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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이 너무 작은 '조.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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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그릇이 너무 작은 '조.중.동'

송건호선생 별세보도, '빅3'답지 않아

예전에는 피 튀기는 전쟁터에서 사로잡은 적장(敵將)의 목을 칠 때에도 갖은 ‘예(禮)’를 다했다. 비록 몸은 반대편에 있으나 같은 길을 걸어온 ‘동업자’에 대한 당연한 예우이고 대접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는 ‘예’를 상실한 사회인 듯싶다.

언론인 청암 송건호(75) 선생이 21일 서울 은평구 역촌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유명을 달리 했다. 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남영동에서 당한 고문의 후유증이 90년대 들어 온 몸이 마비되는 파킨슨병으로 나타나 지난 7년간 병석에 누워있다가 작고한 것이다.

***지금의 '조.중.동'을 다 합한 것보다 힘있던 동아일보 국장자리 팽개쳐**

사람에 대한 평가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송선생에 대한 평가는 진보. 보수 양 진영에서 단지 농도만 다를 뿐 한결같다. ‘참 언론인’이었다는 것이다.

송선생은 지난 53년 대한통신에 몸을 담는 것을 계기로 언론생활을 시작했다. 그후 그는 자유신문, 한국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 등을 두루 거쳐 74년에 동아일보 편집국장까지 올랐다.
그 무렵은 정부의 ‘기자 스카웃 금지’ 명령이 떨어지기 전으로 언론인의 자리이동이 쉽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박정희 정권은 75년 동아.조선 투위 사건을 계기로 언론사주들에게 “더 이상 다른 신문사 기자를 스카웃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직장 이동이 자유로우니 기자들이 겁 없이 정권에 덤벼들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조처였다. 그후 언론사들은 해마다 시험을 치러 기자를 꼽았고, 이같은 관행은 언론인의 ‘직장인화’ ‘소시민화’를 초래했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란 실로 '대단한 자리'였다. 당시 동아일보의 신문시장 점유율은 무려 70%나 됐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언론을 쥐락펴락한다는 조선.중앙.동아 등 이른바 ‘빅3’의 전체 시장 점유율이 74%라는 대목과 비교하면, 당시 동아일보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했고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란 자리가 얼마나 대단한 자리였는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이 동아일보의 예리한 필봉을 꺾기 위해 정권의 사활을 걸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송선생의 ‘지사적 면모’는 75년 동아투위 사태때 유감없이 드러났다. 박정희정권이 동아일보의 김상만회장을 압박, 기자 1백32명을 짜르기로 합의한 사실이 알려지자 사주에게 “먼 훗날 후회하게 될 겁니다”라는 말과 함께 그 대단한 편집국장이란 자리를 미련없이 집어던진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의 대다수 부장, 차장들이 ‘침묵’한 것과 크게 대조가 되는 대목이었다.
송선생은 이 순간 ‘’언론 권력‘의 길 대신에 ’참 언론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가족들은 형극의 길을 걸어야 했다**

송선생의 선택은 민주언론계에게는 더없는 힘이 됐으나, 그 자신 및 가족들에게는 형극의 길이었다. 오십의 나이에 편집국장을 그만 두었을 때 그에게는 대학생이던 세 딸을 포함해 여섯 자녀가 있었다. 등록금을 얻지 못해 자식이 대학 공부를 중도에 그만 두어야 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자녀는 진학을 포기하고 생활전선에 나서야 했다.

정권의 회유와 탄압은 집요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부터 전두환 신군부 시절까지 청와대 공보비서 등 14차례나 관직을 제의받았다. 동시에 시간강사 등 송선생이 할 수 있는 모든 ‘돈벌이’ 수단을 차단했다. 이때 송선생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선택은 글쓰기였고, 책쓰기였다. <해방전후사의 인식><한국민족주의의 탐구><한국현대사><한국현대언론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돈벌이 수단이었고, 동시에 송건호식의 제2의 언론활동이었다.

84년에는 해직기자들이 모여 만든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초대회장이 됐고, 87년 6월 시민항쟁의 한 도화선이 되었던 ‘보도지침’을 특종 보도한 월간 말의 발행인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88년 한겨레신문을 창간, 94년 파킨슨병 악화로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한겨레신문 초대사장과 고문을 맡는 등 마지막 순간까지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송건호보다는 박찬호를 선택한 조.중.동**

이처럼 일관되게 한 길을 고집스레 걸어온 분인 만큼 송선생의 타계소식은 많은 이들을 숙연케 했고,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중앙병원에 마련된 빈소에는 각계 인사들이 빠짐없이 다녀갔다. 참배객 중에는 그동안 한겨레신문과의 언론전쟁으로 불편한 관계에 있던 김학준 동아일보사장, 방상훈 조선일보사장 등도 있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22일 조간의 언론보도는 신문마다 크게 달랐다.
한겨레신문은 1면을 비롯해 4개면에 걸쳐 송선생 별세 소식을 크게 다뤘다. 한겨레신문의 창업자이자 초대사장이었던 만큼 당연한 배려였다 할 수 있다.
경향신문도 1면과 14면, 2개면에 걸쳐 최대한 예우를 다해 보도했다. 반독재.민주화에 헌신한 ‘참 언론인’이었다는 취지의 보도였다.
한국일보도 1면과 15면, 2개면에 걸쳐 진지하게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그러나 ‘조.중.동’의 보도태도는 달랐다.
우선 공통점은 1면에서 송선생 별세 소식을 접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 대신 “야구선수 박찬호가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하게 됐다”는 기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가장 인색하게 기사처리한 신문은 송선생의 고향이었던 동아일보였다. 동아일보는 사회면 맨마지막 하단에 ‘언론인 송건호씨 별세’라는 제목으로 2단처리하는 데 그쳤다. 일체의 가치평가를 배제한 채 고인의 경력만을 약술한 기사였다.

조선일보 역시 사회면 맨마지막 하단에 간단히 고인의 약력을 기술하는 기사로 처리했다. 조선일보는 그러나 동아일보와 달리 23면에 ‘평생을 언론과 민주화 운동에 몸바쳐’라는 제목으로 고인의 발자취를 소개했다.
조선일보의 발자취 기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고인이 한때 ‘조선일보 사람’이었다는 대목을 강조한 것이었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직하던 1968년에는 파리와 베를린에 파견돼, 68혁명이 진행중인 대학 풍경과 베트남 문제를 다룬 평화협상을 국내에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그러나 고인이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신문사에서 내쫓고 직장을 구하려고 해도 방해를 하기 때문에 민주인사가 된 것이지 내가 민주인사가 되고 싶어서 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대목을 인용해, 해석하기에 따라선 미묘한 뉴앙스를 주는 장치를 삽입했다.

중앙일보는 사회2면에 짤막한 2단짜리 별세기사로 처리하는 대신, 29면에 ‘언행일치 신념 지킨 영원한 언론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동아.조선보다는 상대적으로 고인의 생애를 의미있고도 진지하게 다룬 글이었다. 그러나 큰 줄기의 보도태도는 동아.조선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한국언론의 '그릇 크기'가 너무 작다**

상대방을 높여야 자신도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는 법이다.

송선생의 오랜 지우인 강만길 상지대 총장은 ‘송건호선생 영전에 부쳐’라는 글(한겨례신문 12.22)에서 송선생의 생전 모습을 이렇게 회상했다.

“선생은 역사의 바른 노정을 위해서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엄격한 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다정다감한 분이었습니다.
선생께 직접 들은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세상이 다 알만한 어느 언론계의 선배가 군사독재 권력과의 투쟁에서 물러나자(투쟁을 포기하자) 그렇게 많던 세배꾼이 씻은 듯이 없어졌는데, 그것을 아신 선생은 고민 끝에 결국 세배를 가지 않을 수 없었고, 그 후에도 꼬박꼬박 다녔다고 ‘고백’했습니다.”

고인의 그릇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는 회고담이다.

‘조.중.동’의 송선생 별세 보도는 한국 지배언론의 ‘그릇 크기’를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최근 ‘언론전쟁’ 등으로 조.중.동과 한겨레의 사이가 크게 벌어졌다고는 하나, 송선생은 조.중.동의 기자들과 동종업종에서 종사해온 언론인이었고 언론계의 ‘큰 어른’이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고인의 빈소 앞에서 후배 언론인들은 최소한 ‘초당파적 태도’를 보여야 마땅했다.

조.중.동의 ‘협량(狹量)’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또하나 지적할 대목은 한겨레신문의 그릇도 그다지 크지 못함을 이번에 목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겨레는 4개면에 걸쳐 송선생의 일대기를 상세히 다루면서 송선생의 경력중 유독 조선일보 재직 경력만 빼버렸다. 실수라고 볼 수 없는 대목이다.

고인이 만약 이같은 언론들의 보도행태를 접한다면 어떤 평가를 할까.
아마도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시지 않을까. 후학들이 반성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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