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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회고-文酒 40년 <1>박정희와 송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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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회고-文酒 40년 <1>박정희와 송건호

"송선생, 소원이 뭡니까"

프레시안은 오늘부터 언론인 출신의 원로 정치인 남재희씨의 회고록 '文酒 40년'을 연재한다. 기자로 20여년, 정치인으로 20년 가까이 활동했던 남씨는 이 회고에서 역대 대통령에서부터 언론인, 술집 마담에 이르기까지 자신과 술자리를 함께 했던 사람들과, 그 뒷얘기를 숨김없이 털어놓고 있다. 따라서 이 회고록은 지난 1960년대에서 90년대까지 우리의 정치이면사이자 풍속사라고 할 만하다.

남재희씨는 충북 청주 출신(1934년생)으로 서울대 의예과에 입학했다가 다시 입시를 거쳐 서울 법대에 입학한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1958년 한국일보를 시작으로 언론계에 입문, 조선일보 정치부장·논설위원, 서울신문(현 대한매일) 편집국장·주필 등을 역임했다. 지난 79년부터 95년까지 4선 의원(10-13대)을 역임했으며 94년 김영삼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맡았었다.

원래 이 글은 남재희씨의 출신 지역구인 서울 강서구의 서울강서문인협회가 매년 발행하는 '강서문학'에 지난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실렸던 것으로 필자와 강서문인협회의 양해를 얻어 전재키로 했다. 전재를 허락해주신 필자와 협회측에 감사드린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글의 순서를 약간 바꿨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연재를 시작하면서**

학술진흥재단의 이사장으로 있는 박석무씨는 국회의원도 지냈지만 다산연구가로 알려져 있다. ‘다산기행’등 저술도 갖고 있다. 눈이 부리부리하여 친숙해지기 전에는 사람이 좀 거칠겠다는 인상이나 그렇지가 않다. 참 착하다. 임수경 양의 아버지인 임판호씨나 소설가 황석영씨 등과도 가까워 함께 어울려 술 마실 기회도 여러번 있었다.

박씨는 시골 생활이 오래고 나는 서울 생활이 오래니 자연 내가 이런저런 명사들과 어울려 술 마신 이야기를 하는 기회가 많았다. 언론 20년, 정치 17년, 교수 3년의 40년이니 재미있는 화제가 많을 수밖에 없다. 또 술자리에서는 술 마신 이야기를 하는 것도 어울린다. 그랬더니 박석무씨는 나더러 그 이야기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쓰란다. 아예 제목까지도 ‘문주 40년’이라고 주는 게 아닌가.

수주의 ‘명정 40년’이 유명하지만 술 마신 이야기를 쓴 책은 많다. 그런 대로 생활 풍습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어서 재미도 있으려니와 자료로서 의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나이 아직 69세. 옛날 같으면 몰라도 요즘으로서는 아직 회고담을 책으로 쓰기엔 젊다. 그래서 ‘문주 40년 - 시론’을 슬쩍 초해보는 것이다.

***수퍼 거물급들과의 삽화들**

전부터 “국회의원이 되려면 논두랑 정기라도 타고나야 된다”고 하였다. 농경위주시대의 이야기일터이고 요즘같은 산업화·도시화시대에는 “아스팔트 정기라도”라고 바꿔야할 것 같다. 국회의원이 그렇게 훌륭하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고 국회의원 되기가 매우 어렵다는 뜻일 게다.

국회의원이 그러하다면 한 나라의 대통령이나 그 급(예를 들어 내각제의 총리)이 되기는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러기에 흔히들 “하늘에서 타고나야”운운한다. 그러한 수퍼 거물급들과 술을 마신다는 것은 자주 있을 일이 아니다. 더구나 여럿이 하는 회식이 아니고 독대를 하거나 몇 명이만 술을 마신다는 것은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만한 일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언론인 송건호**

8대국회 때라고 말하는 것이 이해에 편리할 것이다. 유신 전이 된다. 그때 박대통령은 언론계를 포함한 각계 인사들을 부지런히 접촉하였다. 유신 후는 달라졌지만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박 대통령은 대여섯 신문사의 정치담당 논설위원을 청와대 본관의 한 방에 초대하여 푸짐하게 술을 냈다. 나는 조선일보 정치담당 논설위원으로 참석하였다. 동아일보의 유명한 송건호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음식에 아마 시바스 리걸이었을 것같은 양주였고, 박 대통령이 계속 술잔을 돌려서 모두들 취해버렸다. 박대통령은 담배도 뽑아 권하며 라이타불도 켜주는 파격적인 친절을 베풀었다. 대통령과 논설위원 사이라는 벽이 거의 무너졌었다.

나중에 당시의 김종신 공보비서관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송건호씨가 소피를 보러 화장실에 갔을 때 박 대통령도 거의 동시에 화장실에 가게 되어 나란히 생리현상을 해결하였다. 그때가 방광의 압박을 풀었기에 기분이 좋은 때라고들 한다. 박 대통령은 송건호씨를 좋게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다. “송선생, 내가 송선생을 무언가 꼭 한가지 도와주고 싶은데 원하는 게 있으면 말씀해 보세요.” “각하, 요즘 지방에 공장들이 엄청 세워졌다 하는데 저는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한 번 보고 싶습니다.” 너무나도 놀라운, 욕심없고도 순진한 부탁이다.

그 덕(?)에 송건호씨는 나중에 산업시찰단에 포함되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다. 세계 여러 나라의 발전과정을 연구하고 싶다면 세계일주를 했을 것이고, 근대화전략을 연구하고 싶다면 연구자금을 두둑히 탔을 것이다. 사실 그 모임에도 참석했던 경향신문의 이명영씨는 김일성이 여럿이었다는 것을 연구하겠다고 하여 두둑한 연구자금을 타냈으며 후에 ‘김일성 열전’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송건호씨는 그러한 대쪽같은 선비였다. 그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한겨레신문 창간 사장을 지내는 등 언론계의 거목으로 존경받고 있다. 지금은 식물인간으로 와병중이다.(송건호씨는 지난 해 연말 타계했다)

***박 대통령과 인척들**

이야기는 다시 술자리로 돌아가서 모두에게 취토록 술을 마시게 한 박 대통령은 마침내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가 그동안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는데 모두들 속시원히 말들을 하지 않는 것 같아.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과 이런 흉허물 없는 자리를 마련한 거야. 기탄 없는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말이요. 그러니 나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아무 거리낌없이 말들을 해보세요.”

첫 번째 논설위원이 여자관계를 꺼냈다. 앗차, 실수다 싶었다. 국정의 중요한 문제를 이야기해야지 남자들의 벨트밑 이야기를 이런 자리서 먼저 거론하여 판을 이상하게 만들다니! 아니나 다를까 분위기가 약간 경화되었고, 두 번째부터의 이야기가 별로 기억할 만한 것이 없게 되었다.

네 번째인가. 아무튼 후반이 되었다. 박 대통령이 나를 바라본다. “각하께서 솔직히 말해보라고 하셔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지금 국회에 각하의 집안이 다섯 명이나 있습니다. 지금 다양화된 사회에서 여러 분야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몽땅 국회에만 진출시킵니까. 김일성 체제가 근친등용을 많이 하는데 이래가지고는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비난할 수 있습니까. 분산시키시기 바랍니다.”

그때 국회의원으로 박 대통령의 집안은 조카사위인 김종필, 그의 친형인 김종익, 박 대통령 처남인 육인수, 처조카사위인 장덕진, 대외적으로 일체 밝히고 있지 않았지만 박 대통령과 본부인사이의 딸의 남편인 한병기 의원 등 다섯 명이 있었다.

“내 사위를 말하는 것이지.” 박대통령의 언성이 약간 높아졌다. 민감한 곳을 건드린 것 같다. 육여사만 공식으로 내세울 뿐, 전 부인 이야기는 쉬쉬하던 때다. 그러니 멀뚱멀뚱 살아있는 딸이나 그 사위에게 얼마나 미안한 생각을 갖고 있었겠는가. “속초에서 그 애 아니면 마땅한 사람이 없다고 하던데…” “대통령 사위니까 그런 것이지요. 사위가 아니면 다를 것입니다.” 아마 나의 얼마간 급한 성격을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되받았을 것으로 짐작을 할 것이다. 사실 그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고 있었으나 꾹 참았다. 예의를 생각해서다. 술자리는 그렁저렁 끝났다.

그런데 박대통령은 대단한 분이다. 그 자리에서는 그렇게 언성을 높였지만 그 말을 기억하고 단계적으로 시정해 나갔다.

9대 국회에서는 사위인 한병기씨와 처조카사위인 장덕진씨가 제외되었다. 나중에 한씨는 대사가 되고 장씨는 농림부장관이 된다.

이어 10대 국회에서는 김종필씨의 형인 김종익씨가 제외되고, 결국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5명을 2명으로까지 줄였다.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들이 김종필·육인수 씨다.

그후에 내가 낙하산으로 국회의원 공천을 받게 된 것은 분명 그때 일때문인 것으로 추측한다.

***박 대통령은 검도, 전두환은 축구팀 주장, 노태우는 테니스**

대통령 이야기가 나온 김에 몇몇 대통령을 비교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나는 특히 외국기자들과 이야기할 때 박대통령은 검도, 전두환 대통령은 축구의 주장, 노태우 대통령은 테니스라고 각각의 상징적 징표를 말한다.

박대통령은 일본 육사를 나와 일본 사무라이의 무사도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명치유신 때의 지사들을 존경하고, 니노미야 긴지로라고 근검절약, 입신양명의 상징 인물을 좋아했던 것같다. 또 일본 총독부의 아다라시이 무라 쓰꾸리(새로운 마을 만들기)정책과 새마을 운동의 유사성도 있다.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을 ‘국화와 칼’ 이라는 책 제목으로 압축하여 말하였는데 여하간 그런 것들을 종합하여 박 대통령을 검도라고 압축하여 말한 것이다. 그것도 진검승부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축구의 주장답게 박력도 있으며, 동료나 부하를 통솔하는 보스기질도 유명하다. 거기에 비하면 노대통령은 개인기인 테니스의 미기에만 신경 쓰는 듯한 그런 타입이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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