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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1904년의 한반도 중립화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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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1904년의 한반도 중립화론 (4)

[한반도 중립화 통일의 길]<38>

1. 이노우에 코와시의 한반도 중립화론

조선내의 보(保)ㆍ혁(革) 갈등이 빚은 임오군란은 결과적으로 청(淸)의 대조선 우위권 확보의 전환점이 되었다. 뜻밖의 임오군란으로 한반도 진출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열세에 놓이게 된 일본은 곧 바로 이를 만회하기 위한 묘안을 찾고 있었다. 임오군란 발발 직후 동경에서 청나라와 조선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회담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때 청ㆍ일 양국 간에 쟁점으로 부각된 것이 '淸ㆍ韓 종속관계'였다. 淸 측은 [조선에 대한] 파병과 정치개입의 명분으로 속방론[屬邦論; 조선은 청나라의 속방이다]을 들고 나왔고 일본은 [조선의] 독립론을 주장하였다. 조선을 둘러싼 이러한 양국 간의 상반된 주장은 급기야 일본 조야의 초미의 관심사로 되었고 이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淸의 속방론을 부정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제기된 것이 곧 한국 중립화 구상이었다.

일본인이 제기한 한국중립화론의 대표적인 경우는 이노우에 코와시[井上毅]의 안(案)이다. 이노우에 코와시(1843~1895년)는 참사원(參事院) 의관(議官)으로서 임오군란 사후처리차 서울에 파견되어 조선과 교섭을 벌인 일이 있는 인물이다.(박희호, 31ㆍ34ㆍ37)

이노우에 코와시는 귀국하자마자 '조선정략의견안(朝鮮政略意見案)'을 기초했다. 이하 '조선정략의견안'을 간추려 원문대로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 청, 미국, 영국, 독일의 다섯 나라는 서로 회동하여 조선의 일을 의논하고, 조선을 하나의 중립국으로 삼아, 즉 벨기에ㆍ스위스의 예에 따라 그를 침략하지 않고 타국으로부터 침략받지도 않는 나라로 하여 다섯 나라가 함께 이를 보호한다. 청은 조선에 대해 상국(上國)이고 조선은 청에 대해 공국(貢國; tributary)이라고 하지만, 속국(屬國; dependency)의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은 하나의 독립국이라는 사실을 저해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청은 다른 네 나라와 함께 보호국으로서 네 나라의 협동을 얻지 않고 홀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면 안 된다. 이 책략이 만약 행해진다면, 동양의 정략에서 어느 정도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 오로지 우리나라[일본]만의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을 위해서는 영구 중립의 지위를 얻고 또 지나(支那; 중국)의 굴레와 멍에[羈軛]를 벗어나고, 또 지나를 위해서는 그 조공국의 명의를 온전히 하고 그리고 종주국이라는 허명과 실제 중국의 국가적 실력이 서로 맞지 않는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오카모토 다카시, 172~173)

[당시의 일본에게] 청의 독점적인 '간섭' '보호'를 대체할 조치가 무엇보다 필요했다. 그에 해당하는 것이, 조약 관계를 가지고 조회를 받고 그 의미 내용에 합의한 '다섯 나라'가 '함께' 조선을 '보호'하면서, '벨기에, 스위스의 예'에 따라, '간섭'할 수 없는 '영구 중립'론으로 만드는 것에 있었다.

이노우에 코와시는 이러한 방안, 이른바 조선 중립화 구상에 나름대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확실히 이론적으로 보면, 법적ㆍ항구적 안정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높은 완성도를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노우에 코와시는 1882년 11월부터 그 실현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여, 일본 외무성 당국을 통해 청과 미국에 타진을 시도했지만, 그 결과는 좋지 않았다. 청은 이를 전혀 아랑곳 않고 오로지 '속국' 실체화의 방침을 추구하고 있었다. 또 미국 등 서양 각국은 아직 조약의 비준도 끝나지 않아, 공동의 '보호'나 '영구 중립'화 등을 고려할 단계에 이르지 않았다.(오카모토 다카시, 174~175)

2. 이노우에 코와시의 한반도 중립화론의 모순

이노우에 코와시의 한반도 중립화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모순이 숨어 있다. 왜냐하면 그가 제기한 한국 중립화론은 한 마디로 淸ㆍ韓 종속관계의 부정에서 출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본래 일본은 대륙진출의 발판으로 조선에 강화도 조약을 강요하여 조선을 자주 독립국으로 명시함으로써 淸의 대한(對韓) 종주권 행사에 제동을 걸었으나 임오군란이라는 뜻하지 않은 사태의 발생과 그에 따른 청국군(淸國軍)의 조선 출병(出兵)으로 사태가 반전되었다. 이에 일본이 한반도에서 청을 제쳐두고 우위권을 확보하기란 아직은 쉽지 않다는 사실을 全 조야(朝野)에 걸쳐 공감하게 될 때에 그가 한반도 중립화론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중립화론은 청ㆍ한 종속관계를 부정하는 방편이었지 조선의 실질적인 독립을 전제로 한 진정한 한반도 중립화론은 아니었다. 이노우에 코와시의 한반도 중립화론은 그들[일본]의 국익을 전제로 한 현실 인식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그러한 만큼 상황의 변화가 있을 경우에는 淸ㆍ日 공조체제를 기초로 하는 이와 같은 한반도 중립화론 따위는 얼마든지 식언(食言)으로 끝날 수 있는 것이었다.(박희호, 42)

3. '보호 받는 중립화'의 한계

'일본, 청, 미국, 영국, 독일의 다섯 나라는 서로 회동하여 조선의 일을 의논하고, 조선을 하나의 중립국으로 삼아, 즉 벨기에ㆍ스위스의 예에 따라 그를 침략하지 않고 타국으로부터 침략 받지도 않는 나라로 하여 다섯 나라가 함께 이를 보호한다.'는 이노우에 코와시의 안을 '보호받는 중립화'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이러한 '보호받는 중립화'는 다음과 같은 한계점을 지닌다.

첫째, 중립화의 전제인 '자주'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진정한 중립화로 볼 수 없다.

이노우에 코와시가 1882년 10월 29일에 쓴「擬與馬觀察書」에는 만국공법(萬國公法)에 근거하여 '자주'와 '반주(半主; 절반의 자주)'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조선이 중립화해야 할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즉 '자주국(自主國)'은 타국과 평등한 교섭을 하고 있는 나라로서 자주 독립국을 말하며 '반주국(半主國)'은 내치(內治)는 자주에 의하면서도 외교는 상국(上國)에 의해서 행해지는 나라를 말한다. 이노우에 코와시가「擬與馬觀察書」에서 '조선이 자주국이 되어야한다'고 강조했지만,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으려는 일본 정부의 전략을 벗어나는 조선 중립화안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일본의 보호를 받는 '반주국(半主國)' 조선이 중립화에 성공할 수 없음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이노우에 코와시는 '조선을 명목상 독립국으로 내세우는 조선 중립화 방안'을 통해 청나라의 영향력을 배제하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내치는 자주이지만 어느 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모시는 중립화'는 불가능하다. 다른 열강들이 그러한 반주국(反主國)의 중립화를 보증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을 상국(?)으로 모시는 현재의 남한 정부는 중립화를 주창할 자격이 없다. 남한 정부가 중립화를 추진하려면 반주국(半主國)' 상태의 외교전략을 철폐하고 자주적인 중립외교로 선회해야 한다. 이노우에 코와시가 강조하는 명목상의 독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주적인 중립화 추진이 핵심이다. 남한 정부처럼 명목상 독립국이면서 외교적인 속국 상태(대미 외교의 종속)인 나라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명목상 독립국이 열강의 보호를 받으며 중립화를 추진하는 일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렵다.

둘째, 보호받는 중립화는 신탁통치이다.

열강들의 '보호ㆍ간섭'을 받는 중립화는 성공할 수 없다. 조선시대 말기에 일본 쪽에서 제시한 조선 중립화 방안이 '보호'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 조선에 이해관계가 있는 외세가 조선을 서로 보호하려는 가운데 한반도 주변의 정세가 더욱 엄혹해졌기 때문이다. 조선을 보호하지 않는 나라는, 보호하는 나라를 대립적으로 바라보므로 보호국 중심의 중립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결국 한반도 주변 관련국의 상호인정이 없는 '보호받는 중립화'로 전락하게 된다. 어느 나라의 보호를 받는 중립은 엄정한 중립이 아니고 신탁통치에 다름 아니다. 남의 나라 보호에서 벗어나 자주적으로 다른 나라와 평화공동체를 만들어가야 중립에 성공할 수 있는데, 신탁통치와 같은 보호를 받으면 중립화를 이룰 수 없다.

<인용 자료>
* 박희호「구한말 한반도 중립화론 연구」(동국대 박사논문, 1997)
* 오카모토 다카시(岡本隆司) 지음, 강진아 옮김『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서울, 소와당,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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