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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회고-文酒 40년 <4>김대중과 브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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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회고-文酒 40년 <4>김대중과 브란트

“김 의원, 한국의 브란트가 되시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을 60년대부터 높이 평가했었지만 그 계보가 아니기 때문에 자주 자리를 같이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신문기자란 역시 사람을 만나는 운이 좋은 것이어서 기자로서 두 번 독대하여 식사할 기회가 있었다.

첫 번은 4.19 후 장면 내각때. 그는 국회의원이 아니면서도 집권 민주당의 대변인으로 있었다. 원외 인사이면서 집권당의 대변인을 맡을 수 있었다니…. 그것 하나로 그의 역량을 알 수 있다.

나는 4.19 후 제호를 바꾸어 새로 탄생한 민국일보의 정치부 기자였다. 외국어대학 교수로 있는 언론학자 정진석씨의 한국언론사를 보니까 제2공화국 시대의 대표적 언론으로 민국일보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민주당의 조세형 고문, MBC의 김중배 사장, 소설가 최일남씨 등도 같이 일했었다.

회사에서 통일정책 특집기획이 있어 김대중 대변인에게 좀 긴 시간의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랬더니 시청 옆의 로스구이집 ‘이학’에서 저녁을 하며 이야기하잔다. 약 세 시간쯤 걸렸을까. 나는 술도 곁들였지만 그는 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은 것같다. 김대중씨가 술을 즐긴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의 이야기들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일어서려니 흰 봉투 하나를 내밀며 술값이나 하란다. 나는 사양하며 나도 여유가 있다고 하였다. 물리적 시간은 1, 2분이지만 정신적 시간은 10여분은 되었을 것이다. 그의 표정이 굳어 갔다. 나 나름대로는 원외 대변인이라고 내가 봉투를 거절하는 것이라고 그가 서운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해석이 되었다. 그래서 받아 넣었다.

세월이 30여년 흘렀다. 나와 함께 조선일보에서 일했던 채영석 의원이 90년대 초 친상을 당해 서울대 병원 영안실에 갔다. 김대중씨도 왔었는데 같은 당원이라 그런지 예상보다 오래 머물렀다. 대여섯 명이 소주잔을 함께 하고 있었다.

물론 DJ는 소주를 입에 대지 않았다. 주당인 나는 적당히 들고. 그러자 DJ, "옛날에 내가 촌지를 주었어도 안 받은 사람이 남 의원이지“ 하고 옛날 옛적 이야기를 한다. 컴퓨터같다. 그 기억력이여! 오히려 두려운 느낌이다.

두 번째 독대는 60년대 후반 내가 조선일보 정치부에 있을 때다. 그 때 창간된 월간 ‘지성’잡지에 나는 YS는 보수파, DJ는 진보파라며 여러 가지 분석하는 글을 썼었다. 그랬더니 DJ는 주한 일본특파원단과의 만남에서 그 글 이야기를 하더니 얼마후 나를 만나잔다.

지금의 프레스센터 뒤에 한정식집에서 단둘이 만나 점심을 했는데 나는 반주를 마신 것으로 기억하나 DJ는 술에 입도 대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만남의 마지막에 나는 중요한 말을 했다. DJ가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김의원은 한국의 빌리 브란트가 되십시오.”

나는 DJ에 잘 보일 이유가 없다. 그러나 YS에서 DJ에의 이행은 문제는 있지만 역사의 일보 진전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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