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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년 동아 해직은 구조조정"

남시욱씨,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해괴한 주장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수>라는 저서로 유명한 홍세화씨가 IMF사태 발발 얼마 뒤 일시 귀국해 TV에 출연했을 때 일이다.
그는 이런저런 시국 이야기를 나누던 중 과거에 자신이 범한 중차대한 실책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고 사사건건 정부에 대해 트집을 잡고 있던 김영삼 전대통령에 대해 다음과 같은 표현을 쓴 적이 있다.

“공격적 뻔뻔스러움의 극치다.”

독설가 홍세화다운 기막힌 조어였다.

***또 하나의 ‘공격적 뻔뻔스러움’**

유감스럽게도 이 표현이 또다시 사용되어야 할지도 모를 사태가 언론계에서 24일 발생했다.

언론인 출신인 남시욱씨가 24일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75년 1백34명의 기자를 길거리로 내몰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약칭 동아투위) 사태를 ‘경영상 불가피한 구조조정’이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남씨는 59년부터 95년까지 동아일보에 재직했으며, 75년 동아투위 사건 당시에는 외신부장을 맡고 있었다. 95년 이후에는 3년여간 문화일보 사장직을 맡기도 하다가 노조의 퇴진운동으로 중도하차한 뒤, 현재는 성균관대 언론정보학과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남씨 발언을 접한 동아투위 당사자들은 당연히 울분을 터뜨리고 있으며, 언론계 내부에서조차 그의 ‘상식밖 발언’을 이해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그동안 동아투위 사태를 구조조정의 일환이라고 주장한 이는 언론계를 통틀어 지난 75년 동아일보 기자들을 집단해고했던 고 김상만 동아일보 명예회장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동아투위 핵심멤버중 하나였던 정연주 한겨레신문 논설주간을 비롯한 동아투위 일각에서는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기회주의자의 발언”이라고 남씨 발언을 묵살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일각에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망언”이라며 이를 공식적으로 문제삼을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특히 젊은 네티즌이 많이 보는 오마이뉴스가 남씨 발언을 아무런 가치평가없이 지상중계한 대목을 놓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는 게 아니냐'는 주장을 펴고 있다.

요컨대 오마이뉴스는 남씨를 초청해 남씨가 근저 <인터넷시대의 취재와 보도>에서 오마이뉴스를 높게 평가한 대목을 상세히 소개하는가 하면, 최근 오마이뉴스가 주장하고 있는 대선후보 공개지지에 대한 ‘남씨의 지지’를 강조하는 등 상당히 ‘우호적 접근’을 하고 있다. 반면에 동아투위 사태에 대해선 아무런 논평없이 남씨의 일방적 주장만 싣고 있다.
따라서 대응을 하지 않다가는 75년 당시 상황을 모르는 젊은 네티즌들이 동아투위 사태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갖게 될 우려가 크다는 게 이들의 판단이다.

***‘동아투위 사태는 경영상 불가피한 구조조정의 결과물’**

남씨 인터뷰 내용 중 문제가 되고 있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오마이뉴스가 물었다.

“75년 동아투위 사태때는 외신부장이었는데, 그 당시에 해직된 기자들도 많았다. 당시 어떤 입장을 취했나.”

남씨의 답은 이러했다.

“동아투위 사태는 한국언론사에서 불행한 사건이었지만, 언젠가 진실이 빠짐없이 밝혀지리라고 본다.

자세히 설명하면 복잡한데, 회사 입장에서는 광고가 안 들어와서 경영이 안 되니 불가피하게 기획부, 과학부, 심의실을 폐지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한 것이었다. 그런데 기자들은 ‘우리 목을 자르기 위해 하는 게 아니냐’하고 반발했고, 제작을 방해했다.

신문을 못 내는 상태에서 공권력이 들어와 상황이 악화됐다. 간부였던 나로서는 희생을 적게 하기 위해 애썼다.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에서는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의 입장이 어려워지지 않나? 당시의 내 처지도 근래의 남북대화 상황과 비슷하게 된 것이다.”

이는 전체 인터뷰 가운데 동아투위 사태에 대한 유일한 물음이자 답변이었다.

***시장점유율이 70%가 넘던 동아일보에 왜 광고가 끊겼나**

남씨 발언은 과연 어디까지 진실인가.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광고가 안 들어와서 경영이 안 되니 불가피하게 구조조정을 단행했다”는 주장의 허와 실이다.

남씨는 “광고가 안 들어와서 경영이 안됐다”고 주장했다. 이는 틀리지 않는 분명한 사실이다. 74년말부터 동아일보는 광고 부족으로 심각한 경영난에 직면했었다.
남씨는 그러나 당시 동아일보에 왜 광고가 안 들어왔는가를 은폐, 교묘하게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

이른바 '동아광고 사태'는 74년 12월20일부터 시작됐다.

동아투위 공식사이트인 '자유언론실천'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날 동아일보의 오랜 광고주였던 한일약품이 돌연 "더이상 묻지 말아달라"면서 광고동판을 회수해갔고, 대한생명보험이 연말까지 계약된 광고를 일방적으로 해약했다.
나흘 뒤인 12월24일부터는 럭키그룹 등 7개 광고주가 일시에 계약을 철회했으며 동아방송에도 13개 주요 광고주가 철회를 통고했고 25일 이후에는 큰 광고가 일체 들어오지 않았다.

광고탄압이 시작된 지 한달이 지난 75년 1월25일 현재 신문은 평상시 상품광고의 98%, 방송은 2월8일 현재 전체광고의 92%가, 월간 신동아의 광고도 3월호에는 90%가 떨어져 나갔다."

박정희 정권의 광고탄압은 전세계 언론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광범위한 국민저항을 야기했다.
자유언론실천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외부압력에 의한 광고해약 사태는 전세계 언론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당시 재야.종교.사회단체들은 정부를 비판하는 한편 탄압받는 동아돕기를 전국민에 호소했다. 그 결과 '격려광고'란 이름으로 '민주광장'이 동아일보 지면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중략)
동창들끼리 클럽들끼리 격려광고의 대열을 만들었고 교회와 성당에서 모인 성금이 답지했으며 산사에서 참선하던 스님들도 달려왔다."

남씨는 '경영상 불가피한 구조조정'을 주장하면서도 왜 당시 전체 신문시장의 70%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거대 언론사인 동아일보에 광고가 안들어왔는지, 그 원인을 말하지 않고 있다.

남씨의 올해 나이는 65세. 최근까지 책을 집필하고 강의를 나가며 신문컬럼을 쓰는 것을 보면 아직 과거의 기억을 망각하는 '알치하이머병'에 걸린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는 역사를 악의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전형적인 '곡학아세(曲學阿世)'이다.

***"우리가 월급을 깎겠으니 해고자를 원대복귀시켜라"**

남씨의 다음 주장도 왜곡투성이이다.

그는 "광고가 안 들어와서 경영이 안 되니 불가피하게 기획부, 과학부, 심의실을 폐지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한 것이었다. 그런데 기자들은 ‘우리 목을 자르기 위해 하는 게 아니냐’하고 반발했고, 제작을 방해했다"고 주장했다.

남씨 발언은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당시 동아투위 사태 당시 전선의 맨앞에 선 까닭에 75년과 78년 두차례나 감옥생활을 해야 했던 동아투위의 박종만 전 디지털타임스국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남씨 발언은 당시 동아일보 김상만회장의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진실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74년말부터 박정희정권의 광고탄압이 시작되면서 회사 경영이 나빠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박정희가 광고탄압을 한 노림수가 이것이었기 때문이다.

동아 경영진은 75년 3월8일 기획부, 과학부, 심의실, 출판부를 폐지하며 이들 부서에 속해있던 기자들을 해고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당시 회사가 내세운 명분은 남씨 주장대로 경영난이었다.
그러나 회사 속셈은 그것이 아니었다.
회사가 해고한 사람들 중에 기획부에 안성렬차장, 과학부에 조학래기자가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안차장은 중견기자들의 중심점이었고, 조기자는 당시 노조위원장이었다. 저항조직의 중추를 제거하기 위한 교활한 공작이었다.

기자들은 이에 즉각 기협분회 총회를 열고 경영진측에 "회사가 어렵다면 우리 스스로가 월급을 깎겠으니 해고자들을 원대복귀시키라. 동료들과 끝까지 정부와 싸우겠다"고 인사조치 철회를 요구했으나 경영진은 못들은 척했다. 경영진이 인사조치를 단행한 목적이 결코 '경영난'에 있지 않음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갔고, 마침내 3월12일 기자,PD,아나운서들은 긴급총회를 열어 해고직원의 즉각 복직을 요구하며 제작을 거부하고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동아사태는 '동아 경영진과 공권력'의 공동작품**

남씨는 파업후 상황에 대해서도 왜곡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파업이후 상황 및 자신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문을 못 내는 상태에서 공권력이 들어와 상황이 악화됐다. 간부였던 나로서는 희생을 적게 하기 위해 애썼다.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에서는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의 입장이 어려워지지 않나? 당시의 내 처지도 근래의 남북대화 상황과 비슷하게 된 것이다.”

과연 그의 말은 어디까지 진실인가.
우선 동아파업에 "공권력이 들어와 상황이 악화됐다"는 주장의 진실 여부부터 살펴보자.

자유언론실천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농성 엿새째인 3월17일 새벽, 회사측은 술 취한 폭력배와 보급소 직원 등 2백여명을 동원하여 농성중인 기자, PD, 아나운서 등 1백50여명의 사원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산소용접기와 해머, 각목, 소방 호스 등이 동원된 이 축출극은 모든 시선들이 잠든 새벽 3시부터 6시까지 어둠 속에서, 그러나 적잖은 재야인사들과 외신기자들이 두 눈 부릅떠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됐다.
그 시간 동아일보사 주변 세종로 일대에는 이미 정.사복 경찰 수백명이 멀찍이서 곳곳에 대기하고 있었다.

사원들은 길거리로 내동댕이쳐지자 냉기가 감도는 미명의 어둠 속에서 정문 앞에 주저앉아 연좌농성을 시도했으나 곧 경찰에 끌려 해산됐다.

이날 아침 사원들은 기자협회에 다시 모여 바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기자회견을 통해 "이제 동아는 어제의 동아가 아니다. 폭력을 서슴지 않는 언론이 어찌 민족의 소리를 대변할 것인가"라며 자유언론을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임을 다짐했다."

동아투위 사태가 동아일보 경영진과 공권력간의 치밀한 '사전모의'에 따른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증언이다.
남씨는 동아투위 사태의 책임을 공권력에게만 떠넘김으로써 자신의 '동아일보 잔류'를 정당화하려는 교묘한 왜곡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전형적 기회주의자였다"**

남씨는 또한 동아투위 사태 당시 "간부였던 나로서는 희생을 적게 하기 위해 애썼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현장에 있었던 동아투위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은 속된 말로 '지나가던 개도 웃을 소리'이다.

한 동아투위 관계자의 증언이다.

"동아투위 사태 당시 외신부장이던 남씨가 보여준 행태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그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현장 주위를 맴돌며 돌아가는 분위기를 탐색했다. 당시 기자들 사이에서는 남씨가 김상만 회장이 만든 '5인 대책위원회' 멤버 가운데 하나였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5인 대책위란 기자들의 연대를 붕괴시키기 위해 김회장이 만든 비밀 대책기구였다.
남씨가 과연 멤버중 하나였는지는 확인할 길 없다. 그러나 동아사태후 남씨는 승승장구를 거듭, 편집국장직까지 올랐다.

희생을 적게 하기 위해 애썼다는 남씨 주장도 어이없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송건호 선생이 동아사태가 발발하자 즉각 사표를 던졌다. 권도홍 여성동아 부장 등도 같이 사표를 냈다. 언론인이기에 앞서 부하직원의 절반 이상이 해고된 상황에서 더이상 회사에 남아있을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당시 외신부장이던 남씨는 선배.동료의 의로운 행동을 외면하고 회사측에 밀착해 출세가도를 달렸다.

한마디로 말해 남씨는 동아투위 사태 자체에 대해 언급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남씨가 말하는 '동아의 전통'의 실체**

남시욱씨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도 했다.
오마이뉴스가 "동아가 조선,중앙에 비해 뒤처진 '3등신문'이 되었다는 항간의 지적에 동의하는가"라고 묻자 남씨는 정색을 하고 이를 부인했다.

"동아가 3등 신문이 됐다는 평가를 인정할 수 없다. 최근 동아의 제작 방침에 혼선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동아는 전통이 있는 신문이다. 동아는 나름대로 자생력이 있는 신문이다.
부수만을 가지고 신문 전체의 질을 논할 수 있나? 나는 동아가 현재의 혼선을 능히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전열을 정비해야 한다."

"신문업은 이미지 산업이다. 이미지가 나쁘면 안 팔린다. 이미지 회복이 필요하면 빨리 해야 할 것이다."

남씨의 이 발언을 접하면 상당한 혼란이 생긴다.
마치 더없이 '동아의 전통'을 자랑스러워 하는 '동아맨'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남씨가 말하는 '동아의 전통'은 무엇인가.
실제로 지금도 대다수 동아일보 독자들은 '동아의 전통'때문에 동아일보를 구독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독자들이 말하는 '동아의 전통'은 일제시대에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를 지운 '민족정신'이고, 박정희 정권때 권력과 싸운 '언론정신'이다.
남씨가 보여주듯 경영진과 권력에 야합한 또다른 '동아의 실체'가 결코 아니다.

어찌 보면 동아일보가 작금의 조.중.동 가운데 3위로 밀려난 근원은 바로 남씨같은 이들이 '동아의 전통' 운운하며 동아의 정신을 왜곡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남씨는 "신문은 이미지 산업으로 이미지가 나쁘면 안 팔린다"며 "이미지 회복이 필요하면 빨리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맞는 이야기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이미지 회복을 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남씨같은 망언이 나왔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고 한다면 지나친 요구이자 독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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