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행위주체인 북한은 6·15를 "자주통일의 대강"으로 해석하며, 남북관계 단절의 책임을 한국정부에 돌리고 있다. 남남갈등과 남북갈등이 중첩된 형국이다. 때 늦은 '종북'의 전국쟁점화로, 이념적 지형이 협소해지면서, 6·15도 종북의 기억이 될 처지다. 이익과 보편적 가치에 입각한 협력과 이념적 추종이 구분되지 않는 사태의 전개다.
2011년 여론조사의 결과도 이 갈등의 전환이 쉽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6·15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를 묻는 질문에, "성과가 있다"가 36.3%, "성과가 없다"가 63.7%였다. 2010년보다 부정적 인식이 증가했다.
인구사회학적 특성을 보면, 모든 연령대에서 "성과가 없다"는 응답이 많았고, 특히 50대에서 부정적 인식이 가장 많았다. 지역별로는, "대전/충청", "부산/경남", "대구/경북" 순으로 평균보다 높게 "성과가 없다"는 응답을 했다. "광주/전라/제주"에서만 "성과가 있다"와 "성과가 없다"가 팽팽했다. 19대 총선에서 나타난 정치적 지지와 비슷한 분포다.
질문의 핵심이 성과가 있느냐의 여부이지 6·15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은 아니기 때문에 조사시점에서의 남북관계가 여론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개성공업지구를 제외하고는 남북관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6·15의 성과는 당연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남북관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현재를 정당화하고 미래의 전망을 공유하고자 하는 기억투쟁은, 어떤 세력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느냐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질 수 있다. 누가 어떻게 기억하는가에서 권력의 효과를 배제하기는 힘들다. 권력의 담론과 정책이 현실을 만들고, 그 현실이 기억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억투쟁은 권력투쟁일 수 있다. 그러나 6·15를 생산한 세력이 권력을 다시 장악한다고 해서 기억의 기원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들어진 현실이 기억의 기원을 사라지게 한다. 권력을 잡으면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는 과거지향적 권력결정론으로는 정치적 지지를 획득하기 어렵다. 미래전망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6·15의 성과에 대한 시계열 조사를 보면, 2005년 시점에서 "성과가 있다"가 39.8%이고 "성과가 없다"가 60.2%다. 6·15를 계승한 노무현정부 때의 조사결과다. 2000년과 2001년의 조사결과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2005년 이후로는 대답 항목 가운데 "별로 성과가 없다"가 가장 많다. 이 반전의 근저에는 북한 핵문제가 있다. 핵문제가 불거지면서 6·15의 성과는 부정적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북한은 2005년 2월 핵무기 보유를 선언했다. 그리고 2006년 10월 핵실험을 했다. 노무현정부 시절이었다. 2009년 5월 북한은 두 번째 핵실험을 했다. 북한과 비밀대화는 했지만 강압정책을 기조로 삼은 이명박정부 때다. 북한은 2012년 4월 헌법개정을 하면서 전문에 "핵보유국"을 명시했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정부가 대면해야 했던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업적 가운데 하나로 핵보유국을 내세운 것이다. 핵확산금지레짐 하에서 핵무기 보유를 인정받는 것은 아니지만, 사상 유례가 없는 핵보유의 헌법화는 북한의 핵무기에 대한 의지를 읽게 하는 부분이다. 결국, 따뜻한 '햇볕'도 차가운 '바람'도 북한의 핵실험과 핵보유를 막지 못했다.
▲ 2009년 광명성 2호 발사 장면. ⓒ연합뉴스 |
물론, 북한의 핵실험과 핵보유가 한국정부의 대북정책 및 남북관계와 직접적 인과관계를 가지는 것은 아닐 수 있다. 국제관계, 특히 북미갈등이 북한의 핵무장을 초래한 원인일 수 있다. 북한의 내적 세력균형정책도 한 몫 했을 것이다. '햇볕'을 탓하거나 '바람'을 탓한다면, 한국정부가 무능력하거나 북한에 대한 지렛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햇볕'은 억울할 수 있다. 남북의 화해협력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남한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2002년 10월 미국이 북한의 고농축우라늄에 의한 핵개발 의혹을 제기하면서 북미 제네바합의가 파기되었기 때문에, 북한이 핵실험과 핵보유로 나아가는 길을 막지 못했다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기회의 시간은 있었다. 북한은 2003년 초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즈음하여 '핵억제력'을 공식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했다. 1980년 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에서 북한은 외교정책의 기본이념을 설정하면서 세력균형이 평화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제2차 북핵위기와 이라크전쟁이 맞물리면서 북한은 핵억제력과 힘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전개하기 시작했고, 이는 핵무장을 정당화하는 담론이었다.
북한은 2003년 1월 핵비확산레짐을 탈퇴했고, 2003년 4월에는 북미중 회담에서 비공식적이지만 핵보유를 시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때 한국은 정치권력의 교체기였다. 5년 단임의 대통령제 하에서 노무현정부는 전임 김대중정부의 대북정책을 재검토했고, 단기간에 6·15와 6·15시대의 공백이었던 한반도 평화체제와 군사적 협력의 부재를 해결할 능력은 없었다.
바로 이 때, 핵문제는 다시금 남북관계가 아니라 북미와 북미중의 의제가 되었다. 핵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한반도 평화체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노무현정부는 6자회담을 지속하면서 동시에 남북의 기능주의적 협력이 군사적 협력으로 침투확산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2007년 10·4정상회담은 그 성과였지만, 5년 단임의 대통령제 하에서 이 정상회담과 합의는 너무 늦은 결정이었다.
전임 정부의 대북정책을 부정하고 새로운 대북정책을 제안해야 했던 이명박정부는 비핵을 남북관계의 첫 단계로 설정하는 '비핵·개방 3000'을 대북정책으로 내세웠지만, 이미 비핵은 남북관계의 의제가 아니었다. '바람'의 강도를 높였지만, 강도를 높이면 높일수록, 상대방은 협상 또는 구성이 아니라, 순응이나 굴복 아니면 저항이라는 양자택일적 선택을 하게 된다.
6자회담조차 2008년 12월 이후 중단된 상태에서, 남북은 동맹을 강화하고 군사력을 증강하는 밖과 안에서의 세력균형정책을 선택하는 고전적인 안보딜레마 게임을 했다. 북한은 우라늄농축을 공개하고 핵무기 운반체인 로켓을 실험하고 결국은 핵보유를 헌법화했다. 북한은 미국에게 핵국가 지위를 요구하면서도, 다시금 식량지원과 핵개발 중단을 교환하는 2012년 2·29합의에 이르렀지만, 그 합의의 실행은 불투명한 상태다.
'바람'은 핵문제를 남북관계의 의제로 만들지도 못했고, 북한의 핵관성을 강화했을 뿐이다. '바람'은 냉전의 기억을 불러 왔지만, 6·15의 기억을 완전히 지우지도 못했다. '햇볕'에서 탄생한 '개성공업지구'는 '바람'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2012년 하반기는 대통령선거 국면이다. 2013년이면 또 5년 단임의 대통령제 하에서 새로운 정부를 맞이하게 된다. 선거에 참여하는 정치세력들은 선거과정에서 그리고 집권 이후에 다시금 6·15의 기억을 둘러싼 쟁투를 벌이게 될 것이다. 그 쟁투는 탈냉전시대 한반도의 평화와 복지를 위한 '외교안보독트린'을 둘러싼 논쟁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기초하여 핵문제의 해법이 제시되어야 한다.
냉전을 그리워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이고 냉전으로 복귀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6·15와 6·15를 포함한 남북합의는 탈냉전시대 외교안보독트린의 한 구성요소로 기억되어야 한다. 사실 작금의 한반도 국제정치의 구조는 과거와 같은 냉전도 아니고 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없다. 미중은 외교안보의 측면에서 서로 갈등하고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조밀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만약 미중이 과거와 같은 냉전으로 회귀한다면, 세계경제는 파국으로 치닫게 될 것이고, 열전이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국이 안보와 경제 양 측면에서 냉전시대의 적처럼 중국을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국가이익을 생각한다면, 한반도 평화를 목표로 하는 균형외교 또는 연미화중(聯美和中)은 외교안보독트린의 최소 공약수다. 국제정치경제질서의 변화를 고려하지 못하고 선거에서 정치적 지지세력의 획득을 위해 종북담론을 동원할 경우, 보수든 진보든 '종북의 덫'에 빠지게 될 것이다.
종북은 냉전적 대립구도의 산물이고, 냉전적 인식의 잔존태다. 보수가 종북을 활용한다면, 스스로 냉전의 늪에 빠지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진보에게 종북논란은 스스로의 대북정책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와 복지를 위해 균형외교를 모색한다면, 6·15와 6·15를 포함한 남북합의는 균형외교를 위한 자산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정부는 탈냉전시대 외교안보독트린의 정책적 추진력을 확보할 수 있다.
한반도 평화의 길에서 관건이 될 핵문제 해법과 관련하여 새로운 정부는 과거 정부와 다른 상황과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첫째, 북한은 핵보유를 헌법화했다. 북한의 핵포기는 개헌을 필요로 한다. 전형적인 세력균형정책의 극단적 형태다. 북한은 핵운반체의 발사, 핵지휘 및 통제체제의 실험, 핵탄두의 소형화와 같은 핵능력 강화를 위한 선택지를 협상의 도구로 활용할 것이다.
둘째, 북한 및 북핵이 동아시아지역에서 미중관계가 협력으로 갈 것인가 갈등으로 갈 것인가가 결정하는 주요 변수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한국의 선택이 이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명박정부에서 또 다시 임기 5년차에 추진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는 한미동맹의 재편 및 한일 군사협력은 미중관계를 갈등으로 몰고 가는 대표적 정책이다. 셋째, 기능주의적 협력을 군사적 협력으로 이끌지 못한 6·15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핵문제는 냉전의 해체 이후 한반도의 세력균형이 무너지면서 발생했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탈냉전시대에 접어들면서 북한은 미국에 버금갈 정도로 강한 세력균형적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위기의식의 소산이다. 세력균형을 평화로 생각한다면, 북한의 핵을 억지할 방도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북한이 스스로 굴복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핵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핵을 인정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한반도 평화가 세력균형이 아니라면, 세력균형정책에 세력균형정책으로 맞서는 치킨게임을 탈피해야 한다. 한반도 국제정치 행위자들의 세력균형적 인식을 넘어서게 할 수 있을 때, 핵문제 해결의 길이 열리게 된다. 6·15는 기능주의적 협력을 통해 세력균형을 넘어서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낳기도 했다. 강압정책은 오히려 북한의 핵관성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서로의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훈풍'의 외교안보정책을 생각해야 한다. 기능주의적 협력을 통해 개성공업지구와 같이 역전불가능한 이익에 기초한 협력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가면서 동시에 안보와 안보의 교환을 제도화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정답은 '한반도 평화체제'(peace system)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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