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언론들은 지난 9월 11일 뉴욕과 워싱턴 D.C. 테러 사건 이후의 사태를 어떻게 보도하고 있는가? 이 문제는 이제 세계가 어떤 현실에 직면하게 될 것인가의 질문과 직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테러 사건의 성격으로부터 시작해서 미국인 일반의 생각, 부시 정권의 결정과 그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응에 이르기까지 언론들이 어떤 경향에 기울어질 것인가에 따라 사태 전개의 양상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9월 20일 미국 부시 대통령의 의회연설은 미국이 본격적인 ‘전쟁국가로서의 체제정비’에 들어가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개전(開戰) 선포”와 다를 바 없는 이날 연설을 통해 부시는 세 가지 메시지를 강조했다. 그것은 첫째, 아프가니스탄은 오사마 빈 라덴을 비롯한 테러 조직을 분쇄하는 일에 무조건 협력할 것. 그렇지 못하면 공격을 각오하라. 둘째, 국제사회는 미국의 반 테러 연합전선결성의 지휘체계에 속하라. 그렇지 않으면 테러지지로 간주할 것임. 셋째, 미국은 이제 준(準)전시 상태에 있음. 이에 따라 일체의 국가안보시스템을 “조국안보국(Office of Homeland Security)”을 중심으로 구성할 것임. 즉 공격 대상인 적을 규정하고, 미국의 전쟁선포에 대한 국제사회의 양단간 선택을 요구하며, 내부적으로는 대통령의 전시통제권 강화의지를 밝힌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이제 전쟁을 수행하는 작업을 중심으로 일체의 정치경제가 움직여 나가게 될 것을 뜻하는 것이다.
9월 11일 테러 사건이 있고 난 다음 언론보도의 문제는 다름 아닌 바로 이 ‘전쟁국가 체제 정비’의 사안과 관련해서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그 경향이 정리될 수 있다고 하겠다. 이를 정당하다고 여길 것인가, 아니면 비판적인 시각에서 문제를 제기하는가, 이 두 개의 논점을 축으로 그 사이에 존재 가능한 논의들을 살펴보면 미 언론들의 시선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사건 발생 직후 미 언론들의 보도는 사건의 충격성에 집중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건의 양상 자체가 예견할 수 없었던 것이었으며, 그것도 고도로 민감한 안보망의 보호 아래 있는 미국의 심장부에서 일어난 사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문은 물론이요, 방송은 정규프로그램을 거의 중단하다시피 하고 이 사건에 온통 매달리기 시작했다.
“미국 공격당하다 (America Under Attack)”라는 헤드 타이틀을 내건 초기 대부분 언론 보도의 내용은 무엇보다도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붕괴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희생자들의 규모에 대한 경악과 구조 문제에 대한 취재가 이어졌다. 다음 날에는 테러 사건으로 인한 뉴욕시 마비가 언론의 머리를 차지했고, 사건을 야기한 테러리스트가 누구인가로 점차 초점이 옮아갔으며, 사건 이틀째부터 이미 오사마 빈 라덴이 제1 유력 혐의자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일단 그를 지목하는 쪽으로 언론보도의 흐름이 정해지다시피 하자, 사태의 충격과 희생자들에 대한 슬픔은 분노로 변해가고 있음을 언론은 부각시켜 나갔다.
***처음엔 전쟁지지 우세**
이러한 상황에서 부시 대통령이 테러 사건을 ‘전쟁’ 또는 ‘전쟁행위’라는 말로 압축해서 강조하자, 언론의 분위기는 사건 자체보다는 미국 정부의 대응 방식이 전쟁이 될 것임을 기정사실화 하는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전쟁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거의 없었다. 이 시기 미국의 분위기와 언론의 논조를 분석한 영국 가디안의 워싱턴 특파원 매튜 엥겔은 “미국 사회, 전쟁지지 분위기가 휩쓸면서 이론(異論)을 제기할 수 없는 분위기로 치닫다(No room for Dissent as Spirit of Flagwaving Sweeps the Nation)”라는 제목의 기사를 런던으로 타전했다. 그는 이 기사를 통해 전쟁에 대한 일사불란한 결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거의 반역죄(treachery)에 가까운 것으로 간주되는 분위기라고 보도했다.
사건 발생 3일만에, “테러에 대한 대응은 곧 전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미국의 현실 앞에서 이의를 제기한 언론은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 외에 하나도 없었다.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는 사건 발생 직후, 현재 미국이 해야 할 일은 사건 현장의 구조작업과 복구, 그리고 도시 기능의 정상회복이며 테러에 대한 대응이 전쟁으로 이어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사실 이러한 논조는 당시 격양된 분위기에서는 좀체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미국 언론들의 당시 흐름에 대해서 캐나다의 유력지 터론토 스타는 즉각 비판적인 논조를 밝혔다. 이 신문은 부시 대통령이 미국을 전쟁 쪽으로 몰고 가고 있으며, 언론들도 이에 대해서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비판을 했던 것이다. 이 신문은 부시 대통령이 “전쟁”, “전쟁행위”, “십자군” 등의 단어를 사용하면서 대응방식의 선택을 전쟁으로 결론짓는 것에 대해 미국 언론들이 무비판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지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 언론의 현실은 이러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시기적으로도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 그런 입장을 취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소수였다.
사건발생 1주일이 지나면서 초기의 충격과 흥분이 다소 가라앉자, 전쟁문제에 대한 논의가 서서히 수면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물론 언론의 대세는 전쟁지지 쪽이었다. 뉴욕 타임즈를 비롯하여 워싱턴 포스트 등, 미국의 여론을 좌우하는 양대 유력지 모두, “부시 대통령이 이제 대통령으로서의 임무와 책임, 그리고 권위를 발휘하는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하면서 지금부터 부시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전쟁수행과 관련하여 그가 어떤 역할과 능력을 보일 것인가에 있다고 강조했다.
당선 당시 개표와 관련하여 정통성의 문제에 논란이 있었던 부시 대통령에 대해서 가장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했던 뉴욕 타임즈가 전쟁 수행에 임한 미국의 최고 지휘자로서 부시를 인정하는 발언이었다는 점에서 부시 정권은 뉴욕 타임즈의 전폭적인 지지를 획득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들 양대 신문은 테러 대응이 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에 대해 다소간 신중한 논조를 매우 조심스럽게 내놓기 시작했다.
신중론의 논리는 “미국이 세계적으로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도 돌아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전쟁을 일단 시작하면 예견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러니 좀더 준비된 대응이 필요하지 않는가”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논조는 부시 정권의 전쟁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보도의 비중도 미미하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사건 이후 미 언론들은 헤드 타이틀을 신문 전면에 걸쳐 대서특필하는 방식으로 현 시국이 비상사태임을 알려왔으며, 이제 전쟁 이외의 대안은 생각하기 어렵고 관심의 초점은 전쟁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언제 공격 명령이 내려질 것인가로 모아졌다.
***시간 지나면 신중론 고개 들어**
그러나, 테러 참사 희생자 추모 행사에 이어 반전 평화시위가 미약하나마 목소리를 내고, 적극 지원에 나설 것으로 보았던 유럽국가들이 조건을 내걸면서 이른바 신중론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아지기 시작했다. 뉴욕 맨해튼 유니온 스퀘어 파크의 추모 행사장에서 반전 평화 구호가 훨씬 많이 등장했고, 미국의 두뇌라고 할 수 있는 보스턴에서 하버드 대학, 보스턴 컬리지등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반전 평화시위가 벌어지자 그 동안 숨죽이고 있던, 또는 진보적 매체 외에는 듣기 쉽지 않았던 육성들이 언론에 모습을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비판은 첫째, 전쟁은 찬성하지만 그 방식은 어디까지나 신중을 기해야 한다와, 둘째 전쟁 자체에 대한 반대로 나뉘었다. 전자를 신중론이라고 한다면, 후자를 미국 책임 자성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신중론의 초점은 전쟁수행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준비가 보다 철저해야 한다는 것에 있다면, 미국 책임 자성론은 미국의 대외정책이 가진 오만과 패권주의가 테러를 자초했다는 것에 그 주안점이 있다. 참고로, 국내 언론의 이른바 신중론 보도는 후자의 자성론, 즉 미국 자신의 자기 비판이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다는 약점을 안고 있다.
신중론의 틀은 유럽의 문제제기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유럽은 미국의 보복 전쟁 수행의 정당성을 전폭 인정하고 지지하면서도, 대 테러 연합전선 결성과 전쟁 수행에 대해서 네 가지 조건을 내놓았던 것이다. 첫째, 미국의 독자적 행동을 그대로 따르는 방식은 받아들일 수 없다. 반드시 국제적 논의구조 속에서 전쟁수행의 틀을 짤 것. 둘째, 오사마 빈 라덴의 범행임을 입증할 수 있는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증거가 필요하다. 셋째, 테러 조직 근거지에 대한 정확한 목표를 설정할 것과 무고한 민간인 희생을 막을 수 있는 보장이 있어야 한다. 넷째, 유엔의 지지를 확보하라. 이러한 조건은 미국의 전쟁 수행에 있어서 국제사회의 지지 협력을 획득하는 과정이 보다 치밀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조건을 갖추지 못할 경우 매우 어려운 상황에 빠질 수 있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뉴욕 타임즈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22일 사설에서, 외교적 기반을 보다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군사행동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고 나섰다. 보복 전쟁의 정당성은 인정하면서, 군사행동에만 의존하는 방식의 위험성을 제기한 것이었다. 뉴욕 타임즈가 이러한 논조를 취하면서, 다른 언론들도 강력한 행동을 통한 지도력을 입증해야 할 것이라는 식의 단선논리에서 벗어나 장기적인 전쟁체제를 위해서는 보다 정교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쪽으로 기울어갔다. 전쟁결정은 돌이킬 수 없으나, 제대로 하자는 것이다.“군사행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Military action alone does not work.)”라는 논리는 결국 다른 결정들은 군사행동의 정당성과 효율성을 위해 봉사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중론과 미국 책임 자성론**
현재 미국 책임 자성론은 대세에 서 있지 않다. 그러나 양대 유력지에 버금가는 L.A 타임즈를 비롯하여 보스턴 글로브를 비롯하여 진보적 매체들은 테러를 불러온 책임이 미국 자신에게 있지 않은가 돌아봐야 하며, 테러 발생의 근본을 척결하는 노력, 즉 미국의 대외정책 노선 수정이 필요하다는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L.A 타임즈는 지난해 4월 찰머스 존슨이 쓴 기고문 “미국인들 미국 대외 정책의 역풍에 직면”을 다시 게재하면서, 미국이 현재와 같은 제국적 행동방식을 유지하는 한, 이에 대한 세계적 반발로서의 역풍은 중단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보스턴 글로브는 베트남 반전운동 세대를 비롯하여, 이번 사태에 대한 대응으로 전쟁을 선택한 부시 정권의 정책에 반기를 든 반전평화 운동이 성장 추세에 있다는 기사를 관심 깊게 실었으며, 이 신문의 칼럼니스트 조나단 파워는 미국이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 미국의 대외정책이 가지고 있는 오만을 수정하는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면서, 이를 위해 군사행동보다 언론의 위력이 더욱 강함을 입증해나가야 할 것(their pens could become mightier than America' sword.)이라고 강조했다.
인터내셔날 헤랄드 트리뷴의 대표적 칼럼니스트 윌리암 파프(William Pfaff)는 이번 사태의 대응은 경찰과 정보기관의 관할 사안이지 군사행동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면서 그렇게 될 경우, 이슬람 문명권의 혁명적 결속을 가져오는 사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진보적 역사학자이자 그 자신이 반전평화운동가이기도 한 하워드 진은 진보적 매체인 프로그레시브(Progressive)의 기고문을 통해, 미국의 국가테러가 제3세계의 억압과 빈곤을 불러 온 역사적 원인에 주목해야 하며 폭력의 악순환을 가져올 전쟁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부를 새롭게 사용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체제의 경제적 불균형을 개선해나가는 일에 미국의 지도적 역할이 발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현재 미 언론의 보도 태도는 기본적으로 전쟁지지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자성론의 힘은 전쟁의 전개과정에서 차차 여론의 대세를 얻어갈 것임을 미국의 역사는 예견케 한다. 베트남 전쟁의 경험은 미국 사회 내에 반전평화운동의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베트남 전쟁 반대에 나섰던 미 상원의원 웨인 모스(Wayne Morse)에 대한 언론 비평가 노만 솔로몬의 주목은 의미 있다. 웨인 모스는 통킹만 사건으로 격노한 미국 사회의 분위기에 따라 베트남 전쟁 전면개입과 대통령의 전쟁지휘권을 대폭 강화시킨 1964년 8월의 상원의 결정에 반기를 들었던 두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그의 반대는 여론의 포화 속에서 그를 정치적 고립으로 몰아갔고, 결국 그 다음 선거에서 그에게 패배를 안겨다 주었다.
그러나, 1968년 2월, 미국의 베트남 전쟁개입 과오가 검토되기 시작한 상원의 대외정책 위원회의 현실은 그의 목소리가 역사의 새로운 대세가 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미국의 개전 선포, 이것은 현재 대세를 장악하는 바이지만 결국 미국의 패권체제가 쇠퇴해 가는 마지막 고비의 사건이 될 것을 예감케 한다.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 민중과의 전쟁으로 그쳤어도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이슬람 문명권 전체와의 대결을 각오해야 할지 모르며, 지난 2차대전 종식 이후 미국이 자초하여 씨를 뿌린 반미(反美)운동의 현실을 감당해야 할 뿐만 아니라 지난 시기와 비교해서 미국의 세계적 지도력의 한계가 분명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제 미국의 부시정권은 이러한 현실을 정직하게 직시하여 자신의 진로를 바르게 선택하지 못하면, 지금 전쟁 지지를 표명하고 있는 바로 그 언론으로부터 향후 매우 신랄한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운명을 피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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