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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이 다르다? 정치·경제적 준비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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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이 다르다? 정치·경제적 준비는 끝났다

[복지국가SOCIETY] 한국의 정치·경제적 조건과 복지국가 발전

한국은 복지국가의 초기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제 한국은 앞으로 보다 포괄적인 복지국가로 발전할 것인지, 아니면 보다 제한적인 복지국가로 머물 것인지를 둘러싼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복지국가의 포괄성에 대한 선택은 기본적으로 국민 개개인들의 가치 판단과 정치적 종합 과정의 문제이다. 하지만 동시에 국민 개개인들의 판단은 한국 사회가 가진 정치·경제적 조건들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복지국가의 발전이란 측면에서 한국 사회가 어떤 정치·경제적 조건들을 가졌는지를 검토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국 사회가 처한 제반 여건들을 경제적 측면, 정치적 측면, 그리고 역사·지리적 측면으로 나누어, 한국 사회가 복지국가의 발전과 관련하여 어떠한 조건 위에 있는가를 검토해 보자.

복지국가의 발달에 영향을 주는 경제적 조건들

복지국가의 발달에 영향을 주는 주요 경제적 조건들로는 경제 발전의 수준, 산업화와 도시화의 진행 정도, 소득 불평등과 사회 이동성, 그리고 경제 개방성 등이 있다. 경제 발전 수준과 관련하여,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자원이 필요하므로 일정한 수준의 경제 발전은 복지국가 건설에 필수적인 조건이다. 과거에 한국은 개발도상국으로서 복지 지출을 위한 경제적 여력이 없어 복지국가를 형성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동안의 경제 발전으로 이제 한국은 2011년 구매력 조정된 일 인당 GDP 수준이 2만9785달러로서 OECD 회원국 중에서 22위에 랭크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경제 발전 수준이 너무 미약해서 복지를 실시하지 못한다는 주장을 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경제가 더 발전할 것이라고 가정하면 경제 발전 수준의 문제는 이제 한국의 복지국가 발전에 큰 제약 요인으로 작용하리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동안의 경제 성장의 이면에 누적되어온 빈곤 등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복지국가가 개입할 필요성이 더 커졌다.

유사한 맥락에서 산업화와 도시화는 복지국가의 발전에 필수적인 토대이다. 한국의 2012년 현재 취업자의 산업별 구성을 보면, 농업 부문 6.2%, 산업 부문 24.5%, 그리고 서비스 부문 69.3%이다. 2009년 OECD 국가들의 취업자의 산업별 평균적 구성을 보면, 농업 부문 5.0%, 산업 부문 22.9%, 서비스 부문 72.1%이다. 한국과 OECD 국가들의 평균적 구성이 거의 유사하다. 산업화와 도시화의 진행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의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조건은 이미 오래 전에 형성되었다고 봐야 한다.

소득 불평등과 사회 이동성 측면에서 소득이 평등하고 사회 이동성이 크면 상대적으로 복지에 대한 욕구가 작을 것으로 가정된다. 한국의 경우 일제 강점과 해방, 그리고 6.25 전쟁을 겪으면서 과거의 계급 및 계층 체제가 무너져 상당히 평등한 사회가 되었다. 이후 경제 성장의 과정에서도 한국은 OECD 국가들보다 소득 분배가 상당히 평등하였다. 하지만 IMF 위기 이후 소득 분배가 상당히 불평등해졌다. 소득의 양극화와 노동 시장의 양극화에 따른 중산층의 감소가 주요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해 있다. 세계화와 탈산업화의 흐름 위에서 앞으로 불평등과 사회 계층의 고착 문제는 점점 더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은 소득 불평등의 증가와 고착화는 복지 확대 욕구를 증가시켜 복지국가 발전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한다.

▲ IMF 구제금융 위기 이후 실업사태가 본격화하면서 거리로 내몰린 실직자들이 낮이면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 사회 단체들이 제공하는 무료 급식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밤이 되면 지하철 통로에 노숙을 하고 있다(1998년 6월 22일). ⓒ연합뉴스

경제 개방성의 측면에서 경제 개방성이 큰 나라의 국민들은 외부 충격에 따른 생활 불안정성이 커서 복지국가를 통한 생활 안정의 욕구가 크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내수 시장이 큰 내수 중심의 국가들보다 외부 시장에 크게 의존하는 국가들에서 복지 지출이 더 크다. 한국은 현재 OECD 국가 중에서 GDP 대비 수출의 비중이 1위, 그리고 GDP 대비 수입의 비중도 1위로서 경제 개방도가 아주 높은 나라이다. 한국의 이렇게 높은 경제 개방도는 외부 충격에 따른 생활 불안정을 야기하여 복지국가에 대한 욕구를 높인다. 이처럼 경제적 조건의 측면에서 한국은 대체로 복지국가 발전에 유리한 조건들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복지국가의 발달에 영향을 주는 정치적 조건들

다음으로 정치적 조건의 측면에서 한국이 처한 상황들을 살펴보자. 정치적 측면에서 연방제, 거부권 지점의 수, 선거 제도, 노동계급의 힘, 그리고 정당의 성격 등이 복지국가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요인들로 제기되어 왔다. 일반적으로 연방제 체제를 가진 국가들은 지방 정부들의 반대로 전국적 차원의 복지 체계를 형성하기 어렵다. 정치 제도상 권력이 분산되어 있어 새로운 정책 도입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점들이 많은 경우에도 복지 체계를 발전시키기 어렵다. 한국의 경우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중앙 집중적 정치 체계를 형성해 왔다. 그러므로 한국의 경우에는 연방제와 거부권 지점의 수란 측면에서 새로운 복지 입법 도입에 유리한 정치 체계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선거 제도, 노동계급의 힘, 그리고 정당 성격 측면에서 복지국가 건설에 불리한 조건들을 가졌다. 선거 제도가 비례대표제인 경우 의회가 전국적 정책 이슈에 집중하여 복지국가가 발전하는 반면, 다수 득표제인 경우에는 국회의원들이 자기 지역구의 지역 현안 챙기기에 급급하여 전국적 차원의 복지 정책 발전에 불리하다. 또한 노동조합이 기업별 노조로 구축된 경우 산업별 노조 체계에 비해 노동조합이 기업 내 노동자들의 자기 이해관계에만 집중하여 전국적 복지정책의 발전이 어렵다. 그리고 노동자 계급을 대변하는 노동당 또는 사회민주당의 힘이 약한 경우 포괄적 복지국가 건설에 불리하다.

한국의 경우를 보면, 선거 제도가 다수 득표제에 기반하여 국회의원들이 지역구의 지역현안 챙기기에 급급하여 지역이기주의가 만연하고, 노동조합이 기업별 노조 체계로 조직화되어 전국적 복지 정책보다는 기업 내 노동자들의 편협한 자기 이익 챙기기에만 급급하다. 또한 정당도 노동자를 대표하는 노동당이나 사회민주당은 뿌리를 내리지 못해왔다. 이와 같은 정치 제도적 조건들은 한국의 복지국가 발전에 불리한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 지난해 11월 16일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에서 경제 민주화 공약을 발표하는 박근혜 대통령.. ⓒ연합뉴스

복지국가의 발달에 영향을 주는 역사·지리적 조건들

마지막으로 역사·지리적 측면에서 한국이 처한 상황들을 살펴보자. 역사·지리적 측면에서 인종 이질성, 전쟁 경험, 주변 국가들에 비한 상대적 국력, 지리적 분산 등이 복지국가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요인으로 제기된다. 인종 이질성이 큰 사회는 국민들 간의 통합이 어려워 전국적 차원의 복지 정책을 펴기 어렵다. 국가 간의 인종적 동일성 정도를 비교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은 인종적 동일성 지수 값이 세계 1위로, 세계에서 가장 인종적 동일성이 높은 나라이다. 이처럼 높은 인종적 동일성은 한국 국민들의 강한 응집력과 평등 의식으로 나타나 복지국가 발전에 아주 유리한 조건을 형성한다.

전쟁 경험은 두 가지 방향에서 작용할 수 있다. 외침을 받은 경험은 국민들의 단결력을 강화시켜 복지국가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내전의 경험은 국민들을 분열시켜 복지국가에 불리한 조건으로 작용한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 일본 등으로부터 임진왜란, 병자호란, 청일전쟁, 일제 강점 등의 수많은 외침을 받아왔다. 이처럼 외침을 받은 경험은 한민족의 민족 의식을 높이고, 국민적 단결력을 강화시켜 복지국가의 발전에 유리한 토양을 제공한다.

하지만 한국은 분단과 6.25 전쟁을 통하여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는 극심한 내전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그 내전을 직접 경험한 세대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다. 물론 남북이 각각 독립된 국가를 형성함으로써 남한 내부에서는 상대적으로 동질성이 크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남한 내부에서도 내전의 여파로 인하여 타인에 대한 불신이 크고 좌파적 이념에 대한 적대감이 크다. 그래서 한국의 오랜 역사적 외침 경험은 국민적 단결을 강화시켜 복지국가의 발전에 유리한 토양을 제공하는 반면, 내전의 경험은 국민적 분열을 야기하여 복지국가 발전에 불리한 조건을 제공한다.

외침을 받은 경험과 관련하여 주변 국가들에 비한 상대적 국력의 정도도 복지국가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주변 국가보다 상대적 국력이 약한 경우 국민적 단결력이 커져 복지국가 발전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이라는 세계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끼여 상대적 국력이 작은 나라이다. 이러한 지정학적 조건은 한국 국민들의 국민적 단합을 제고하여 복지국가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한다.

지리적 분산도가 큰 나라의 경우 지방에서의 노동자 파업과 같은 사건들이 중앙 정치에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 반면, 지리적 분산도가 작은 나라의 경우 노동자 파업은 중앙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래서 지리적 분산이 작은 나라가 복지국가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가졌다. 한국의 경우 국토 면적이 좁고 인구 밀도가 높으며, 무엇보다도 수도 집중도가 아주 높다. 결국, 한국은 지리적 분산이 작고 수도 집중도가 높아서 노동자들의 시위 등이 중앙 정치에 영향을 미치기 아주 쉬운 구조를 가졌다. 이러한 지리적 구조는 복지국가의 발달에 유리한 조건을 제시한다.

그래서 한국의 역사·지리적 조건들은 대체로 복지국가 발전에 아주 유리한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한국의 분단과 6.25 전쟁이라는 내전 경험은 국민적 통합성을 저해하여 복지국가 발전에 불리한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분단과 내전에서 비롯된 분열을 치유하고 통합적 복지국가의 길로 나아가야

전체적으로 한국 사회가 처한 경제적 조건, 정치적 조건, 그리고 역사·지리적 조건들에 대한 지금까지의 검토를 종합해 보면, 경제적 조건들은 복지국가 발달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정치적 조건들은 중앙집권적 정치 체계라는 측면에서는 복지국가 발달에 유리하지만, 다수 득표제에 기반을 둔 선거 제도, 기업별 노조 체계, 그리고 노동자 정당의 미발달은 복지국가 발전에 불리한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역사·지리적 측면에서도 인종적 동질성이나 외침 경험, 상대적 국력, 지리적 분산 등의 측면에서 국민적 응집성을 높여 복지국가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분단과 6.25라는 내전의 경험은 국민적 분열을 야기하여 복지국가에 불리한 조건을 제공하고 있다.

이상에서의 검토 결과는 분단과 6.25라는 내전이 한국의 복지국가 발달에서 차지하는 의미에 대해 다시금 더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 정치 제도는 외생적으로 주어진 요인이라기보다는 주어진 역사적 조건 위에서 국민들의 선택으로 형성되는 내생적 요인이다. 정치적 요인 중 다수 득표제 선거 체계, 기업별 노조 체계, 그리고 노동자 정당 미발달 등의 복지국가 발달에 불리한 정치적 제도 조건들은 그 뿌리가 한국의 분단과 내전에 있다. 분단과 내전은 좌파적 이념과 세력에 대해 적대적인 조건을 형성함으로써, 노동자 계급이 주도하는 전국적 정치 제도들의 형성을 어렵게 했다.

결국, 앞으로 한국이 포괄적 복지국가로 발달해 나가는 데 가장 큰 과제는 어떻게 분단과 내전에서 비롯된 국민적 분열을 치유하고 통합해 나가는가에 있다. 우선은 남한 내부에서, 그다음 남한과 북한 간에 분단과 내전의 상처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 한국은 복지국가 발달에 유리한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역사·지리적 조건들을 많이 가졌다. 그러나 분단과 내전의 상처는 한국 복지국가 발달에 '아킬레스건'이다. 한국의 복지국가 발달에서 결국 분단과 내전의 상처를 어떻게 극복하고 국민적 통합을 달성하는가가 주요한 과제로 대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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