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누출 사건에서 삼성전자엔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을까. 사건 수사 과정에서 핵심적으로 밝혀져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전·현직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의 증언을 듣고 전문가의 견해를 물었다. (☞ 관련 기사 : "삼성 반도체 공장, 독가스 새도 계속 일했다")
협력사엔 어느 정도의 자율성이 있나?
피해자 보상 문제에 대해 삼성전자 관계자는 "협력사와 당사자의 문제이고 삼성전자는 제3자"라며 "만약 유가족이 보상을 요구한다면 법대로 처리하겠다"고 <프레시안>과 한 통화에서 밝힌 바 있다. 삼성전자의 안전 관리 책임에 대해서는 "경찰 수사 결과에 따를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렇다면 협력사는 업무 결정에서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가지고 있을까. 최근까지 삼성전자 반도체 화성사업장에서 일하다 퇴사한 A 씨는 <프레시안>과 한 통화에서 "공정과 관계가 있는 모든 일은 무조건 삼성전자에 보고해야 한다"며 "어떤 협력사 직원을 어디로 몇 명 투입했다는 보고가 삼성전자에 올라간다"고 말했다. 또 다른 현직 화성사업장 협력업체 노동자 B 씨는 "사건 사고가 있거나, 위험한 공간에서 작업한다면 무조건 삼성 쪽에 보고하고 승인받게 돼 있다"고 말했다.
사건으로 돌아가 보자. 협력업체인 STI서비스 노동자들이 탱크 하부 밸브에서 불산이 누출된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한 때는 지난달 27일 오후 1시 22분. 한정애 민주통합당 의원에 따르면, 당시 협력업체 근무자들은 삼성전자에 '밸브 교체가 필요하다'고 보고했지만 삼성전자 안전관리팀은 밸브 교체를 다음날로 미루자고 지시했다.
▲ 1월 27일 삼성전자 반도체 화성사업장에서 불산 가스가 누출돼 협력사 직원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한 가운데 불산 누출 사고 현장이 공개됐다. ⓒ뉴시스 |
불산 탱크는 왜 10시간 가까이 방치됐나?
불산 탱크는 적어도 10시간 가까이 누출된 채 방치됐다. 이 시간 동안 불산이 얼마나 누출됐는지는 불분명하다. 지난달 27일 밤 11시부터 현장에 투입됐던 박모(33) 씨는 "오후 근무자들이 수차례 불산 비닐 봉투를 교체했다"며 "야간 근무자들은 밸브를 교체하는 동안 불산이 찬 비닐 봉투를 폐기하려고 2회 밖으로 가지고 나왔고 누출된 불산 일부를 바닥에 흘렸다"고 증언했다.
만약 삼성전자가 사고를 발견한 즉시 탱크 가동을 멈추고 밸브를 교체하기로 결정했다면 불산 누출량은 현저하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삼성전자는 왜 밸브 교체 시기를 하루 미뤘을까.
삼성전자는 사고 발견 당시 공장을 정상 가동하고 있었고, 불산이 누출되는 밸브는 탱크 아랫부분에 있었다. 밸브를 교체하려면 탱크 안의 불산을 모두 비워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밸브를 빼자마자 탱크 안의 불산이 대량 뿜어져 나왔을 것이다. 선택은 둘 중 하나다. 불산을 모두 제거하고 즉시 밸브 교체 작업을 시작하거나, 아니면 라인에서 불산을 전부 사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2007년 삼성전자 반도체 협력업체에서 일했다가 지금은 외국의 화학물질 관련 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C 씨는 "통상적인 경우 소량의 누출을 발견했을 때 탱크를 비우기로 결정하기란 쉽지 않다"며 "화학물질도 (비용이 드는) 원재료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삼성전자가 불산이 라인에서 모두 소진될 때까지 사고 처치를 늦추기로 결정했다고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작업 전에 탱크·배관에 있는 불산을 다 비웠나?
탱크를 비우더라도 배관에 남아 있는 불산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는 문제가 남는다. 배관 안의 압력으로 불산이 비산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산업안전기준 규칙 제92조에는 "사업주는 기계·기구 및 설비 등의 내부에 압축된 기체 또는 액체 등이 방출되어 근로자가 위험해질 우려가 있는 경우에 압축된 기체 또는 액체 등을 미리 방출시켜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백도명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는 "탱크가 라인 끝에 있다면 여러 단계 지점에서 밸브가 있었을 것"이라며 "밸브를 이중·삼중으로 막아놓고 탱크와 배관 안에 있는 불산을 다 비운 상태에서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번 사고에서 협력업체 노동자들은 불산이 누출되는 상황에서 작업에 들어갔다. 백 교수는 "협력업체 직원들은 삼성의 스케줄에 따라 정해진 방식으로 정비나 보수 작업을 한다"며 "짧은 시간 안에 보수 작업을 끝내려다 보니 배관 안에 있는 불산을 막지 못하고 불산이 뚝뚝 흘러내리는 상태에서 작업에 돌입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백 교수는 "예를 들어 (반도체 공정 내) 특정 장비를 열기 전에는 충분히 환기를 시켜서 장비 안에 있는 화학물질을 날려버려야 한다"며 "그러나 환기는 20분 이상 걸리는데 30분 정도 걸리는 작업까지 포함해 총 40분 이내로 마쳐야 한다면 작업자들이 환기를 충분히 하지 못하고 장비를 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배관의 불산을 제거하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C 씨는 "이번 사고처럼 탱크와 장비로 이어진 배관은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화학물질을 제거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며 "완벽하게 제거하려면 질소 압력을 이용해야 하는데, 시간은 잔량에 따라 달라지지만 1시간 내외로 작업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불산 누출 피해자들이 배관의 불산 제거 작업을 시도했는지 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백 교수는 "물론 보수나 정비 작업에 외주를 줬긴 하지만, 사내 하청은 스케줄과 작업 방식에서 원청의 1차적인 지휘명령을 받는다"며 "특정 시간 내에 특정한 환경에서 특정한 작업을 하도록 지시하고 허용한 것은 원청"이라고 말했다.
▲ 1월 29일 경기도 삼성전자 반도체 화성사업장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환경부 공무원, 경기소방재난본부 등으로 구성된 합동 감식반이 현장감식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
피해자들은 안전 장구를 적절하게 공급받았나?
삼성전자는 사건 초기 "작업자 5명 가운데 박 씨만 방제복을 입지 않아 사망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협력업체 노동자들은 "방제복과 방진복, 방독면 등 안전 복장은 삼성전자가 공급한다"고 증언했다.
지금은 퇴사한 A 씨는 지난해 퇴사 직전까지 삼성전자가 방제복, 방진복 등을 제공해서 모든 협력사 노동자가 공통으로 썼다고 말했다. 그는 "삼성전자 정직원은 자기 이름이 달린 방진복이 있지만, 협력사 직원들은 삼성전자가 비치해두면 자기에게 맞는 사이즈를 아무거나 골라 입었다"고 설명했다.
고(故) 박모(34) 씨는 지난달 28일 새벽 0시 13분부터 3시 21분까지 내산 가운과 방독면을 쓰고 1차 밸브 교체 작업을 마쳤으나, 내산 장갑 안이 불산에 노출돼 손가락 통증을 호소했다. 귀가하고 새벽 4시 36분에 다시 호출된 고인은 4시 44분까지 8분간 방산복을 입지 못한 채 작업에 재투입됐다. 4시 45분부터 고인은 다른 근무자가 구해온 방산복으로 갈아입고 오전 7시 45분까지 3시간가량 보수 작업을 했다.
작업에 투입된 불산 누출 피해자들이 적절한 방제복을 지급받았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 피해자들은 "사고 당시 화학약품을 막아주는 방산복, 방제복이 아니라 방진복을 입었다"고 주장했고, 삼성전자 측은 "당시 작업자들이 입은 옷은 방산복이 맞다"고 맞서고 있다. 화성동부경찰서 관계자는 <프레시안>과 한 통화에서 "작업장 CCTV 화면에 노란 옷과 흰옷을 입은 작업자들이 섞여 나온다"고 말했다. 노란 옷은 방산복으로 추정되나, 흰옷이 방산복인지 방진복인지는 알 수 없다.
이전까지 삼성전자 측이 협력업체 노동자들에게 방진복을 공용으로 제공했다가, 불산 사고 직후 '1인 1복'으로 제공 방식을 바꿨다는 증언도 나왔다. 화성사업장에서 일하는 현직 협력업체 노동자 B 씨는 "삼성전자가 (사고 직후인) 1월 말부터 협력업체 직원에게는 파란색, 삼성전자 임직원에게는 하얀색 방진복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바꿨다"며 "협력업체 직원에게 한 사람당 한 개씩 이름표를 달 수 있도록 방진복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그는 "오염도가 높은 곳에서 산과 같은 화학약품을 만지는 직원들은 오렌지색 옷을 입는데 그게 방산복일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방독면 관리가 허술할 수 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C 씨는 "방독면 카트리지는 유기용과 무기용이 있는데, 불산 작업 시 유기용 카트리지를 끼우고 작업했다면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적절한 카트리지를 끼웠더라도 외국에서는 통상 카트리지의 한계를 30-40분 정도로 잡는다"며 "작업자들이 중간에 카트리지를 갈지 않았다면 여과성이 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C 씨는 "카트리지는 삼성 측이 제공하는데,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재사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며 "외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외국에서는 방독면보다는 주로 간이 산소마스크를 쓴다"고 설명했다.
사고 신고에 왜 그리 오래 걸렸나?
삼성전자는 지난달 28일 오후 1시 박 씨가 숨을 거둘 때까지 유관기관에 불산 누출 사실을 신고하지 않았다. 경찰은 28일 병원 측이 변사체를 통보하고 나서야 뒤늦게 사고를 인지했다. 경기도청도 박 씨가 숨진 뒤인 오후 2시 40분에야 사고를 접수했다.
나머지 부상자들의 병원 이송도 16시간 늦어졌다. 이 과정에서 협력업체인 STI서비스 관리자가 "기자들이 한강성심병원에 대기하고 있어 서울로 가기 힘들다"며 다시 동탄성심병원으로 응급차량을 돌렸다고 부상자들은 증언했다. 결국 이들 4명 가운데 3명은 가족 차량을 타고 개인적으로 한강성심병원에 입원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C 씨는 "삼성전자 사업장 내에는 병원도 있고 구급대도 있지만, 협력사들은 기록이 남아서 원청인 삼성전자에 사고가 알려지는 것을 싫어한다"며 "그래서 환자가 생기면 대개는 밖으로 나가서 진찰받으라고 말하거나 환자를 부축해서 정문 게이트를 빠져나간 후 병원으로 옮긴다"고 설명했다.
그는 심지어 "과거에는 '중대사고 발생 시 119로 전화하지 말고 단지 내 삼성전자 환경안전팀으로 연락하라'는 안전교육을 받기도 했었다"며 "삼성 측도 자신들 사업장 안에서 벌어진 사고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그는 "삼성 측에서 병원이나 구급대에 오지 말라고 한 적은 없다"는 단서를 달았다.
다른 일반적인 산재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A 씨는 "작업을 하다가 동료들이 손가락이 기계에 깔리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도 있는데, 사고가 났다는 얘기만 들었지 처리가 어떻게 되는지는 못 들었다"며 "삼성 내 병원에 갔다는 소리를 들은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앞서 제기된 다섯 가지 질문에 대해 삼성전자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얼마나 안전 관리를 제대로 했느냐 하는 문제인데, 민감한 문제라 공식 입장을 내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경찰 수사 결과가 나오면 그에 따를 것이며 지금은 아무 말씀도 드릴 수 없다"고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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