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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외치며 1년10개월 버틴 자존심에 대못을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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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외치며 1년10개월 버틴 자존심에 대못을 박았다

[아리셀 2심 판결을 말한다] ① 2심 재판부의 '기만적 행위

2024년 6월 24일 경기 화성시 서신면에 있는 1차 전지업체 아리셀의 공장에서 화재가 났다. 이 화재로 노동자 23명이 숨지고 8명이 다쳤다. 관련해서 박순관 대표와 그의 아들인 박중언 총괄본부장 등 경영진은 중대재해처벌법과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됐고 2025년 9월 1심 법원은 이들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2심의 판단은 달랐다. 2026년 4월 나온 항소심 판결에서는 박순관 대표가 징역 4년, 박중언 본부장은 징역 7년으로 감경됐다. 아리셀 유가족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학계와 언론에서도 중대재해처벌법을 무력화한, 최악의 선례를 남겼다고 평가한다. <프레시안>에서는 유가족 및 아리셀 대책위가 바라본 2심 선고의 문제점을 5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2024년 6월 24일 월요일 오후 12시 30분경. 그날 저는 평소보다 일찍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와 업무를 위해 PC를 켰습니다. 그러다 문득 눈에 들어온 포털의 속보 기사, 기사에는 '아리셀'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고 '폭발'이라는 글자도 쓰여 있었습니다. 불과 37초 만에 아리셀은 화마에 완전히 휩싸였다고도 했습니다.

심장은 요동쳤고, 곧바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기에서는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라는 음성만 반복되었습니다. 머릿속이 하얘진 저는 곧바로 화성으로 내달렸습니다. 신호위반과 속도위반을 거듭하며 가까스로 아리셀 현장에 도착하니, 그곳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이리저리 휘어지고 주저앉은 철근 위로 연기가 피어올랐고, 수백 명이 아리셀 건물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누구 하나 어떤 상황인지 알려주는 이는 없었고 아리셀 정문 앞을 가로막은 선만이 분명하게 보였습니다. 우왕좌왕하고 있을 즈음 도착한 한 통의 문자메시지, '고 김병철 님 송산장례문화원 안치'.

믿어지지 않는 현실에 저는 다리에 힘이 풀렸고 벌겋게 달아오른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마침 저 멀리서 박순관 대표와 박중언 본부장이 기자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는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유가족들은 충격과 슬픔, 고통을 추스릴 시간도 없이 투쟁에 뛰어들어야만 했습니다. 도대체 사랑하는 나의 아이 나의 남편 나의 아내가 왜 죽어야만 했는지 알아야만 했고 책임자들의 진심 어린 사과, 적절한 배·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아리셀 측은 사과를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카메라 앞과 판사 앞에서였을 뿐입니다.

▲ 눈물 흘리는 아리셀 유가족. ⓒ연합뉴스

참사 이틀 후부터 유가족들이 모이고 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대책위에는 100여 개 시민·노동·사회단체가 함께했고 본격적인 투쟁이 시작됐습니다. 유가족들은 화성시청 인근 모텔을 근거지로 삼고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노동부, 박순관 대표 자택, 에스코넥, 국회 등 아리셀 참사와 관련된 곳이라면 가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2024년 10월부터는 아리셀 본사인 광주시 에스코넥 정문 앞에 천막을 설치하고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나 에스코넥도, 노동부도 유가족들에게 건넨 것은 사과가 아닌 투명인간 취급이었습니다. 당시 고통과 슬픔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살았다기보다 견디고 버티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합니다. 수면제가 없으면, 잠을 이룰 수 없었고 기약 없는 재판 일정에 지쳐만 갔습니다. 연대의 손길이 없었다면 아마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야기했습니다. '돈을 얼마나 뜯어내려고 저러나', '저런다고 일이 해결되나'.

압니다. 그러나 유가족들에게 이미 해결이란 없습니다. 세상을 떠난 나의 사랑하는 가족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 한 해결이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유가족들이 진짜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책임자의 석고대죄와 진심어린 사과였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유가족들의 바램은 허상에 불과한 것이 되었고, 생각지도 못했던 계엄발령과 진척 없는 재판으로 23명의 죽음은 이미 옛날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참사가 발생한 지 4개월여가 지난 2024년 10월경 마침내 1심 형사 재판이 시작되었고 수많은 주장이 오간 끝에 2025년 9월 박순관 박중언 부자에게 징역 15년이 선고되었습니다. 선고 전 유가족 대다수는 생계 등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처벌불원서를 포함, 사측 요구대로 합의에 동의한 상태였습니다. 합의라는 것이 마치 가해자들을 용서하는 행위로 비춰져 사실 유가족들은 합의를 하면서도 양형에 영향이 미칠까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유가족들의 이러한 죄책감이 기우에 지나지 않음을 공식화했습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저는 2심 선고 직전 합의를 한 다섯 명(2명은 부분합의를 한 상태) 중 한 명입니다. 저를 포함해 다섯 명은 처벌불원서를 쓰지 않고 형사합의가 아닌 민사합의에만 동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심 재판부는 1심 재판부와 정반대의 선고를 하고 말았습니다. 유가족들을 걱정하는 듯 판시했지만 2심 재판부는 사실상 유가족들이 '사과'와 '엄중처벌'을 외치며 1년 10개월 동안 버틴 자존심에 대못을 박은 것입니다. 2심 재판부는 유가족들의 외침을 전혀 듣지 않았고, 아니 외면하고 기만했습니다.

앞으로 대법원 판결이 남았습니다. 2심 재판부의 '기만적인 행위'로 유가족들은 이미 큰 상처를 받았지만, 아직 우리는 대한민국의 정의를 믿고 싶습니다. 유가족의 마음을 진심으로 위로할 마지막 판단을 쥐고 있는 대법원의 선고를 우리는 끝까지 지켜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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