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언론노동조합 KBS 본부(새노조)는 이사 추천 명단에 오른 이길영 현 KBS 감사의 선임을 반대하고 있다. 개인 비리가 많고, 과거 독재정부 시절 정권과 야합한 이력이 있는 인사여서 공영방송사 이사로는 부적합한 인물이라는 게 노조 측 주장이다. 이 감사는 전두환 독재정권 당시 KBS 보도국장을 지냈고 노태우 정부 때는 보도본부장에 재직 중이었다.
정권이 교체된 후 실시돼 온 국민의 관심을 모았던 1989년 국정조사에서 공개된 '문공부-언론인 개별접촉' 문건에 따르면, 이 감사는 독재 후 첫 민간 정부를 선출하던 대선국면인 1987년 5월 13일 문공부 직원과 만나 탈북가족 김만철 씨 회견의 보도 분량을 키워,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호헌 조치에 분노한 민심을 달래기로 작당했다.
새노조는 지난 달 31일 서울 영등포구 KBS 본관 민주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 감사가 언론인 시절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숱한 비리에 연루된 인물이었다고 강조했다. 기자회견 직후 KBS 연구동 새노조사무실에서 <프레시안>과 만난 김현석 KBS 새노조위원장은 "이 감사는 감사 시절에도 KBS를 특정인의 사유물로 만드는 데 앞장선 인물"이라며 "이처럼 결격 사유가 뚜렷한 인물이 이사회에 와선 안 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특히 KBS가 정치권에 독립적인 공영방송으로서 위상을 갖춰가야 한다는 점을 힘줘 말했다. BBC에 버금가는 "KBS 저널리즘"을 세워가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지난 95일의 파업 결과 "조합원들이 제작 자율성의 소중함을 몸소 체험했다"며 앞으로 KBS가 더 나아지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대선을 앞둔 지금 김 위원장은 새노조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대선 공정보도"라며 "KBS가 어떻게 보도하느냐에 따라 판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새노조는 대선 국면에서 파업 당시 <리셋 KBS뉴스>와 같은 특별 프로그램을 만드는 방안도 고민 중이다.
김 위원장은 특유의 부드러운 어조로 대화를 이어갔으나, 입장은 단호했다. 95일에 이르는 파업이, 동아투위 사태 이후 언론인에겐 최악의 시기라는 요즘 국면이 "노조 업무를 마치면 데스크보단 현장에 가고 싶다"는 '천상 기자'를 투사로 만들어가는 듯 보였다. 새 이사진이 확정된 27일, 김 위원장은 인사 결과 해고당했고, 그를 포함해 18명의 새노조 집행부가 중징계를 당했다. 김 위원장은 이번 정권 들어서만 파면에 이어 두 번째로 중징계를 당했다. 다음은 김 위원장과의 인터뷰 전문. <편집자>
▲김현석 KBS 새노조위원장. 1994년 입사한 공채 21기의 18년차 기자다. 최근 KBS는 39기 신입공채 129명을 확정했다. 이들이 18년 후에 맞을 KBS의 모습은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프레시안(최형락) |
프레시안 : 이길영 감사의 이사 선임을 반대하는 이유는 뭔가?
김현석 : 기본적으로 구시대 인물이다. 5공 시절 보도국장을 지냈고, 6공 때 보도본부장이었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5공 시절 인물을 공영방송 이사에 앉히나. 그 뒤 인생을 착실하게 산 것도 아니다. 2008년 대구경북 한방산업진흥원 원장을 지낼 때 친구 아들을 부당 채용하려다 감사원 감사에서 들통 나 감봉 3개월의 징계를 당한 부패한 인물이다. 정치권을 오랜 기간 기웃거리기도 했다. 2006년에는 경북도지사 선거에서 한나라당 김관용 후보 선대본부장과 인수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결격사유가 충분하다.
프레시안 : KBS는 2010년 보도자료를 재인용해 "새노조가 당시 (지금과 같은 논리로) 방통위를 상대로 낸 이길영 감사 임명취소청구소송을 서울행정법원이 각하했다"고 밝혔다.
김현석 : 당시 규정이 미비했다. 당시는 비리혐의로 처분 받으면 3년 이내에 감사실 직원이 되지 못하도록 했는데, 감사는 관련 규정이 없었다. 그래서 각하됐다. 이길영 감사가 지위에 오른 지 몇 달 후에 관련 규정이 만들어졌다. 교묘하게 법을 빠져나갔다.
프레시안 : KBS 감사 시절 활동은 어땠나?
김현석 : (이병순, 김인규 사장이 임명될 당시 노조와 충돌 일선에 섰던) 청원경찰 중 부정을 저지른 분이 있었다. 이 감사가 취임하기 전 감사팀의 특별감사로 이들의 비리가 많이 밝혀졌었다. 그런데 이길영 감사가 온 후 전부 없던 일이 됐다. 새로 감사해서 아무 일이 없던 것으로 됐다. 김인규 사장이 KBS에 입성할 때 도움을 많이 줬다고 볼 수 있다.
▲차기 KBS 이사장이 유력한 이길영 KBS 감사. 그는 옛 한나라당 인물들과 인연이 있다. ⓒ뉴시스 |
김현석 : 절차상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6개월여 간 KBS라는 큰 조직에 감사가 사라지는 상태가 된다. 감사가 없는 한 감시는 불가능하다. 실질 감사업무를 맡는 이가 감사실 직원이 아니라 감사다. 최소 6개월은 일상적인 서류작업 외에는 감사를 할 수 없다.
프레시안 : 연장자가 이사장이 되는 관례상, 이길영 감사가 새로운 KBS 이사장이 될 것 같다.
김현석 : 무조건 안 된다. KBS와 같이 큰 조직 이사회가 양로원도 아니고, 나이순으로 이사장을 뽑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자질이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 투표로 뽑아야 한다. 시기를 감안하면 KBS 이사회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 나이순으로 이사장을 뽑는 관행을 없애라고 새노조가 모든 이사들에게 요구할 예정이다.
"똑같이 방송에 영향 미치려 했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프레시안 : 11월 새 사장이 선임되고, 다음에는 대선이다. KBS는 국내 언론 중 가장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이사회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
김현석 : 제대로 된 사장 선임 절차부터 이사회가 꾸려야 한다. 사장추천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 대통령이 낙점한 이사를 이사회가 추천하는 구태가 반복돼선 안 된다. 이를 위해 이사회가 법 개정에 나서야 한다.
이사회 표결 결과 과반으로 결정하는 사장 선임 기준도 3분의 2가 찬성하는 수준의 특별다수제를 적용하는 식으로 바꿔야 한다.
사장 자격요건도 명확히 해야 한다. 지금은 '정당인'만 아니면 된다. 어제까지 정당인이었다 탈퇴한 사람이라도 문제가 없다. 이런 식은 곤란하다. 특정 캠프 출신 인사는 아예 사장이 될 수 없도록 제한규정을 둬야 한다.
프레시안 : 제도를 어떤 식으로 바꾸든 '낙하산' 사장 논란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정연주 전 사장도 취임 당시 출근저지 대상이 됐다.
김현석 : 흔히 잘못 얘기되기 쉬운 게 '누구나 똑같다'는 프레임이다. 여기에 빠지면 아무 것도 할 게 없다. 소위 말해 '여자는 다 똑같다', '남자는 다 똑같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틀렸다. 모두가 다르다. 정권은 다 다르다.
최소한의 양심을 가진 정권이 있는 반면, 없는 정권도 있다. 이명박 정부는 최악이다. 이를 '이전 정부나 이명박 정부나 같다'고 말하면 본질을 흐리는 것이다. 분명 김대중 정부도, 노무현 정부도 KBS에 영향력을 미치려 했었다. 그러나 이전 정부는 대통령이 얼굴이 빨개져서 기자회견하고 사과했다. 이런 정부와 자기 특보를 뻔뻔히 내려앉히고 '무슨 문제냐'고 하는 이명박 정부는 전혀 다르다. 이처럼 언론장악에 몰두하고, 자기 사람을 심으려 하는 정권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KBS 영향력에 경각심 느껴"
프레시안 : KBS 대선방송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나?
김현석 : 그 문제가 우리 싸움의 핵심이다. 가장 중요한 일이다. 대선방송을 잘 하려고 우리가 복귀했다. 사장 선임보다 더 중요한 게 얼마나 대선 보도를 공정히 할 수 있느냐다. 특히 지금 MBC가 사장 문제 등으로 사실상 대선 국면에서 제 역할을 하기 힘든 상황이 됐다. KBS가 대선을 어떻게 보도하느냐에 따라 판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갖고 있다.
탐사보도팀을 만들었고, 대선검증팀도 신설했다. 대선검증팀은 후보자의 정책, 재산, 비리 여부 등만 전담 검증하는 특별팀이다. 대선공방위도 조직했다. 사장과 위원장이 참여하는 공방위에서 공정성 문제를 즉각 수정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노동조합 내부에서도 대선방송 감시를 강화한다. 단순히 보고서만 내는 게 아니라, 파업 시절 <리셋 KBS뉴스>처럼 관련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국민께 보여드리는 방안을 기획 중이다.
프레시안 : 새노조의 95일 파업투쟁을 이끌었다. 파업이 새노조에 뭘 남겼나?
김현석 : 조합원들이 담대해졌다. '안 되면 또 싸우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콘텐츠본부에서 아나운서 문제가 터졌을 때도 카메라 감독부터 기자까지 다 모여서 피케팅을 하더라. 이제 이런 힘이 모이니 (경영진이) 함부로 못 한다.
▲"대선방송 잘해야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김현석 : KBS 역사상 처음이다. 이 정도로 징계가 일상화된 전례가 없다. 정연주 사장 때도 노조가 출근저지 투쟁을 강하게 했다. 노조위원장이 연임을 반대하느라 철탑에도 올랐다. 그러나 당시는 단 한 명도 징계 받지 않았다.
이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 노조활동 때문에 징계받는다는 걸 누구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런데 2008년 사원행동 이후 내가 파면당했다. 당시 모두가 놀랐다. 이제는 징계를 훈장처럼 여긴다. 워낙 일상화가 됐다. 구노조(KBS 노동조합)도 우리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회사가) 우리만 징계할 순 없으니까, 작년 임금파업 5일 했을 때 구노조위원장도 정직 4개월 받았다.
"언론인이 자각해야"
프레시안 : 파업 국면을 거치면서 '언론인'으로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김현석 : 사장이 누가 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게, 언론인들의 자각이다. 비비씨(BBC)가 BBC일 수 있는 건 조직원들이 언론인으로서 가진 직업의식이 투철하기 때문이다. 최근 언론학 이론도 이 점을 중요하게 본다.
BBC의 조직 지배구조, 사장 선임구조, 모두 KBS 보다 좋지 않다. 거기도 의회가 수신료 문제 간섭하고 정부가 낙하산 사장을 내린다. 그럼에도 BBC가 BBC의 위상을 지키는 건 구성원들의 자각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BBC 저널리즘'이 매뉴얼화돼서 사장이 마음대로 뭘 바꾸질 못한다.
2003년 정연주 전 사장이 온 후 KBS에는 '해방이 주어졌다.' 제작 자율성을 쟁취한 게 아니라 그냥 갑자기 얻었다. 둘은 완전히 다르다. 이번 정부 들어 빼앗기고 나니 이제야 제작 자율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모두가 깨달았다. 탐사보도팀이 그간 권력을 마음 놓고 비판하다 못하게 되니 분노하게 됐다. 그래서 사원행동이 만들어지고 새노조가 출범했다.
이제 우리도 장기간 파업을 거치면서 힘을 얻었다. 조합원들의 의식 수준이 굉장히 강해졌다. 그래서 차기에 어떤 사장이 오더라도 이전과는 달라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힘을 더 키워갈 것이다. 제작 자율성을 쟁취하기 위해 계속 싸워나가야 한다. 나는 긍정적으로 본다. 2003년보다 오히려 지금 여건이 더 좋다. 'KBS 저널리즘'을 만들어 갈 것이다.
프레시안 : 해고가 철회된 후 위원장 임기를 끝내면 어떤 일을 하고 싶나?
김현석 : 기자는 현장에 있을 때가 가장 좋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취재를 많이 했고, 그 다음에는 한-유럽연합(EU) FTA 취재를 했는데, 기자협회장이 됐고, 그 후에는 노조위원장이 됐다. 엄혹한 시기라 어쩔 수 없이 했지만 현장이 돌아가고 싶긴 하다.
그런데 이젠 데스크급이 돼서 복귀해도 현장에 나갈 순 없을 것 같다. 징계받고 춘천으로 내려가 1년 정도 데스크 해봤는데, 나름 잘하는 것 같더라고.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