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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금 문제 해결이 급한가 재벌규제가 급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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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등록금 문제 해결이 급한가 재벌규제가 급한가?

[한국 경제 성격 논쟁] 장하성 등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에 답한다

2년 전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 이슈를 계기로 불붙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복지국가 담론에 찬물을 끼얹는 주장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것도 진보적으로 분류되는 인사들로부터이다.

며칠 전 고려대 장하성 교수는 <조선일보> 칼럼에서 우리처럼 복지국가를 주장하는 것은 한국 사회와 경제의 현 상황을 볼 때 '너무 한가한' 논의라고 비판하였다. 복지국가보다 더 우선하는 급선무는 '시장경제의 기본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며, '공정한 틀에서 경쟁하는 공정한 시장 경제의 틀을 갖추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언젠가 '다음 세대에는' 복지국가에 관하여 고민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너무 한가한 논쟁'이라고 한다.

이병천 교수 역시 비슷하게 '삼성 동물원 상황을 극복하는 재벌개혁'이 복지국가 논의보다 시급한 과제라고 말한다. 정태인 원장 역시 '재벌 개혁의 부진으로 인해 발생하는 시장경제 기본질서의 파괴'가 가장 시급한 문제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복지국가를 만들 수 없다고 말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는 지난 3월 초 "복지라고? 천만에 공정이다"는 제목의 <한겨레> 칼럼을 통해, 복지보다 시급한 것은 재벌 개혁 등을 통한 공정·공평 원칙의 구현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렇듯 이른바 개혁적 진보에 속하는 대표적 지식인들이 입을 모아 '시장 경제의 기본 질서' 창출이 보편적 복지와 복지국가보다 더 시급한 우선적 과제라고 말하고 있다.

등록금·주거난 해결과 출자총액제한, 무엇이 더 시급한가?

그렇지만 나는 이들의 한국 사회 진단에 동의하지 않는다. 평범한 시민들의 관점에서 볼 때, 예컨대 연 1000만 원에 이르는 과중한 대학생 등록금 문제의 해결이 시급한가, 아니면 출자총액제한과 순환출자를 통한 재벌규제가 더 시급한가? 당연히 등록금 문제 해결이다. 게다가 등록금 문제뿐이랴. 대학생 당 연 1000만 원에 이르는 생계비 문제는 또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런 과제들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과제다. (그래서 내가 일하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라는 교육운동 시민단체와 공동으로 '대학생 등록금 및 생계비 전액의 무이자 후불제 대출'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에 필요한 정부예산 마련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어디 그뿐이랴. 100만의 대학생과 1000만 명의 20-30대 남녀들이 심각한 주거난에 신음하고 있다. 월 40만 원을 내며 좁아터진 고시원 방구석에서 살아가는 청춘 남녀들, 월 50~70만 원에 달하는 자취방 또는 하숙집에서 숨 막히게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주거난을 해결하는 일이 출자총액제한과 순환출자 금지보다 덜 시급하고 덜 중요하다는 건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제에 진보적인 정당들과 시민단체들이 총력을 기울여도 모자라는 판이다. 청춘 남녀들이 직면한 이런 문제의 해결에 필요한 연 10~20조 원의 신규 복지 예산을 어떻게 조달한 것인지(부자 증세 등을 통해)를 모두 논의하고 고민해도 모자라는 판이다.

게다가 이런 일을 국회의원과 관료들이 알아서 해결해줄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청춘 남녀들이 스스로 들고일어나야 한다. 국회와 행정부, 대통령이 이런 일들을 하도록 압박해야 하고, 따라서 대학생과 청춘 남녀들을 이런 등등의 복지국가 이슈를 중심으로 널리 조직하고 교육시켜 나가야 한다. 이와 유사한 대중적 복지국가 운동을 노인복지와 여성복지, 초중고 교육 등의 영역에서도 광범위하게 벌여 나가야 한다.

또한 기존의 대기업 중심, 정규직 중심 노동운동을 어떻게 환골탈태하게 하여 중소기업 노동자와 비정규직들도 함께하는 노동운동으로 만들어낼 것인지,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도 어떻게 하면 기존의 기업별 사내복지 체제를 국가적, 보편적 복지 체제로 바꿀 것인지를 고민하여야 한다. 이 모든 새로운 복지운동, 새로운 노동운동이야말로 진보의 가장 시급한 과제이고, 이것을 하나로 집약하는 것이 바로 복지국가 운동이다.

수백만, 수천만의 평범한 청춘 남녀들과 청소년들, 시민들, 현장 노동자들, 여성들과 노인들이 자신들의 고단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삶을 개선하는 데 직접 참여하는 거대한 대중운동, 이것이야말로 한국 진보 운동의 지난 수십 년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빠져 있는 '진보 운동의 기본 질서'이다. 따라서 복지국가의 기본 질서를 창출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나라 진보의 가장 시급한 과제다.

출자총액제한과 집중투표제, 순환출자 금지와 같이, 일반인들은 알아먹기도 힘든 어려운 전문가적 용어로 이야기하는 일부 진보 엘리트들이 주도하면서 수백만, 수천만 명의 평범한 사람들을 진보 운동의 '주체'가 아니라 '구경꾼'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전형적인 자유주의 엘리트 방식의 운동이다. 진보적 자유주의 역시 마찬가지이다.

복지국가야말로 공정·공평의 원칙이 구현되는 나라

장하성 교수는 <조선일보> 칼럼에서 재벌과 학벌 등이야말로 선진국과는 달리 한국 사회에서 빈부격차 심화와 대·중소기업 간 양극화 심화 같은 것을 심각하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재벌개혁 등을 통해 한국경제의 '천민적' 요인들을 제거하고 '정상적' 자본주의를 만들어 '시장경제의 기본 질서'를 확립하게 되면, 기회의 평등 즉 '공정한 경쟁 기회'가 보장되어 사회양극화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한다.

김동춘 역시 비슷하다. 그는 한국이 정말 살 만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공정·공평의 원칙이 지켜지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오늘날 20-40 세대의 78퍼센트는 부모의 지위가 계층을 좌우하며 패자부활이 없는 사회,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는 사회가 오늘날의 한국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김동춘은 "이처럼 사회가 여지없이 파괴되었는데, (복지) 예산으로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 불공정에 신음하고 있는 99퍼센트의 사람들이 일할 의욕을 느껴야 한다. 우선 망가진 사회를 바로잡은 다음 그 바탕 위에서 우리는 복지·평화·공생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공정·공평의 원칙을 세운 후 비로소 그것을 기반으로 복지국가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부모의 소득과 계층이 그 자식들의 소득과 계층으로 대물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패자부활이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도, 가장 시급한 과제는 복지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노동민주화와 보편적 복지가 이루어지는 복지국가야말로 '불공정'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실질적인 해법이다.
▲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 ⓒ프레시안(최형락)

정의란 무엇인가? 공정이란 무엇인가?

정의와 공정·공평의 의미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 등 각기 다른 정치 경제 사상과 세계관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장하성과 김동춘 교수 등이 말하는 것은 자유주의에 입각한 정의론이다.

자유주의자들은, 보수적 자유주의건 진보적 자유주의건 관계없이, 정의와 공정·공평을 '경쟁'의 테두리 안에서 이해한다. 즉 개인들 간, 기업 간, 정당 간의 경쟁(대립)에 있어 그 경쟁이 절차 또는 형식상 공정·공평하게 이루어지면 그것을 '정의롭다'고 말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은 형식적, 절차적 공정·공평이야말로 정의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공정한 경쟁' 즉 '기회의 평등'(기회의 공정성)이야말로 자유주의가 말하는 핵심적 가치이다.

형식적·절차적 평등을 가장 중시하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당연히 '복지보다 우선적인 것은 공정·공평'이라고 말하며, '복지 국가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특권과 특혜의 철폐'라고 주장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즐겨 말하던 '반칙과 특권이 없는 사회' 역시 일종의 자유주의적 정의론이다. 요즘에는 문재인과 이해찬 등 친노 인사들 역시 이러한 정의관을 자주 표방한다.

그렇지만 나 같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개인 간, 기업 간 경쟁이 제 아무리 그 형식 및 절차상 공정·공평하게 이루어진다고 해도 빈부격차 심화와 대·중소기업 간 양극화는 막을 수 없다고 본다. 예컨대 아무리 공정한 시장 경쟁 절차가 준수된다고 하더라도 10개의 신생 벤처기업들 중 9개가 파산하고 1개만 생존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그 9개 파산 업체의 창업주와 종업원들이 실직자가 되는 것도 불가피하다. 그런데 만약 획기적인 고용보험, 그리고 그 자식들에 대한 '대학까지 무료 공교육과 학생 생계비 보조 혜택', 그리고 저렴한 주택복지 등의 복지국가 정책이 없다면, 그 가족들마저 모두 인생 파탄의 위험에 직면할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복지국가의 도움 없이 이들을 위한 '패자 부활전'이 가능하다는 것인가?

복지국가 - 대기업 정규직의 불공정 특권을 해체하는 실질적 방법

자유주의자들은 예컨대 열심히 자진해서 공부한 서울대 출신 직장인이 연소득 1억 원을 받는 데 반해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던 지방대 출신 직장인이 연소득 3000만 원을 받는 것에 대하여, 그것은 '시장 경제의 기본 질서' 즉 공정경쟁(기회의 평등) 원칙이 준수된 것이므로 '정의롭다'고 말한다. 그에 반해 대기업 생산현장의 고졸 노동자들이 연봉 7000만 원을 받는 데 반해 중소기업의 대졸 사무직들이 연봉 3000만 원을 받는 것은 '공정 경쟁'의 원칙이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재벌대기업 노동자들의 특권과 특혜의 폐지가, 따라서 이를 위한 민주노총 기업별 노조의 약화·해체가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정태인과 김기원 같은 개혁적 진보 인사들이 민주노총을 '재벌과 야합한 진보의 적'으로 간주하면서 비판하는 이유가 바로 그러한 (진보적) 자유주의의 정의론에 근거하고 있다.

이에 반해 절차적 평등, 기회의 평등보다 실질적 평등(실질적 공정·공평)을 통한 '실질적 사회 정의'의 구현이 훨씬 더 시급하고도 중요하다고 보는 사회민주주의는 복지국가야말로 노동시장의 불공정, 불공평 문제를 해결하는 실질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특권과 특혜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기업별·특권적 복지를 국가적·보편적 복지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동시에 최저임금의 대폭 상향 조정과 산별노조 및 산별 단체교섭의 법률적 강제, 이를 통해 달성되는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의 국가적 관철이 필요하다. 이것이 노동민주화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등 모든 기업에 공통적으로 강제되는 산별 단체교섭 및 최저임금의 대폭 상향 규제와 같은 국가개입주의 없이, 어떻게 대기업과 중소기업 전체에 있어, 그리고 정규직 및 비정규직 모두에 있어,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라는 공정·공평의 원칙을 구현해낼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런데 이와 같은 보편적·국가적 복지와 산별노조·산별교섭은 모두 장하성과 김동춘, 정태인 등이 중시하는 '시장 경제의 기본 질서'(즉 공정한 시장경쟁과 기회의 평등)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그것은 '복지국가의 기본 질서'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떻게 복지와 복지국가 없이 정의로운 사회, 공정하고 공평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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