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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민주화 없으면 경기 회복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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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민주화 없으면 경기 회복 어렵다

[이정전 칼럼] 대공황과 2008년 경제 위기의 교훈

지난 대선 때 가장 뜨거운 이슈였던 경제 민주화에 대하여 가장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취했던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 당선자가 되었으니 앞으로도 경제 민주화에 대한 공방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재벌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과연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는 짓인가? 낙수효과를 낳지 못하는 재벌을 우리 국민이 왜 계속 껴안고 가야 하는가? 이런 질문을 둘러싼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와중에 경제 민주화의 참뜻이 묻혀버릴 수도 있다. 경제 민주화를 좀 더 큰 틀에서 볼 필요가 있다.

경제 민주화라는 말은 '경제'라는 단어와 '민주화'라는 단어를 합친 것이다. 여기에서 경제는 '자본주의 시장'을 가리키고 민주화는 '민주주의 정치'를 가리킨다. 자본주의 시장은 시장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고 민주주의 정치는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움직인다. 즉, 두 영역이 서로 다른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으뜸 가치는 생산성 내지는 효율이다. 반면에, 민주주의 정치 영역에서 으뜸 가치는 평등이다. 그래서 국민의 동등한 주권 행사와 법 앞의 평등을 헌법이 보장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과 민주주의 정치의 이런 차이를 정치학자들은 "1원 1표"의 원칙과 "1인 1표"의 원칙으로 풀이한다. 자본주의 시장은 재력에 비례해서 투표권을 행사하는 영역이며, 민주주의 정치는 모든 국민이 똑같이 한 표의 투표권을 행사하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이런 견해를 확대 적용하면, 경제 민주화란 1원 1표의 원칙이 초래하는 시장의 횡포를 1인 1표의 원칙에 입각해서 제약하고 나아가서 시장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조치라고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자본주의 시장과 민주주의 정치 영역을 지배하는 그 두 가지 다른 원리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경제 민주화의 핵심 사항이 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경제 민주화는 자본주의 시장을 수호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1930년대 대공황 이전의 자본주의 시대는 자유방임주의를 기조로 하는 고전적 자본주의 시대였다. 이 시대에는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믿음이 아주 강하던 시대였다. 시장은 내버려두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부를 최대한 창출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자동 조절 장치를 갖추고 있어서 스스로 안정적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고 시장의 자율을 최대한 살려야 한다는 자유방임주의를 낳았다. 그러나 자유방임은 늘 독과점, 투기, 부정부패를 심화시켰고 큰 빈부격차를 낳았다.

미국의 경우 대공황 직전에는 최상위 1%의 부자가 미국 국민소득의 23.1%를 차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일련의 악재들이 겹치면서 드디어 서구 경제가 대공황에 빠지게 되었다. 단순한 '시장의 실패'가 아니라 체제를 위협하는 엄청난 '시장의 실패'가 터진 것이다.

이렇게 파국으로 치닫던 자본주의를 구출한 것은 정부의 적극적 개입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정부가 좀 더 신속하게 시장에 개입하였더라면 대공황의 재앙을 예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보이지 않는 손과 자유방임에 대한 재계와 정계의 믿음이 너무 강했다. 잘못된 신념 탓으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뒤에야 어쩔 수 없이 각국 정부가 뒤늦게 사태 수습에 나서게 되었다. 독과점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었으며, 사회복지제도가 도입되었고, 공공투자에 의한 실업 구제가 대규모로 벌어졌다.

당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과감한 조치는 모범이 되었다. 그는 업계의 책임을 강하게 추궁하였다. 뉴딜 금융개혁법을 통과시킴으로써 금융기관과 기업들의 회계 부정 및 시세 조작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폈고, 거대 금융기관의 분할 해체, 은행업과 증권업의 분리, 증권시장 규제 강화 등 제도 개혁을 강도 높게 추진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일련의 강력한 경제 민주화 조치가 단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덕분에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안정적으로 번영을 누리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특히 케인스 경제 이론의 총본산이었던 미국은 바로 이 시기에 황금기를 맞았다. 성장의 열매가 고르게 퍼지면서 소득불평등이 가장 적었다. 온 국민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면서 미국은 세계적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서구 사회에 신자유주의 바람이 불면서 시장의 자율을 최대한 보장하라는 요구가 거세졌고, 이런 시대적 흐름을 타고 영국에 대처 정부, 그리고 미국에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면서 신자유주의가 주도하는 자본주의 시대가 열렸다. 사회복지 지출이 대폭 삭감되었고, 부유층에 대한 조세 부담이 경감되었으며, 시장에 대한 각종 규제가 대폭 풀리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경제 민주화가 실종되었다.

하지만, 규제 완화 조치, 특히 금융시장에 대한 규제 완화 조치는 자본주의 선도국인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선진국들을 투기의 도가니로 몰아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개인이나 정부나 수입의 범위 안에서 지출한다는 원칙이 깨지면서 온 나라에서 빚잔치가 벌어졌다.
대공황 전야처럼, 경제적 불평등도 극에 달하였다. 미국 국민소득에서 최상위 1% 부유층이 차지하는 몫이 2007년 23.5%까지 치솟았는데, 이 수치는 대공황 직전의 23.1%를 초과하는 수준이다. 결국, 부동산과 금융 상품에 잔뜩 끼었던 거품이 꺼지면서 미국의 금융 시장이 붕괴했고 이어서 대공황 이래 최대의 세계 경제 위기가 찾아왔다.

자본주의 체제가 또다시 위기에 빠지자 이번에도 정부가 구원투수로 등장하게 되었다. 수차례에 걸친 양적 완화 덕분에 일단 급한 불은 끌 수 있었지만, 1930년대 대공황의 교훈을 되새기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고삐 풀린 시장은 기본적으로 불안정하며 심지어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를 구렁텅이로 몰아갈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정부의 개입만이 자본주의를 위기로부터 구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사실이 재확인되었다.

그러나 세계 경제 위기에 대처하는 각국 정부의 개입은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이왕 정부가 나설 바에는 좀 더 신속하고 과감하게 개입하였더라면 세계 경제 위기는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대공황 때처럼 시장에 대한 재계와 정계의 과신이 정부의 신속한 개입을 막는 요인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호미로 막을 수 있었던 것을 가래로 막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보다 더 큰 아쉬움은 좀 더 강력한 경제 민주화 조치가 뒤따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세계 경제 위기에 대응해서 선진국 정부들이 취한 대응책은 그저 돈을 마구 찍어내서 시장에 뿌리는 것뿐이었다. 물론, 경제 민주화 조치가 전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의 주도로 의료개혁법과 금융 규제 개혁법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그 실효성이 극히 의심스러운 상태다. 금융 규제 개혁법은 큰 틀만 제시하고 있을 뿐 실질적이고 세부적인 규칙들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양적 완화 정책 덕분에 미국 경제가 한숨 돌리는 틈을 타서 기득권층과 금융업계가 이 법에 반대하는 로비 활동을 대대적으로 벌였기 때문이다. 미국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이 의료 개혁법과 금융 규제 개혁법의 폐기를 벼르고 있어서 오바마 대통령의 경제 민주화 조치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세계 금융계에 만연한 도덕적 해이를 뿌리 뽑고 경제적 불평등을 대폭 시정하는 경제 민주화 조치를 단행하지 않는다면 지금 세계 경제를 짓누르고 있는 경기 침체의 먹구름은 쉽게 걷히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경제 민주화는 시장에 대한 고삐를 조임으로써 시장을 제자리에 되돌려놓기 위함이며, 그럼으로써 자본주의의 파멸을 막기 위함이다. 이것이 대공황과 2008년 세계 경제 위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로이터=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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