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이 있는 변절은 감동을 준다
하지만 군사정권이 주입한 '휴전선 너머에는 승냥이떼가 산다'라는 신념을 여전히 꺾지 않고 있다면? 혹은 일제 강점기에 주입된 신념을 계속 유지하는 어른이 있다면? 이런 경우라면, 참 곤란하다. '변절'을 적극적으로 권할 일이다. 굳이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어도, 10대 또는 20대 시절 품었던 생각을 조금도 바꾸지 않고 지내는 이들이 있다면, 누구든 적당한 변절을 권하고 싶어질 게다.
세계관, 가치관은 현실의 변화와 함께 끊임없이 다듬어지고 변화하는 게 옳다. 물론, 이 과정에는 성찰이 있어야 한다. 또 대중적 영향력이 있는 이들이라면 소신의 변화를 설명하는 논리를 갖춰야 한다. 그게 책임 있는 자세다. 글머리에서 예로 든 이들이 볼썽사나운 이유는 자신들의 극단적인 변화를 설명하는 논리가 워낙 옹색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제대로 된 변절, 성찰이 있는 변절은 깊은 감동을 준다. 주변 사람들에게 반성의 계기를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위인전 속 인물들은 종종 이런 종류의 변절자들이었다. 지금껏 품었던 생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도, 낡은 생각을 고집한다면 비겁한 짓이다. 설령 조금 거칠고 엉성해도, 그래서 욕을 먹더라도 새로운 현실에 어울리는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는 용기. 그걸 지닌 이들이 많았다면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제국주의 일본에게 국권을 뺏기지 않았을 것이다. 또 이런 용기를 지닌 이들이 많았다면, 1980~90년대에 무수히 생겨난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은 지금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 게다.
돌고 도는 논쟁
뜬금없는 '변절 예찬'을 길게 늘어놓은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최근 <프레시안>에선 '한국 경제 성격 논쟁' 기획이 진행 중이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 이종태 <시사IN> 기자 등의 주장이 한축이다. 또 이들이 비판대상으로 삼는 개혁 성향 경제학자들이 다른 한축이다. 재벌개혁, 박정희 정권에 대한 평가, 산업정책의 중요성 등에 대해 상당한 이견이 있다. 그리고 이런 차이를 놓고 벌어지는 논쟁은 한국 경제의 성격과 나아갈 방향에 대해 다양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이점을 높이 사는 독자들이 많다.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해당 지면을 담당하는 기자 입장에선 아쉬움이 있다. 장하준, 정승일, 이종태 등의 문제제기는 크게 새롭지 않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가 지적했듯, 이들의 문제의식은 2001년 발족한 대안연대회의 활동 속에서 이미 잘 드러났다. 이들의 비판 대상인 장하성 고려대 교수, 김상조 한성대 교수 등은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현 경제개혁연대)를 중심으로 소액주주운동을 해 왔다. 지금 벌어지는 논쟁은 과거 대안연대회의와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과 상당부분 겹친다. 물론, 새롭지 않다는 게 꼭 비난받을 점은 아니다. 과거의 논쟁을 현실 속에서 다시 조명하는 게 필요한 때도 많다. 어차피 역사란 중요한 쟁점이 반복되기 마련이다.
경제의 대세가 바뀌었는데, 왜 '변절자'가 안 나올까
하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논쟁이 태동한 2000년대 초와 지금 사이에는 결정적인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2008년 금융 위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세계 자본주의의 성격이 바뀌었다. 이와 함께 외국에선 숱한 사회과학자들이 기존 입장을 바꿨다. 예컨대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냈으며 미국 민주당의 이데올로그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던 로버트 라이시 미국 UC버클리 대학 교수는 2008년 이후 확실히 좌회전 했다. 금융위기 이후에 출간된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에 담긴 그의 목소리는 전작인 <슈퍼자본주의>, <부유한 노예> 등과 확연히 다르다. 어찌 보면 '작은 변절'인데, 이런 변절자가 미국, 유럽 등에선 제법 흔하다.
그런데 유독 한국에선 이런 변절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 상아탑 안에만 머물렀던 학자들은 어쩔 수 없다 치자. 그들은 어차피 현실과 거리를 둬 왔다. 그러나 현실에 깊이 개입했던 학자들이 현실의 거대한 변화 앞에서도 아무런 생각 변화가 없다면, 그건 심각한 문제다. 현실은 바뀌는데 생각은 그대로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이 그렇게 망했고, 1980~90년대 운동권이 그렇게 망해가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과잉과 구자유주의의 결핍, 저울은 어디로 기울어야 할까
물론, 생각 변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를 이끌었던 김상조 교수의 경우, 최근 출간한 <종횡무진 한국 경제>에서 그간 진행한 소액주주운동을 통렬하게 반성했다. "지난 10여 년간 진행된 이른바 영미식 주주 자본주의 모델 중심의 지배 구조 개선 노력이 후하게 평가돼도 여전히 갈 길이 먼 상황에서 헤매고 있으며, 박하게 평가하자면 정상 궤도를 이탈해 사실상 실패"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2008년 이후 전개되는 세계경제의 지각변동과는 별개 차원이다. 그 이전부터 예정돼 있던 반성이었다. <종횡무진 한국 경제>에서 김 교수는 '신자유주의의 과잉' 못지않게 '구(舊) 자유주의의 결핍' 역시 심각한 문제로 꼽았다. 읽기에 따라서는 후자를 더 심각하게 본다는 느낌도 받는다. 2008년 이전이라면, 이런 입장이 꼭 어색하지는 않다. 그러나 2012년 한국이 취해야 할 방향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적어도 2008년 이후라면, '신자유주의의 과잉'이 낳은 폐해에 더 치중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
물론, 김 교수가 강조하는 투명성과 책임성의 원칙은 꼭 구자유주의적 개혁과제라고만 볼 수 없다. '신자유주의의 과잉'이 낳은 폐해를 치유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장치다. 기득권층의 로비가 법치와 시장 규율을 조롱하는 장면은 충분히 익숙하다. 삼성 등 재벌이 법을 농락하며 군림하는 상황은 이런 현실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그러나 <종횡무진 한국 경제>의 입장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실 앞에선 조금 한가한 감이 있다. 고름이 터져서 응급처치를 요하는 환자 앞에서 '평소 운동을 열심히 하고 술, 담배를 멀리 하면 건강해진다'고 말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경제개혁연대는 창립 당시 "거대담론의 실패 경험을 되풀이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성공의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확립해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한다"라고 천명했다. 이런 입장은 지금까지 견고하게 유지돼 왔고, 큰 성과를 거뒀다. 거대재벌 삼성의 급소를 콕 짚어내 압박했던 여러 사례는 관성에 젖은 기존 운동권이라면 기대하기 어려웠던 성과였다. 소규모 시민단체가 재벌을 상대로 공익소송을 벌여 높은 승소율을 기록했다는 점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거대담론에 대한 대중의 수요, 지식인은 응답해야
하지만 이제는 거대담론을 외면할 수 없는 때가 된 것 아닐까. 적어도 지식시장에선, 거대담론에 대한 수요가 뚜렷하다. 철학서적인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가 된 현상, 장하준 교수의 저술이 잇따라 화제가 된 현상 등이 그 방증이다. 과거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류의 책에 열광하던 이들이 이제는 자본주의의 역사를 다룬 장하준 교수의 책을 읽는다. 대중이 보기에, 지금의 세계경제는 재테크 서적의 얄팍한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변화를 겪고 있다. 변화의 방향을 이해하고픈 욕망은 당연한 것이고, 그래서 '큰 이야기', '역사적 접근' 등을 다룬 책을 찾아 읽는다.
거대담론에 대한 수요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현실에 참여하는 지식인은 응답할 의무가 있다. "구체적인 성공의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확립"하는 일은 앞으로도 꾸준히 해야 한다. 그러나 "거대담론의 실패경험"을 경계하는 논리가 지금도 타당한지는 의문이다. 지금 대중이 요구하는 거대담론은 1980년대의 사회구성체 논쟁처럼 공허한 게 아니다.
제대로 된 거대담론에 기반한 설명이 필요한 사례는 현실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예컨대 2008년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던 아이슬란드는 이후 강력한 긴축정책을 취하는 한편, 가계부채에 대해서는 파격적인 탕감정책을 취했다. 그리고 아이슬란드는 상대적으로 순조롭게 위기를 극복하고 있다. 1000조 원에 가까운 가계부채를 안고 있는 한국 입장에선 눈길이 가는 사례다. 그런데 긴축에 반대하는 입장, 또는 도덕적 해이를 우려하는 입장 등 기존의 전형적인 분석틀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결국 정치적 정당성과 경제적 효율성을 폭넓게 아우르는 논리가 필요하다.
기존 주류경제학의 처방이 힘을 잃은 상황에서 새로운 논리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이, 지금 필요한 거대담론이다. '공동체의 위기 앞에서 우리는 어떤 원칙을 앞세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결코 간단치 않다. 신자유주의 이후를 전망하는 거대담론에 대한 토론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재벌이 뭐가 아쉬워서 타협하겠나
거대담론을 원하는 대중에게 때 마침 스케일 큰 논리를 제공했던 그룹이 장하준·정승일·이종태 등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아쉬운 점이 있다. 이들이 비판하는 진영의 논리에 비해, 이들의 주장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가 쉽다. 딱딱한 법률 용어가 상대적으로 덜 쓰인다. 대중적인 반향이 컸던 한 이유일 게다. 그러나 그만큼, 대중이 직관적으로 느끼는 문제점에 대해서도 책임 있는 설명을 할 필요가 따른다. 대표적으로 지적되는 문제가 "재벌 총수가 뭐가 아쉬워서 타협 하겠나"라는 것이다. 물론, 이름 모를 외국계 투기자본이 국내 대기업을 장악하는 것보다는 지금의 지배구조가 낫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재벌과의 타협이 가능하다'는 입장으로 연결 짓는 건 비약이다. '재벌이 현 상태에서 벗어나 다른 타협점을 찾게끔 압박할 수단이 있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전히 모호하다.
경제개혁연대라면, 이 질문 앞에서 할 말이 있다. 현행 재벌 지배구조가 지닌 법적 맹점을 공격하는 것이고, 이는 자유주의적인 개혁 과제를 중시하는 이 단체의 입장에도 부합한다. 하지만 장하준·정승일·이종태 그룹이 내놓은 입장은 '복지국가 진영의 정치세력화 및 집권', '정치 사회적 압력', '노동조합 강화' 등 막연한 수준이다. 재벌의 로비는 강력한데, 그들을 통제할 힘은 극히 미미한 게 현실이라면, 장하준·정승일·이종태 그룹은 보다 구체적인 재벌 압박·통제 장치를 제출할 필요가 있다. 이 대목에 대한 정교한 논의가 빠진다면, 이들의 주장은 지속적인 신뢰를 얻기가 힘들다.
기업집단법 제정, 보험산업 개혁…공통점도 많다
아쉬운 대목은 또 있다. 역시 독자들이 자주 지적하는 문제다. 이들 그룹은 여러 차례에 걸쳐 김상조, 유종일 등 개혁 성향 경제학자들을 비판해 왔다. 소유권에 바탕한 자유주의 논리가 연대에 기반한 사회민주주의 정치가 성장하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혁 성향 경제학자들에 대한 장하준·정승일·이종태 그룹의 비판은 상당히 소모적이다. 이들이 비판 대상으로 삼는 학자들이 장하준·정승일·이종태 그룹과 과연 얼마나 다른가. 예컨대 장하준, 김상조 사이의 거리가 주주자본주의를 온전히 지지하는 다른 경제학자와 김상조 사이의 거리보다 과연 멀까. 원고 청탁 및 취재차 만난 경제학자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그렇지 않으리라는 대답이 압도적이었다.
실제로 찾아보면, 이들 집단 사이에는 공통점이 꽤 많다.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이 지적했듯, 양 측은 모두 '기업 집단 법' 제정을 주장한다. 현행 재벌 지배 구조가 책임과 권한이 일치하지 않는 모순이 있다는 점에는 다들 공감하는 것이다. 또 장하준 교수는 보험 산업이 복지 강화의 걸림돌이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맥락은 다르지만, 김상조 교수 역시 삼성생명 등 보험 업계의 문제점에 대해 꾸준히 지적해 왔다.
경제와 노동, 복지를 아우르는 포괄적 접근이 지닌 효용
차이점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접근은 논점을 선명하게 하는 데는 이롭지만, 양 측의 공통분모를 확대하는 논의를 가로막는 면도 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은 장하준·정승일·이종태 그룹의 장점을 살리는데도 해롭다. 이들 그룹의 대표적인 장점은 협소한 주류 경제학 논리에 얽매이지 않는 포괄적 접근이다. 예컨대 정승일 박사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공정 거래 문제에 대해 '최저임금 인상'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정운찬 전 총리를 비롯해서 이 문제에 천착했던 경제학자들에게선 나오지 않았던 접근방식이다. 그러나 대기업의 하청 관행이 많은 경우 인건비 절감 차원에서 생겨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 박사의 접근 방식은 상당히 일리가 있다. 대기업이 하청 업체를 값싼 노동력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생긴 문제인데, 최저임금 인상은 이런 경우를 줄이도록 하는 압력이 될 수 있다. 정 박사는 여기에 복지 차원의 접근도 곁들인다. 인상된 최저임금을 줄 수 없는, 경쟁력 없는 하청업체는 도산할 수 있는데, 여기서 발생하는 실업자를 위한 사회안전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경제와 노동, 복지 영역이 톱니바퀴처럼 맞아 돌아가야 가능한 해법인데, 장하준·정승일·이종태 그룹은 이런 접근에서 강점이 있다. 이런 식의 접근에선 기존 경제민주화 담론에서 소외됐던 노동운동 진영, 복지운동 진영이 설 자리가 생긴다. 민주노총이 중소기업 문제에 대해 개입할 수 있게끔 하는 논리적 근거가 생긴다는 뜻이다. 이처럼 연대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게 장하준·정승일·이종태 그룹의 장점이고, 변호사와 경제학자들만의 운동에 머무른다는 비판을 받는 게 과거 소액주주 운동의 한계였다. 그렇다면 장하준·정승일·이종태 그룹은 자신들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생각이 다른 이들과 만날 수 있는 접점을 확대하는 게 옳다.
생산적인 변절을 기대한다
이처럼 포괄적인 접근은, 다른 한편으로 주류 경제학자들의 외면을 낳은 요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주류 경제학자들의 이런 태도가 꼭 옳은지는 의문이다. 거시경제학의 시조이며, 1930년대 공황에 대한 해법을 제시했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 역시 정통 경제학자는 아니었다. 대학 전공은 수학이었고 박사 학위도 없었으며, 대부분의 경력을 대학이 아닌 관청에서 쌓았다. 하지만 지금 경제학 역사에서 케인스의 역할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대공황에 버금가는 위기를 경고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논쟁은 '어느 쪽이 더 정통 경제학 이론에 부합하느냐'가 아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기존 경제학 이론의 권위가 흔들린 것 역시 사실이다. 지금 필요한 건 '위기 앞에서 가장 실용적인 해법이 무엇이냐'를 따지는 논쟁이다.
현 정부 들어서 '실용'이라는 표현에 조금 부정적인 어감이 깃들게 됐다. 그러나 공동체의 위기 앞에서 실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건 적어도 정책에 관한 논의에선 나쁜 게 아니다. "우리는 장기적으로 모두 죽는다"라고 한 것 역시 케인스였다. 경제학자가 할 일은 구체적 현실에 대한 구체적 처방이라는 것. 장기적으로 체질을 개선하자는 식의 주장은 경제학자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게다. 구체적 현안을 둘러싼 논쟁에선 늘 한결 같은 입장을 취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가장 실용적인 해법을 찾다보면, 기존 입장을 뛰어넘는 경우는 다반사로 생기기 마련이다. 어찌 보면 '변절'이지만, 생산적인 변절이다. 향후 전개될 '한국경제 성격 논쟁'에서 생산적인 변절이 종종 나타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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