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가 영세중립국가가 된 1815년을 영세중립의 원년(元年)으로 삼아 한반도 중립화의 조건을 탐색하려는 필자의 방침에 따라, 앞에서 1815년 이전의 중립화론을 펼쳤다. 이제 영세중립 원년(1815년) 이후의 조선 역사 특히 임오군란(1882년)~러일전쟁(1904년) 기간에 제기된 중립화론을 소개하면서 '중립화의 가능조건'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1. 중립화의 가능조건
중립화가 가능하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춰야한다; ① 중립화 대상 국가는 자위력을 갖춰야하는바 군비가 충실해야 하고 이를 뒷받침할 재정자립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② 지정학적 위치가 국제중간지대로서 전략상의 요충이거나 열강 간의 완충지대이어야 한다. ③ 중립화 국가는 대내적으로 중립화를 위한 거족적이며 초당적인 국민적 합의(통합성)가 있어야 한다. ④ 이러한 국민적 합의를 기초로 한 신중하고 일관된 중립외교 정책(대표성)이 뒤따라 국제사회로부터 신뢰와 존중을 확보해야 한다. ⑤ 관련 국제체계상 주변 열강 간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 ⑥ 이러한 세력균형하에서 주변 강대국 간의 이해관계의 일치를 통한 중립화에의 합의와 보장이 있어야 한다. ⑦ 중립화 대상 국가는 주변 국가와 전면전을 감당할 수 없는 약소국으로서 항상 영토적 야심을 갖지 않는 현상유지 국가이어야 한다. ⑧ 중립화 대상 국가는 중립화 관리기구의 감시ㆍ감독ㆍ강제 장치를 통하여 중립화를 관리ㆍ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⑨ 외부세력에 연계된 이념ㆍ사회제도의 이중 구조적 특성을 극복해야 한다. ⑩ 중립화 대상 국가는 군사상의 통로가 아니어야 한다.(박희호, 175~176)
위와 같은 중립화 가능조건에 비춰 임오군란(1882년)~러일전쟁(1904년) 기간에 제기된 한반도 중립안을 유형ㆍ단계별로 분류한다.
2. 유형별 분류
조선 중립화론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 종류로 구별할 수 있다. 즉 (A) '열강 각축'의 와중에서 독립을 유지하는 방편으로서 조선 측의 주체적인 구상, (B) 조선을 침략ㆍ지배하고자 다툰 당사자인 러시아ㆍ일본 양국이 상호간의 세력관계가 불리하다고 느낀 국면에서 표명한 하나의 수단으로서의 중립론, (C) '열강' 간에서 이해조정의 주도권을 쥐고 조선의 정치적 독립을 보장하는 형태로 조선시장의 '문호개방'을 확보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하는 입장에서 표출된 영[영국]ㆍ독[독일]ㆍ미[미국]의 중립론이다. 이 가운데 (B)는 조선의 국가적 독립의 유지를 완전히 부정한 것이다. (B)에 포함되는 것 중에는 '국경지대 중립화' 구상처럼 조선 정부와는 관계없이 침략자들끼리 군사적 협약을 맺으려고 한 경우조차 있다. 즉 (B)는 침략의도를 대전제로 한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C)는 가까운 장래에 직접 영토를 지배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 아닌 만큼, 조선 측에서 보면 위험하기는 하지만 일정한 한계 내에서 이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C)와 (A)는 미묘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중립의 형태로는 일시적인 것과 영구적인 것, 또 스위스 형의 무장중립과 벨기에와 같이 관계국 간의 명시적 내시 묵시적 보장에 기초한 비무장 중립안이 고려되었다. 그중에서 당시의 조선에서 객관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형태는 영구 중립이고 스위스형이 이상적이었지만, 일시에 그것을 가능케 하는 군비를 갖출 수 없는 사정 하에서는 벨기에형이 보다 현실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본격적인 조선 중립화론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885년의 일로, 조선주재 독일부영사 부들러(H. Budler)에 의한 것과 개화파 계열의 소장관료인 유길준에 의한 것의 두 가지가 서로 관계없이 구상되었는데 두 가지 모두 영구[영세] 중립화론이었다. 부들러 안은 천진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구상되었다고 생각되는데, 이는 청일 양국에 의한 조선의 주권침해 사태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을 주안점으로 하였으며, (C)의 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시기에 일본은 청[청나라]과의 세력관계를 의식했기 때문인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등을 시켜 이 안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으나, 원래부터 이 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의도는 아니었다.
유길준의 구상은 (A)의 계보의 기본이 되는 형태로서 일본ㆍ구미 유학에서 얻은 풍부한 지식을 근거로 했다. 그래서 일[일본]ㆍ청ㆍ구미 여러 '열강'이 가진 야욕에 대해 정확하게 정세 판단을 하고, 어느 한 나라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립의 기본자세를 확립하여 벨기에형에 불가리아식의 조건을 가미한 명시적인 국제적 보장하의 영구중립 구상을 전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국제적 보장을 추진하는 주도권을 청국[청나라]이 갖도록 하고, 구미 제국의 합의를 거쳐 러일 양국도 여기에 따르게 한다는 절차를 명시하고 있는데, 이는 사대의식 때문이 아니라 청국 자체가 조선의 중립화를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는 판단에 입각한 것이다.
그 이후 조선 중립화론이 각광을 받은 것은 1894년의 격동기, 청일전쟁, 1895년 가을 일본의 민비 시해사건을 거친 1896년의 국면에 들어서였다. 그 당시 조선 중립화 논의의 주도권을 장악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그것은 러시아의 남하 저지라는 세계전략에 기인한 (C)형의 구상이었다. 그러나 아관파천과 같은 비상사태하에서 조선 정부가 그 구상에 호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897년 2월 고종황제의 환궁 이후 일본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에 의존할 수 없다는 사실, 즉 양국[러시아ㆍ일본]의 침략성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된 왕조권력은 이때부터 진정으로 새로운 외교전략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고종황제 및 왕조권력의 중추부에서는 유길준 안을 기초로 한 (A)의 계보를 흡수하면서, 국제보장하의 영구 중립론을 주축으로 독립유지를 위한 외교 전략의 기본구상이 슬며시 지배적으로 되어 갔다.(양상현, 340~343)
3. 단계별 분류
19세기말에 제기된 중립화론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검토할 수 있다. 첫 단계는 임오군란(1882)을 계기로 시작된 청ㆍ일간의 각축기에 제기된 중립화론이고, 둘째 단계는 청일전쟁 이후 러일전쟁에 이르기까지 러ㆍ일간에 제기된 중립화론이다. 임오군란에서 청일전쟁 이전까지의 안(案)에는 청ㆍ일 대립과 영ㆍ러 견제, 그리고 청일 전쟁 이후에서 러ㆍ일 전쟁까지의 기간에는 러ㆍ일 대립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반영하고 있다.
청ㆍ일 전쟁 이전의 양국 각축기에 청나라는 한반도 중립화안을 내놓은 적이 없다. 청나라가 조선의 종주국이므로, 한반도 중립을 위해 노력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 대신 한반도 지배를 위해 청나라를 견제할 필요를 느낀 일본 쪽에서 한반도 중립화안을 계속 제기했다. 임오군란으로 청ㆍ일 대결의 양극구도가 처음으로 가시화하자 일본에 의한 중립화론이 활발하게 제기되었다(井上馨 안 등 4건).
이어 주변정세가 청ㆍ일ㆍ러ㆍ영의 다극체제 양상을 띤 거문도 사건(1885년) 전후에는 내ㆍ외국인을 막론하고 중립화론을 가장 활발하게 제기했다(부들러의 안 등 7건). 이후에도 상황이 바뀔 때마다 꾸준한 논의가 있었지만 특히 1900년 이후에는 러ㆍ일 간의 균형이 일본 쪽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러시아에 의한 중립화 제의가 4건이나 발생했다. 그 뒤를 이어 고종이 이끄는 대한제국의 주체적인 중립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조선 정부의 중립화 방안 5건).
<인용 자료>
* 박희호「대한제국의 전시국외 중립선언 시말」『國史館論叢』제60집(1994.12)
* 양상현 엮음『한국 근대정치사 연구』(광주, 사계절 출판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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