. 아직은 조선일보 등과 뚜렷하게 차별화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번 사설의 경우 포용정책이 잘못됐다는 차원에서 쓴 것이 아니라 DJ 정부의 기본정책에도 문제가 있으니 장기적인 안목에서 원칙을 가지라고 강조하는 입장을 표현한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미국에 대한 중앙일보 논조의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갖고 있다. 바로 한미동맹관계와 미국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터부라는 것이다. 물론 이 터부는 중앙일보만의 문제는 아니다.
중앙일보의 한 중견기자는 “우리나라 보수는 한미동맹관계에 해가 되거나 반미로 비쳐지는 시각에 대해 무척 조심한다”며 “부시가 너무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으면서도 대놓고 쓰지는 못하는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그러니 만만한 한국정부만 마음껏 비판한다는 말이다.
이 기자는 “중앙일보가 아직 보수지의 한계를 벗어나기는 어렵다. 대북지원 문제도 사실은 보수적 시각에서 제안한 것”이라며 “그러나 앞으로 동아 조선과의 차별화를 통해 현재의 남북경색관계를 풀어나갈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려고 준비중”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시험중, 지켜봐 달라"**
중앙일보 편집국의 한 간부는 “아직 ‘열린 보수’라는 스탠스가 명확히 규정된 것은 아니며 편집국 기자들의 공감대가 형성된 것도 아니다”며 “남북관계에서는 올 8월까지가 아주 중요한 시점이다. 북한은 8월까지를 아리랑 축전 등 행사기간으로 잡고 남북관계를 터놓으려고 하는 입장인데 남쪽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행동반경이 제한돼 있다. 중앙일보는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이 받아들일 수 있는 돌파구나 접점을 찾기 위해 노력중”이라고 설명했다.
아직 구체화되지 못한 중앙일보의 ‘열린 보수’는 계속 진행중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중앙의 새로운 변신이 발전적 체화가 아니라 쇼나 겉모양 내기에만 그친다면 최대부수 1등지는 될지 몰라도 진정한 정론지는 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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