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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가 몇인데, 누구 밑에서 심부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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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내 나이가 몇인데, 누구 밑에서 심부름 하나"

[인터뷰] 김종인 "'박정희 식 성장콤플렉스' 못 벗어나면 누가 돼도 실패"

영국에선 오리 사냥을 할 때 연못 위에 나무로 만든 '가짜 오리'를 띄워놓아 오리들을 불러모은다고 한다. 이때의 '가짜 오리'를 가리키는 영어 단어가 '디코이'(decoy)다. 언론인 출신인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이 지난달 11일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에서 이 단어를 썼다. 김종인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가리킨 말이다.

"새누리당에 들어간 김종인 박사가 경제민주화를 실현하느냐, 결과적으로 'decoy' 같은 것이 되고 마느냐는 두고 볼 일이다. 아무래도 이용만 당하는 것 같기만 하다."

새누리당이 김종인 위원장을 앞세워 경제민주화를 할 것처럼 하면서 국민들을 불러모았지만 결국은 가짜인 것 같다는 얘기다. 남 전 장관과 김 위원장은 청년 시절부터 50여년 동안 두터운 교분을 쌓아왔던 사이다. 그런데 남 전 장관이 모처럼 쓴 소리를 했다. 김종인 위원장의 처지가 그만큼 불안해 보이는 탓일 게다.

실제로 그렇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는 지난해 말 김 위원장을 영입해 '경제민주화'를 당 정강에 명문화하는 등 추진 의지를 과시했지만, 지난달 16일 관련 공약을 발표하는 자리에 김 위원장은 없었다. 이날 발표된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 공약 역시 반쪽짜리였다. 김 위원장이 적극적으로 제안한 대기업집단법 제정과 기존 순환출자 의결권 제한 등 재벌개혁 방안이 대부분 빠진 것이다.

헌법 119조 2항 '경제민주화' 조항을 만든 김 위원장은 이제 박 후보와 결별하는 걸까. 박 후보는 중도 성향 표심을 유인하기 위한 '디코이'로 김 위원장을 이용한 걸까.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서울 부암동에 있는 김 위원장의 개인 사무실을 찾은 건 그래서였다.

예상과 달리, 그리고 대부분의 언론 보도와 달리, 김 위원장은 아직까지 박 후보의 경제 민주화 의지를 신뢰하고 있었다. 박 후보 곁을 떠나 야당 후보를 지지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선을 그었다. 다만, 박 후보가 경제 민주화 관련 공약의 세부 내용과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또 박 후보 주변에 재벌 친화적인 인사들이 대거 포진해 있고, 그들이 경제 민주화 공약 추진을 가로막는다는 지적도 곁들였다.


그가 야당의 경제 민주화 관련 공약을 불신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재벌을 개혁할 것처럼 말하더니 당선되자마자 재벌과 손을 잡았다는 게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한 건 처음이 아니다. 과거에 만났을 때도 같은 말을 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불신은 그만큼 뿌리가 깊어 보였다. 이런 기억이 굵은 흉터처럼 남아 있는 한, 그가 야당과 손을 잡기란 어려워 보였다.

재벌 편드는 이들이 박 후보 주변에 득시글한데, 그리고 '경제 민주화'에 대한 박 후보의 이해 수준이 깊지 않은데, 그런데도 그가 굳이 박 후보의 '경제 민주화' 의지를 신뢰하는 이유를 재차 물었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박 후보는 자기 말을 바꾸는 사람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쉽게 타협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다. 새누리당 안에선 박 후보가 경제 민주화를 이야기하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말도 했다.

그는 박 후보에게 속고 있는 걸까. 야당은 그렇게 본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 캠프 소속 이정우 경제민주화위원장은 지난달 30일 "김종인 위원장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라고 말했다. 올해 안에 두 개 이상의 경제 민주화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겠다던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 이유다. 이 위원장은 이날 "현재까지 100개가 넘게 제출된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 중에서 단 하나도 본회의를 통과한 법안이 없다"며 "유일하게 관련 상임위를 통과해서 올라온 법안인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은 새누리당이 법사위에서 일방적으로 처리를 거부하면서, 언제 통과될지 알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 되고 말았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이 보수 여당의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와 손잡으면서 여야 정치권 전체가 '경제 민주화'로 한발 더 다가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지난 25년 간 고시생들 외엔 별 관심이 없었던 헌법 속 경제민주화 조항을 대중의 상식으로 만든 점은 분명히 그의 공로다. 문제는 그 다음 행보인데, 김 위원장과 한참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의 깊은 속내까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그가 얼마 전에 낸 책이 힌트가 될지도 모르겠다.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라는 책에서 그는 그가 만든 헌법 119조 2항 '경제 민주화' 조항이 "자본주의를 지키는 안전장치"라고 설명했다. '경제 민주화'는 이른바 '좌클릭'과도 관계없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또 '경제 민주화'가 재벌을 해체하자는 것이 아니며, 경제 성장과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내용도 있다. '경제 민주화'와 경제 성장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경제 민주화' 없이는 성장도 불가능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한마디로, 한국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려는 보수주의자라면 마땅히 '경제 민주화'를 옹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도 그는 이런 소신을 강하게 피력했다. 박인규 <프레시안> 발행인과 지난달 29일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정리했다. <편집자>

▲ 김종인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 ⓒ프레시안(최형락)

"박근혜, 경제민주화 약속 지키리라 믿는다"

프레시안 : 박근혜 후보가 최근 10개 경제일간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김종인 위원장의 역할이 끝났느냐"라는 질문에 "네" 라고 대답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김종인 : <중앙일보>에 그런 기사가 났었다. 그런데 내가 알아보니, 실제로 그런 말은 없었다고 했다. 기자들과의 문답을 기록한 원문도 내가 봤는데, 거기에도 없었다. <중앙일보> 기자 역시 내게 착오라고 이야기했다.

프레시안 : 기사가 '오보'였다는 말인데, 만약 '오보'가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 건가. 국민행복추진위원장에서 물러나는 건가.

김종인 : 만약 (박근혜 후보의) "네"라는 발언이 사실이면, 당연히 내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지. 나로선 편하고 좋다. 자유로운 몸이 되는 것 아닌가.

프레시안 : 11월 16일, 박 후보가 경제 민주화 공약을 발표하는 자리에 김 위원장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주변에선 "결별했다", "역할이 끝났다", "토사구팽 당했다" 등의 말이 나왔다.

ⓒ프레시안(최형락)
김종인 :
내가 새누리당에 가서 정강정책에 '경제 민주화'를 집어넣었다. 박 후보가 동의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의원총회에서도 충분히 논의됐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의원총회에서 통과되지 않았다면, '경제 민주화'는 정강정책에 들어갈 수 없었다. 전국대의원대회 인준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반론이 전혀 없었다. 그때가 4.11 총선을 앞둔 무렵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다들 불안하니까, '경제 민주화'에 시비를 걸 수 없다고 봤을 수 있다. 어쨋건 '경제 민주화'는 박 후보를 포함해서 새누리당 전체가 동의한 사안이다.

그런데 총선이 끝나자마자 반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주로 이번에 새로 당선된 사람들에게서였다. 사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내가 잘 안다. 그래서 별로 의미가 없는 반론이라고 본다.

새누리당의 생리라는 게 뻔하다. 경제 민주화에 대해선 들어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후보 주변에 모여드는 경제 전문가라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나에 대해 안 좋은 시선으로 본다는 것 역시 내가 잘 안다. 게다가 3/4분기 경제성장률 수치가 안 좋게 나오니까 '이때다' 싶었던 사람들도 있다. 이걸 핑계로 그쪽(경제 민주화를 거스르는 쪽)으로 선회하려 했던 거겠지. 하지만 경제를 살리기 위해선 경제 민주화가 필수적이다. 그들은 그걸 모른다.

분명한 건 경제 민주화 공약을 나 혼자 만든 게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혼자 했다면, 내용이 그렇게 많을 필요도 없다. 꼭 필요한 몇 가지만 있으면 된다. 새누리당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약을 만들었다. 그들이 말을 바꾸면 안 된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결국 중요한 건 후보의 생각이다.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선 대통령의 신념이 결정적이다. 그런데 박근혜 후보는 '경제 민주화'를 약속했고, 그는 자기가 한 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니다.

"경제민주화, 공약 가짓수 많다고 되는 것 아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경제민주화 공약 발표하는 자리에는 왜 안 나왔나.

김종인 : 나는 원래 공약을 발표하는 자리에 나가본 적이 없다. 경제민주화뿐 아니라 다른 공약도 마찬가지다.

프레시안 : 기존 순환출자 의결권 제한, 대기업 집단법, 국민참여재판 등 김 위원장이 주장했던 내용이 새누리당의 경제 민주화 공약에서 빠졌다. 새누리당 측은 이들 내용은 빠졌지만 경제 민주화에 관한 나머지 내용이 30가지 이상이 포함돼 있으므로 충분하다고 한다.

김종인 : '경제 민주화'라는 게 그렇게 공약 숫자만 많이 나열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프레시안 : 경제 민주화 공약을 김 위원장이 주도해서 만든 것 아닌가. 지금의 새누리당 경제 민주화 공약이 만족스럽나.

김종인 : 나는 감독만 했다. 경제 민주화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모아서 의견을 수렴해서 대략 규합을 해가지고 넘겨준 거다.

이렇게 나온 공약에 대해서 경제 민주화를 위해 충분한 방안이라고 말하기는 좀 뭣하다. 사실 공약이야 후보가 그 정도면 되겠다 해서 정한 것 아닌가. 그래서 그런가보다 한다. 그에 대해 선거기간에 토를 달 순 없다. 아무튼 박 후보가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지를 누누이 밝혔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면 안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본다. 지금의 공약이 부실하다고 해도, 크게 개의치 않는 건 그래서다. 게다가 새누리당 안에선 박 후보가 경제 민주화를 해야겠다고 말한 유일한 사람이다.

"재벌과 타협한 참여정부…우리나라 진보는 대체 뭐하자는 진보인가"

프레시안 : 경제 민주화에 대한 의지는 아무래도 야당이 낫지 않나. 문재인 후보의 경제 민주화 공약에 대해선 어떻게 보나.

김종인 : 공약을 잔뜩 나열 해놨는데, 과연 그걸 관리할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프레시안 : 야당의 실력을 못미더워하는 것 같다.

김종인 : 다른 걸 떠나서 노무현 정부 때 겪어 봤지 않나. 나는 노무현이 대통령 되기 전부터 알았었다. 당시 노무현은 한국경제를 개혁하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했었다. 그런데 대통령 후보가 되더니 달라졌다. 대통령이 되고 나선 아예 180도 바뀌어서 재벌위주가 됐다. 심지어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자인하기까지 했다. 그럴 거면 대체 정부는 왜 있나. 그걸 보고 나니, 난 우리나라 진보가 대체 뭐하자는 진보인지 이해를 못하겠더라.

프레시안 : 문재인 후보는 참여정부의 과오를 인정했다. 그리고 그걸 반복하지 않겠다고 했다.

김종인 : 문재인 후보는 겪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반면, 박근혜 후보는 5년간 겪어봐서 안다. 우리나라는 대통령 중심제라서 모든 게 결국 대통령의 자질과 자세에 달려 있다. 그런 면에서 박 후보가 낫다.

물론, 박 후보가 경제 민주화의 세부적인 내용과 의미를 잘 이해 못하는 건 사실이다. 또 후보를 보좌하는 사람들 중에 이상한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경제 민주화가 제대로 추진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박 후보가 탐욕이나 다른 계산 때문에 재계와 타협할 사람은 아니라고 본다. 난 이 점을 높이 본다.

"박근혜, 집토끼만 잡으려해선 안 된다"

프레시안 : 경제 민주화도 결국 민주화 아닌가. 그러니까 다른 영역의 민주화와 동떨어진 건 아니라고 본다. 다른 부문에선 민주주의가 후퇴하는데 경제만 민주화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박 후보는 다른 정치, 사회 영역에선 민주화에 대한 관심이 낮아 보인다. 예컨대 사립학교법 문제를 보자. 이사장의 전횡을 막는 '사학 민주화'와 관계가 깊다. 하지만 박 후보는 사학 개혁에 몹시 강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박 후보는 사학 개혁을 '이념 투쟁'이라고 했는데, 실제론 그렇지 않다. 사립학교 교사, 학생들에겐 삶의 문제다. 사학 민주화는 반대하면서 경제 민주화만 하자는 논리가 과연 성립할까. 사학 개혁 등 다른 문제에선 기득권층을 옹호하던 사람이 재벌 문제에서만 반대 입장을 취한다는 게 가능하겠느냐는 말이다.

ⓒ프레시안(최형락)
김종인 :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어차피 대선 후보가 모든 분야를 샅샅이 알 수는 없다. 영국의 처칠 수상이 지도자의 덕목으로 크게 두 가지를 꼽았다. 하나는 역사책을 많이 읽어서 국가의 흥망성쇠를 꿰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나라가 망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을 보는 눈이 밝아야 한다는 것이다. 후보가 원칙을 갖고 사람을 잘 골라 쓰면 별 문제 없지 않을까 싶다.

프레시안 : 최근 <매일경제>와 짧은 인터뷰를 했다. 거기 보니, 김 위원장이 "박 후보의 선거전략을 보니까 보수층에만 집중한다. 집토끼만 잡아서는 위험하다"라고 했다고 돼 있다.

김종인 : 인터뷰라기보다, 잠깐 점심 먹으면서 이야기했을 뿐이다. 그걸 기사로 썼나 보군.

프레시안 : 세간에선 그걸 박 후보가 경제 민주화를 포기한 데 대한 경고로 해석한다.

김종인 : 박 후보가 보수층에만 집착하면 안 된다는 건 사실이다. 4월에 선거 해봐서 알지 않는가.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대략 46대 46이다. 그런데 46%만으론 대통령이 될 수 없다.

"내 나이가 몇인데, 누구 밑에서 심부름 하나"

프레시안 : 만약 민주당이 집권해서 경제 민주화를 위해 김 위원장을 모시겠다고 하면 어쩔 건가.

김종인 : 모신다는 말 자체가 웃긴 거다. 그건 새누리당 사람들도 착각하는 건데, 내가 무슨 자리가 탐나서 이 짓을 하는 게 아니다. 내가 나이가 몇인데 누구 밑에 가서 심부름꾼 노릇을 하려고 그러겠냐. 그런 생각은 추호도 없다. 모신다느니 하는 말을 들으면, 몹시 불쾌하다.

프레시안 : 경제 민주화는 세부적인 정책보다 대통령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입장으로 이해된다.

김종인 : 그렇다. 대통령이 되면, 그 순간 의식이 달라진다. 지금 나오는 공약의 세부적인 내용에 크게 연연할 필요가 없는 것도 그래서다. 게다가 내년 경제 상황이 녹록하지가 않다. 경제뿐 아니라 사회 전반이 그렇다. 양극화가 너무 심해졌다. 정부 통계에서 '나는 하층민'이라고 답하는 비율이 45%다. 미래가 없다는 답변은 60% 가까이 된다. 이래선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

차기 대통령에게 양극화 해소, 경제 민주화 외엔 다른 길이 없다. 이걸 얼마나 비타협적으로 추진하느냐의 문제만이 있을 뿐이다.
ⓒ프레시안(최형락)

"불평등이 경제 성장 걸림돌이다"

프레시안 : 하지만 새누리당에선 이른바 투트랙(Two Track, 두 개의 경로)론이 나온다. 한편으론 경제 민주화를 추진하되, 다른 한편으론 전통적인 성장 논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경제 민주화를 접겠다는 말로 들린다.

김종인 : '투트랙'이라는 말 자체가 틀렸다. 예컨대 '물가냐, 고용이냐' 이런 걸 논할 때는 '투트랙'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하지만 경제 민주화와 경제성장은 그런 관계가 아니다. 경제 민주화는 일종의 질서를 잡는 작업이다. 틀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해도 좋다. 어쨋건 통상적인 경제정책과는 다른 차원이다. 경제 민주화가 이뤄진 기반 위에서 성장도 가능하다.

프레시안 : 말씀대로 경제 민주화란 경제 질서를 바로잡는 일인데, 새누리당에선 당장 경제상황이 급하니 질서는 나중에 잡자는 말이 나온다. 우선 성장부터 하자는 게다.

김종인 : 그걸 미루자면 영원히 못하는 거다. 박 후보가 지금 그런 목소리에 약간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후보가 냉정하게 생각하면 흔들릴 필요가 없다. 정부 정책이라는 건 시대가 요구하는 걸 하는 거다. 이거 했으니 저건 안 해도 된다는 식이면 경제정책이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사실 대한민국 같은 경제 구조를 가진 나라가 없다. 완전히 재벌이 독식하는 구조다. 정치 민주화가 이뤄지는 동안, 과거 압축 성장 시기에 발생했던 경제사회적 모순을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다.

최근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조사한 걸 보면, 선진국이건 후진국이건 불평등의 정도가 성장의 저해 요인이 되는 단계까지 왔다고 돼 있다. 여기서 일정한 변화를 가져오지 않으면 문제를 풀 수 없다. 그게 안 되면 정치 민주주의도, 경제도 제대로 될 수 없다. 그리고 이게 세계적인 추세다. 한국만 역행하는 건 불가능하다.

안타까운 점은 한국에선 경제 민주화가 선거용 구호처럼 쓰인다는 점이다. 이건 옳지 않다. 차기 정부가 초기에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정권도 결국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갈 게다.

프레시안 : 그런데 박 후보 주변에는 재계와 긴밀한 관계인 사람들이 워낙 많다. 기업인 출신도 많고. 박 후보가 집권할 경우 경제 민주화가 제대로 되겠느냐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김종인 : 나 역시 그런 점에서 우려가 없었던 게 아니다. 과거 한나라당의 생리가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많이 올 수밖에 없는 면이 있다. 하지만 박 후보가 이익집단과 연결된 건 아니다. 그건 내가 분명히 확인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들어가지도 않았겠지.

프레시안 : 경제 민주화 공약 발표 이후 박 후보를 만난 적이 있나.

김종인 : 없다.

"역대 대통령 실패 원인, '박정희 식 성장콤플렉스' 빠진 탓"

프레시안 : 잠시 화제를 돌려보자. 올해 대선 정국에서 최대 화제를 낳은 인물은 결국 안철수 전 무소속 대통령 후보다. 그 역시 '삼성 동물원' 비판 발언으로 인기를 얻었다. 재벌 문제의 폐해를 잘 알고 있었던 셈인데, 그가 과거에 김 위원장과 만난 적이 있는 걸로 안다. 이른바 안철수 현상에 대해 어떻게 보나.

김종인 : 먼저 2002년 대선을 돌아보라. 그때 노무현 대통령이 탄생한 계기가 뭐였나. 새 사람 같아 보이고 저 사람이 그래도 서민적 성향을 보이고, 그러니까 한국 경제 구조를 바꿔서 서민 생활을 낫게 하리라고 봐서 뽑은 것 아닌가. 그런데 그걸 못했다. 결국 종전과 똑같은 경제정책을 썼다. 그 결과, 양극화는 더 심해졌고 집권 2년이 지나니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한 것 아니냐.

그래서 집권한 이명박 정권도 똑같다. 국민생활은 어려워지고 있는데, 경제대통령을 표방하고 엄청난 구호를 제시하며 실현할 수 있다고 했다. 국민이 보기엔,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면 우리 생활이 상당히 나아질 수 있겠지 싶었다. 그래서 뽑았다. 하지만 5년 지나니 어떤가. 생활 나아진 사람 많지 않다. 그러니 역시 이 정권을 불신하게 됐다.

정치적 민주화가 이뤄지는 동안 경제적 양극화는 오히려 심화됐다. 과거 압축 성장 과정에서 생긴 문제가 지난 25년 간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기존 정치권은 여, 야 가릴 것 없이 이 문제를 풀지 못했으니, 정치권 밖에 있는 안철수에게 기대가 쏠렸다. '안철수 현상'은 그래서 생겼다고 본다.

다만 안철수 개인은 환상에 빠져 있던 게 아닌가 싶다. 정당정치를 하는 나라에서 정치적 기반 없이 어떻게 정치를 하나. 야권 단일화 협상을 보며 1960년대 윤보선-허정 단일화를 떠올렸다. 당시에도 허정이 여론 지지도에선 앞서 있었다. 그래서 꿋꿋이 나아갔는데, 결국 물러났다. 당 조직이 있는 윤보선을 이길 수 없었던 게다. 정당정치라는 걸 간단하게 보면 안 된다.

"독일·일본이 선진국 된 이유, '재벌 해체'"

프레시안 : 1987년 민주화 이후, 다양한 정치세력이 집권했는데, 모두 재벌개혁에는 실패했다. 말씀대로 과거 압축 성장 과정에서 생긴 문제 역시 풀지 못했다. 그래서 정치권 바깥에서 지도자를 찾는 일까지 벌어졌는데, 이유가 뭐라고 보나.

김종인 : 박정희 대통령 이후 집권한 대통령은 모조리 '박정희식 성장 콤플렉스'에 빠졌다. 그래서 사회와 경제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문제는 성장 콤플렉스에 빠지면 실제로 성장이 이뤄지느냐다. 적어도 지금은 분명히 그렇지 않다. 독일, 일본이 왜 잘살게 됐는지 아나?

프레시안 : 2차 세계대전 뒤 재벌을 해체해서?

김종인 : 그렇다. 그들은 패전국이었으므로 승전국의 주문에 따라 재벌과 기존 경제 질서를 해체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조합 활동이 보장됐고, 독일에선 노동자의 경영 참여까지 보장됐다. 그런데 이런 조치가 결과적으로 경제 성장으로 이어졌다.

선진국에선 어느 나라나 특정 단계에서 대기업의 탐욕을 견제하는 작업을 한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미국도 그랬다. 테오도어 루스벨트 같은 인물이 없었다면, 미국이 선진국이 될 수 있었을까. 아니라고 본다. 미국에선 19세기 말에 독점기업의 횡포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결국 20세기 초에 테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나타나 40개의 독점기업을 해체했다. 그는 노동조합에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고 있는 법원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테오도어 루스벨트는 보수적인 공화당 소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시대가 요구한 과제를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이 20세기에 황금기를 누린 것은 그때그때 나름대로 필요한 인물이 나타나 나라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한국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나라가 잘 되려면,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과제를 감당할 수 있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이 대목에서 참 안타까운 게 있다. 지난 25년 동안 민주주의를 이야기했지만 아직 민주주의는 완성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소득 상위 1%에 속하는 집단이 전체 소득의 16.6%를 갖는다고 한다. 이는 미국 다음으로 심각한 양극화 수준이다. 그런데 한국은 부유층의 소득 파악이 제대로 돼 있지 않다. 이점까지 고려하면, 불평등 정도가 굉장히 심각한 셈이다. 이정도로 불평등하면 사회 정의가 바로 설 수 없다. 민주주의가 미완성인 건 그래서다. 그렇다면, 지금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은 경제 민주화를 통해 미완의 민주주의를 완성하겠다고 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후보가 없다.

"헌법 가치 받아들이는 게 왜 '좌클릭'인가?"

프레시안 : 최근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라는 책을 냈다.

김종인 : 1987년 헌법에 이른바 '경제민주화' 조항을 집어넣은 지 올해로 25년째다. 하지만 왜 경제민주화가 필요한지에 대해선 제대로 된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심지어 헌법 속 경제민주화 조항에 대한 해설서 한 권 나온 게 없다. 그래서 내가 화두를 제시한 입장에서 책을 썼다. '당시 헌법에 경제민주화 조항을 넣은 계기가 뭐다' 정도를 설명하려 했다.

마침, 지난해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계기로 정치권에서 경제민주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여, 야 정당 역시 대대적인 변신을 하게 됐다. 야당은 통합의 길을 갔고, 여당은 근본적인 수술을 받는다며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렸다. 당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정강정책은 사실 반(反)서민적인 면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시대가 바뀌고 국민 여론이 바뀌었으니, 헌법 속 경제민주화 조항을 정강정책에 반영했다. 이걸 놓고 누구는 '좌클릭'이라고 하는데, 납득할 수 없다. 헌법 속 가치를 받아들이는 게 왜 '좌클릭'인가. 이 정도 변화를 뭔가 대단한 것인양 여기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보수'란 무턱대고 현재를 고집한다는 뜻이 아니다. 국민의식의 변화,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는 게 옳다. 정당이 그걸 하지 않는다면 존재의의가 없다.

"국민 다수가 원하는 경제민주화, 대선 후보들은 왜 외면하나"

프레시안 : 남재희 전 장관이 최근 <프레시안> 기고에서 김 위원장을 '디코이(decoy)'에 비유했다. 영국에서 사냥꾼이 사냥감을 유인하기 위해 쓰는 '가짜 새'를 '디코이'라고 하는데, 김 위원장이 그런 역할을 한 것 같다는 설명이다. 김 위원장이 박 후보와 손 잡으면서 '경제 민주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긴 했는데, 실질적인 역할은 못한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온다.

김종인 : 남 전 장관은 표현을 너무 과도하게 한 것이다. 세상 문제가 어디 한꺼번에 풀리겠나. 나는 단초만 만들어도 다행이라고 본다.

어느 여론조사를 보니 국민이 원하는 첫 번째 의제가 경제민주화였다. 41%가 나왔다. 두 번째가 복지였는데 25%였고, 그 다음이 일자리 창출인데 17%였다. 그런데 이게 다 연결돼 있는 것이다. 결국 국민의 70% 이상이 경제민주화를 원하는 셈이다. 반면, 외교 안보 이슈는 별 관심이 없다. 대선 후보들이 이걸 알아야 하는데,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영 답답하다. 이런 이야기는 내가 새누리당과 관계가 없으면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는데, 지금은 못하겠다.

프레시안 : 박근혜 후보가 대선에서 이길 거라고 보나.

김종인 : 큰 실수만 없으면 박 후보가 1.5%p차이로 이긴다는 게 내 계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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