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만물이 의지만으로 소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물의 소생을 위해서는 충분한 햇빛과 물, 공기, 적절한 영양분 등이 필요하다. 장애인이 자신의 삶에 싹을 틔우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충분한 햇빛과 물 등의 적정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그렇다면 새로 들어선 박근혜 정부는 장애인을 위한 적정 환경으로 어떤 비전과 정책을 제시하고 있을까?
진정성이 의심되는 박근혜 대통령의 장애인 복지 공약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 대선 중반까지 장애인 복지와 관련하여 어떤 비전도 제시하지 못했다. 박근혜 후보는 국민기초생활보장 제도에서 노인·장애인 등 근로무능력자로 구성된 가구에 대한 부양 의무자 기준 완화라는 한 가지 공약만을 제시했다. 이는 안철수 후보의 19대 장애인 복지 공약과 문재인 후보의 5대 장애인 복지 공약과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안철수 후보의 사퇴 이후, 박근혜 후보의 최종 공약집에서는 19대 장애인 복지 공약으로 공약의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당시 박근혜 후보의 장애인 복지 공약은 기존에 발표된 안철수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장애인 복지 공약을 적당히 합쳐서 그대로 제시하거나, 약간의 변형을 가하여 제시한 것들이다. 장애인 등급제 개선 보완, 장애인 활동 지원 24시간 보장, 장애인 연금의 부가 급여 현실화 등은 야권 후보의 것을 거의 그대로 베꼈다. 장애인 연금의 기초연금화 및 국민연금과 통합 운영, 기초연금 도입 즉시 중증 장애인에게 현재의 2배 급여 지급 등은 두 후보의 정책에 변형을 가한 것이다. 공공 부문부터 장애인 의무 고용 비율을 달성하기 위해 중증 장애인을 고용할 경우 인센티브를 부여한 정책도 이에 해당한다.
물론 좋은 정책이 후보 간에 같다고 문제가 되진 않는다. 좋은 정책이라면 오히려 베끼지 않는 것이 문제다. 근본적인 문제는 박근혜 후보가 자신의 장애인 복지 정책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제대로 했는지에 대한 진정성이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장애인 연금은 표현만 연금일 뿐 제도의 내용상 연금의 성격을 띠지 않는다. 장애인 연금은 중증 장애인 중 빈곤한 장애인에게 기초 소득 보장으로 9만4600원, 장애수당으로 2만-15만 원을 주는 제도로 은퇴 후 소득을 보장하기 위한 연금과는 성격이 다르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 "장애인 연금을 기초연금화하고 국민연금과 통합 운영함으로써 사각지대나 재정 불안정이 없는 행복한 연금 제도로 개편"하겠다고 했다. 장애인 연금은 일반 조세로 운영되는 제도이기 때문에 재정 불안정에 대한 말이 나오기 어렵다. 오히려 국민연금과 통합 운영하게 되면 재정 불안정이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사각지대 문제 역시 공공부조 방식의 장애인 연금을 보편 수당으로 전환하지 않고는 해결하기 어렵다. 장애인 연금을 기초연금화하여 국민연금과 통합 운영하겠다고 하는 것은 제도의 명칭만 고려한 처사이지 제도의 내용을 고려한 대안이라 보기 어렵다.
이뿐이 아니다. 장애인 고용 보장 정책 역시 안 후보나 문 후보의 최저임금 보장이나 고용 시 기본적 소득 보장과 같은 공약은 제시하지 않았다. "공공 부문에서 장애인 의무 고용 비율을 달성하도록 중증 장애인 등의 고용 시에 인센티브를 부여"하겠다는 공약만 제시했다. 이미 중증 장애인 고용에 대해서는 고용 비율 산정 시 두 배로 계산하는 인센티브 부여 산식이 있다. 인센티브 방식의 제도가 있는데도 중증 장애인은 인구 대비 취업자의 비율이 16.32%로 매우 낮다.
또한 취업한 장애인의 임금 수준도 100만 원 미만이 53.4%에 이를 정도로 심각하고(2010 중증 장애인 생활실태조사), 중증 장애인이 많이 취업하고 있는 보호 작업장의 월 평균 임금은 26만 원에 불과하다(한국장애인개발원 직업재활시설 실태조사). 그러므로 단순한 인센티브 제도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OECD 국가 대부분이 중증 장애인의 고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센티브 방식이 아니라 중증 장애인 고용 시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보조금 고용' 제도를 시행하고, 고용 할당제의 벌금 제도를 강력하게 시행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적어도 한 국가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어떤 분야의 공약을 제시할 때는 그 분야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언뜻 보기에 그럴싸한 정책만으로 한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현실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진단하고, 원인을 올바르게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박근혜 정부의 장애인 복지 정책에 대한 전망과 기대
▲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계동 보건복지부 앞에서 열린 '4·20공동투쟁단 복지부 장관 면담 촉구 기자회견'에서 장애인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뉴시스 |
다른 한편으로는 인수위원회의 장애인 복지 공약은 장애인계에서 중시하는 몇 가지 중요한 의제들을 포함하고 있어 반갑기도 하다. 그중 하나가 '개인의 욕구와 사회·환경적 요인을 반영한 장애 판정 체계로 단계적 개선'을 국정 과제로 제안하고 있다는 점이다. 장애인계가 대선 국면에서 가장 중요하게 제기했던 문제는 일괄적인 장애 등급제를 폐지하고 개별화된 판정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장애 판정 체계의 단계적 개선으로 화답하고 있다.
장애 판정 체계의 개편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현행 장애 종류별 1-6급으로 일률적으로 등급을 나누고 서비스 역시 등급에 따라 일률적으로 이루어지던 시스템을, 개인의 욕구에 기반하여 장애 판정을 하고, 이를 기반으로 다시 개별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것은 일대 혁신을 전제한다. 개별 사례 관리와 개별 서비스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판정 체계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와 조사, 사례 관리를 위한 상당한 인력의 확충, 서비스의 다양화를 위한 각종 노력 등이 이루어져야 하고, 이는 곧 상당한 시간과 재원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은 증세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할 것이다. 증세 없는 복지 확충을 제안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지 두고 볼 일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만물이 소생한다는 봄이 사라진 듯하다. 봄은 한가운데까지 나아갔는데도 여전히 겨울옷을 입어야 할 만큼 춥기만 하다. 장애인의 재활과 소생을 바라는 장애인의 날, 장애인의 삶이 요즘 날씨처럼 춥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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