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에 따르면, 전자산업에 종사했다가 백혈병, 뇌종양, 다발성경화증 등 희귀질환에 걸렸다고 들어온 제보는 지금까지 130여 건이다. 그 중 47명이 사망했다.
물론 제보자 중에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뿐 아니라 LCD 공장, 삼성전기 등에서도 화학약품을 취급하다 병에 걸렸다는 사람도 다수 있다. 하이닉스 반도체 출신도 4명 있다. 하지만 여전히 과반수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출신이다.
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규모 차이를 고려해도, 아프다고 호소하는 노동자수가 30배가 넘는 현실은 분명 의문을 자아낸다. 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모두에서 일해본 제보자를 만나 그가 느낀 작업 환경의 차이에 대해 들었다. <편집자>
▲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는 오퍼레이터. 남성은 주로 설비 엔지니어를, 여성은 주로 오퍼레이터를 맡는다. ⓒ뉴시스(자료사진) |
"처음부터 삼성에서 일했다면 원래 그러려니 했겠죠. 그런데 전에 하이닉스에서 있다가 다른 데로 옮기니 비교가 됐어요. 들어가니까 바로 숨이 막혀서 놀랐죠. 3라인에 가면 '이게 어디서 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냄새가 심하게 났어요."
지금은 자영업을 하는 이민수(가명) 씨는 원래 반도체 노동자였다. 그에게는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모두에서 일했다는 이력이 있다. 그는 199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하이닉스 반도체에서,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삼성전자 반도체 협력업체에서 설비 엔지니어로 있었다.
"공장을 15m 높게 만드니 공기가 다르더라"
두 회사에서 눈에 띄는 차이는 서브설비가 있는 기계동에서 메인설비가 있는 공장 라인까지의 높이였다. 메인설비에서는 반도체를 만들고, 지하 서브설비에서는 파이프를 통해 메인설비에 필요한 것들을 조달한다. 그는 하이닉스에서는 기계동과 공장 라인까지의 거리가 15m 정도였다면, 그가 주로 일했던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 5라인은 5m 정도였다고 했다. 그는 높이의 차이가 환기의 차이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삼성 반도체 구라인은) 높이가 낮으니 서브장비를 기계동에 다닥다닥 붙여놓았어요. 바닥에서 라인까지 5m 정도였죠. 라인 위에 사무실이 있을 정도로 (공간 활용이) 너무 효율적이었습니다. 반면에 하이닉스는 설비가 아예 땅에 있고, 필요한 것들을 15m 위로 끌어 올렸어요. 숨 쉬기가 편하다는 걸 바로 느낍니다. 장애물이 없고 공정이 크니 공기가 드나들기 쉬웠던 거죠."
그는 "서브장비에서 열이 100도까지 올라가기도 한다"며 "이 때문에 라인이 높은 곳에 있으면 바닥이 시원하지만, 낮으면 시원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설비가 높아지면 비용이 많이 들어요. 서브장비에서 메인장비까지 15m씩 끌어올려야 하는데, 왜 굳이 돈을 들여가며 그렇게 하겠습니까? '문제가 생기면 대응한다'라는 게 회사의 방식이었다고 봐요.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점차 나아지는 건데, 그 과정에서 희생자가 생기는 거죠. 회사가 문제를 발견하기 전에 이미 피해자는 생겨났을 테니까요. 신형라인에서 일할수록 발병률이 확 떨어질 겁니다. 신형라인에서는 위해 요소를 어느 정도 막았을 테니까요."
이 씨는 "5라인도 20년 가까이 된 만큼 진작 없앴어야 했다"면서도 "(이미 사라진) 3라인이나 1라인은 더 열악했고, 7라인이나 8라인 정도면 (최신식으로 가는) 중간단계 정도"라고 했다. 라인에 붙은 숫자는 라인이 만들어진 순서에 따라 붙인다. 숫자가 빠를수록 구(舊)라인이라는 뜻이다. 이번에 법원에서 승소한 고 황유미 씨와 이숙영 씨는 3라인에서 일했었다.
이 씨는 "삼성은 미국의 페어차일드에서, 하이닉스는 텍사스인스트루먼트에서 만들어진 반도체 공장 기술을 그대로 갖다 썼다"며 "삼성 반도체가 페어차일드 시스템에 문제가 있을지 몰랐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는 "하지만 삼성도 그 다음 공장부터는 그렇게 안 지었다. 그 다음부터는 높이가 높았다"며 이전 라인의 공기 순환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봤다.
"구형기계가 오작동해서 가스 새도 계속 일했다"
구형라인은 기계도 구형이어서 오작동이 잦았다고 했다. 엔지니어는 오작동이 날 때 어느 파이프에서 독가스가 새는지 잡아내야 한다. 하지만 이 씨는 "파이프가 수천 개는 되는데 전부 다 어떻게 잡느냐"며 "노후하지 않더라도 장비를 일일이 다 뜯어보기 전에는 어디서 새는지는 신도 모른다"고 했다.
그는 "한국처럼 반도체 설비가 대형화된 곳도 잘 없다. (투자한 만큼 이윤을) 뽑아내야 한다"며 "과거에는 (안전에 대한) 문화 자체가 자리 잡지 못해서 수명을 다한 장비도 무리하게 가동한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가스가 새면 장비를 바꿔줘야 하는데 기존 장비를 계속 굴리거나, 옛날 장비에 부품만 교체해서 썼다"고 말했다.
"20년 된 장비들이었습니다. 그만큼 오작동도 잦았죠. 파이프 밖으로 가스와 화학약품이 새면 벨이 울립니다. 그런데 센서가 어떤 건 예민하고 어떤 건 제대로 작동 안 하기 때문에 오작동해도 그냥 일을 시키는 경우가 많았어요. 벨이 계속 울리면 일을 못하니까, 아예 가스가 흘러도 예전보다 덜 감지하게 센서 수위를 조절하기도 했습니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도 작업했죠. 가스는 눈에 안 보이는데 매캐한 냄새, 지린내 비슷한 냄새도 나고, 어디서는 연기도 났어요. 그러다 어떤 때는 작업을 중지하고 반나절씩 나가 있기도 했어요. 독가스가 퍼졌으니 대피시켰겠죠. 저도 파이프라인에 'TOXIC GAS"라는 표시를 여러 번 분명히 봤습니다. 모든 엔지니어는 이 표시를 볼 수밖에 없었어요. 화학약품 중에도 해골마크가 그려진 것도 많았고요."
ⓒ프레시안(최형락) |
그는 "그때(1990년대) 장비에 문제가 생겼는데 어디서 새는지를 못 찾으면 장비를 통째로 빼버렸다"며 "지금은 (문제되는 시설들을) 많이 없애놨겠지만, 어떤 게 없어졌는지는 오직 당시에 그 라인에서 일했던 피해 당사자만 안다. 당사자를 공장 안으로 들여보내줘야 객관적으로 사실관계를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관련 기사 :삼성반도체 "우린 백혈병과 무관…근거는? 말 못해!", 과학은 '삼성 백혈병' 희생자의 눈물을 닦아줬나?)
이 씨는 또한 "해골마크가 있으면 유독성 있는 물질이라는 건데, (삼성전자가) 유독물질을 안 썼다고 주장한다면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며 "몸에 해로운 걸 안 쓰고 청정한 것만 쓸 리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구리선도 용액으로 녹이는데, 반도체를 깎아낼 때 유독물질이 아니면 무엇으로 깎아내겠느냐"며 "용액과 맞닿으면 화학반응을 일으키고, 바닥에 용액이 떨어지면 군데군데 구멍같은 자국이 생길 정도였다"고 증언했다.
"퇴사하길 잘했다는 생각든다"
5년여간 일했던 그가 퇴사를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도 "몸이 안 좋아져서"였다. 피부병에 걸려 온몸에 붉은 반점이 돋고 진물이 났다. 발병 후에도 6개월을 버티던 그는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 대학병원에 갔는데 의사조차도 무슨 병인지 몰랐다. 퇴사 후에도 꼬박 5년을 앓아야 했다.
완치된 지금도 그가 걸린 병의 이름은 미스터리다. 10여 년 전 기억을 떠올리며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그 정도로 끝나길 다행이지. 거기서 계속 일했으면 큰일 났을 것 같아요."
이 씨는 자신이 일했던 때까지만 해도 "누가 과로사로 죽었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백혈병으로 죽었다는 말은 한 번도 못 들었다"고 했다. 그가 퇴사한 후, '반도체 공장 커플'이었던 친구의 여자 친구가 백혈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때는 백혈병이 반도체와 관계있을 줄은 전혀 생각 못했다"고 했다.
그로부터 5~6년이 지난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이 씨는 "한두 명도 아니고 120명이라고 하니까 믿긴다"고 했다. 그는 "하이닉스 출신 중에도 희귀병에 걸린 사람이 4명 있는 걸로 안다"며 "나도 피부병에 걸려봐서 왠지 찝찝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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