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73년 당 조직부와 선전부를 장악하고 1974년 정치국원에 임명됨으로써 내부적으로 후계자로 결정되었고, 1980년 당 정치국 상무위원과 당 중앙군사위원에 피선됨으로써 공식적 후계자임이 대외적으로 공표되었다. 이후 그는 1990년 국방위 제1부위원장, 1991년 최고사령관, 1992년 공화국 원수, 1993년 국방위원장에 취임하였다. 이처럼 그는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기 전까지 20년 동안 '수령의 후계자'로서 북한을 통치해오면서 제도적 리더십(positional leadership)을 공고화하는 가운데 인격적 리더십(personal leadership)을 확립하여 '제2대 수령'의 위치에 올라섰다.
절대적 존재인 수령에 등극한 김정일은 권력운용 중추기구를 당(黨)·군(軍)·정(政) 중 어느 하나를 특정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선택했다. 자신은 '균형자' 또는 '통합자'로서 위치하였고, 기관간·개인간 권한의 중복, 견제와 균형, 감시와 통제의 체제를 구성하였으며, 몇 개의 중요한 기관 또는 개인끼리 경합하는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당·군·정에 대해 직할통치를 실시하였다.
반면, 김정은은 2009년 1월 후계자로 내정된 이후, 2010년 9월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과 당 중앙위원, 그리고 인민군 대장 등 공식 지위에 선출되었다. 김정일이 사망한 직후인 2011년 12월 최고사령관에 취임하였고 2012년 4월 당 제1비서, 당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군사위원장, 국방위 제1위원장에 올랐다. 바야흐로 김정은 정권이 공식 출범한 것이다. 이처럼 김정일에 비해 김정은은 후계자임을 공개한 나이(38세:28세)가 어렸고, 후계자 검증기간(6년:21개월)과 아버지와의 공동통치기간(20년:3년)도 짧았다. 즉, 인격적 리더십은 고사하고 제도적 리더십을 구축하기에도 그 시간이 매우 부족하였다. 북한이 '김정은 시대'의 개막을 선포했지만, 현재까지는 '제3대 수령 김정은'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수령 없는' 수령제가 제대로 작동될 리 없다. 김정은에게서 김일성과 김정일이 가지고 있었던 카리스마를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북한 지도부는 '수령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던 정치'에서 '정치시스템에 의한 정치'로의 전환에 합의하게 된 듯하다. 그것은 지난 15년 동안 방치하였던 당의 복원으로 귀결되었다. 이제 당이 북한 정치체제의 중심에 올라섬으로써, 사회주의 정치의 정상화를 일정하게 달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은 필연코 수령의 직할통치가 아닌 당·정·군의 역할분담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군에 대한 당의 통제는 공안기관의 강화와 더불어 진행되었다. 김정일이 자신은 군을 중심으로 한 선군정치를 했지만, 김정은은 보위부를 중심으로 한 정보정치를 해야 한다는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 필자 주)
대표적으로 선군정치 하에서 제한적·간헐적으로 실시되었던 '내각책임제(내각중심제)'가 강화되었다. 김정은은 '4.6노작'에서 당의 경제정책 관철에서 내각의 결정·지시를 어김없이 집행할 것과 이에 지장을 주는 현상들과 투쟁할 것을 요구했다. 인민들의 먹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불가피한 조치였다. 내각책임제의 강화는 경제개혁 주도인물들의 복귀로 이어졌다. 2002-3년 내각에서 7.1조치를 주도했던 총리 박봉주, 부총리 로두철·전승훈·곽범기 등이 김정은 정권 하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봐야할 것은 과거에는 없었던 현지요해라는 방식으로 최영림 총리의 경제현장 시찰을 보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총리의 현지요해는 2011년 2월부터 개시되어 올해에만 40회 이상을 보도했다. 경제사령부인 내각의 지위와 역할을 보장하려는 의도라 생각된다.
제도적 리더십이 부족한 김정은에게 '사상적 지도자'의 풍모를 갖추어 인격적 리더십까지 구축하라는 것은 너무 앞선 요구일 것이다. 현재 김정은은 이데올로기에 대해 실용적 접근을 하고 있다. 북한은 지배이데올로기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선포했지만 이의 대(對)사회 구속력은 그리 강하지 않는 듯하다. 김일성-김정일주의 체계화에 진전이 없고 "전사회를 김일성-김정일주의화하자"라는 강령을 반복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더욱이 최근에는 김일성-김정일주의에 대한 언급 빈도도 낮아지고 있다. 대신 현지지도 강행군 중 사망했다던 김정일의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성을 강조하는 '김정일 애국주의'를 제창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리더십은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개인의 자질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체계 내에서의 개인의 자질이며, 집단의 관점에서 보자면 구조의 특성이기 때문에, 그 행태는 크게 사회경제적 요인, 외부환경, 개인적 경험 등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김정일은 1970년대 냉전체제 하 중앙집권화된 시스템을 제도화하고 외연적 성장에서 벗어나 내포적 발전을 위한 사상문화적 운동이 요구되던 시기에 등장하여 20년 동안 후계자 경험을 쌓으면서 자신의 리더십을 구축했다. 따라서 그의 리더십 행태는 철저한 조직과 계획적인 지도를 바탕으로 한 준비된 지도자상, 신비주의로 포장된 은둔형 지도자상에 기반해 있었다. 반면, 김정은은 1990년대 중반 이후 기아와 정보유입을 경험한 '고난의 행군' 세대의 개방적 분위기와 민생우선주의, 탈냉전 시기 정상국가화를 요구하는 국제사회의 압력, 그리고 유학생활과 짧은 후계자 경험 등을 바탕으로 리더십 행태를 만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요체는 미숙함, 젊음, 대중친화성, 국제적 감각 등이다.
첫째, "김정은은 '달리면 달리는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는 정부 소식통의 말처럼, 28세의 젊은 지도자는 대담하고 호방하며 자유분방한 파격행보를 하고 있다. 현지지도에서 주민들과 군인들이 김정은의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 그의 부인 리설주와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 등은 김정일 시대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다. 젊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은 직접 탱크에 시승하기도 하고, 놀이기구도 타보기도 하였다.
또한 평양을 방문한 재미교포 사업가에 따르면, 평양 순안공항에 김정은이 사전 무통보, 교통 무통제, 느슨한 경호 상태로 방문해 공항 관계자들을 긴장시켰다 한다. 공개연설을 하지 않았던 김정일과 달리, 김정은은 중요 정치행사에서 서툴지만 공개연설을 하고 있다. 파격의 백미는 지난 8월 18일 우리 군의 사격권 내에 있는 서해 최전방 군부대를 시찰하면서 별다른 경호 병력 없이 소수 측근만을 대동한 채 27마력의 낡은 목선을 타고 이동한 것이다. 준비된 지도자상보다는 담대하고 친근한 지도자상을 보여주려는 것으로 이해된다.
▲ 북한의 김정은 제1위원장이 인민군 552부대 산하부대를 방문해 여자 병사들에게 웃으며 말하고 있다. 관영 KCNA 통신이 배포한 사진으로 날짜 미상이다. ⓒ로이터=뉴시스 |
둘째, 김정은은 김일성이 대중과의 직접적 접촉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는 행태를 답습하고 있다. 김정은의 단상에서 손을 흔드는 모습, 백마를 타는 모습, 머리 모양 등은 김일성을 재현하려는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먼저, 김정은은 세대별 행사를 성대히 개최하면서 그들을 위무하고 그들의 충성을 맹세 받고 있다. 6월 소년단 행사, 7월 전승절 행사, 8월에 예정된 청년절 행사 등에 수만 명의 어린이·청소년, 노병, 청년들을 참석시켜 보고대회, 축포야회, 연회, 음악회, 무도회 등 다양한 행사를 성대히 개최하였다.
다음으로 젊음을 바탕으로 왕성한 현지지도를 하고 있다. 2012년 8월 17일 현재 103회의 현지지도를 하고 있으므로, 이 추세라면 연말에 160회를 초과할 것이다. 김정일은 2007년 이전에는 연 80-90회 정도, 건강이상 이후인 2009년 159회, 2010년 161회, 2011년 145회의 현지지도를 수행했다. 그런데 현지지도 과정에서 김정은은 인민애적 지도자상을 빠뜨림 없이 보여주고 있다. 눈물을 흘리는 군인의 손을 꽉 잡는 장면, 만경대유희장에서 쪼그리고 앉아 직접 잡초를 뽑으며 현장에서 간부들을 꾸짖는 장면, 김정일이 생전에 한 군부대 군인들과 기념사진을 찍겠다고 했다가 지키지 못한 약속을 김정은이 부친을 대신해 지킨 것 등이 대표적이다.
셋째, 은둔형의 지도자인 아버지와 달리, 김정은은 개방적이고 국제적 흐름에 다소 익숙해 있다. 이는 김정은의 젊음과 유학경험 그리고 북한의 경제상황 등에 기인한 듯하다. 반미주의를 국기처럼 여기고 있는 북한에서, 그것도 김정은이 관람한 모란봉악단 공연에서 미키마우스 캐릭터와 미국 영화 '록키' 주제가를 등장시킨 것은 우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동안 퍼스트레이디를 철저히 비밀에 부쳤던 과거와 달리, 리설주를 공개한 것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김정은이 간부들에게 자본주의 방식을 포함한 경제개혁 논의를 촉구하고, "세계적 수준" 또는 "세계적 추세"를 자주 언급한 것도 과거 '주체시대'에는 흔치 않은 현상이었다. 또한 지난 4월 김정은 시대를 개막하는 '축포'인 광명성 3호 발사가 실패했을 때, 예상과 달리 북한은 신속하게 실패를 시인했다. 이러한 모습들은 '예상가능한 김정은' 이미지를 국제사회에 인식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김정은의 리더십 행태는 김정일과 비교한 상대적 변화이고, 질적 변화가 아닌 양적 변화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김정일이 구사했던 것도 있다. 신정권이 출범했으므로 최고지도자의 쇄신 모습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본질은 아직까지 정치·경제적 자원이 덜 소요되는 이미지개선용·생색내기용에 불과하다. 북한의 유일지배 정치문화와 이를 뒷받침하는 생산-수탈구조의 혁신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질적 변화는 요원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확인해할 점은 리더십 행태가 사회경제적 요인, 외부환경, 개인적 경험 등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이고, 그것이 선순환 하도록 우리가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소장 이수훈)가 발행하는 <한반도포커스> 2012년 9·10월호(제20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번 호의 전체 주제는 '김정은 체제의 북한: 어디로 가나?'입니다.
* 원제 : 김정은 리더십의 특징과 전망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