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산 죄가 빚 8천만 원
이렇게 하루하루 불안한 마음으로 등산객들에게 커피와 차를 열심히 팔아보지만, 한 달 100만 원에도 못미치는 노점 수입으로는 원금과 이자를 합쳐 7000~8000만 원은 족히 될 빚을 도저히 갚을 길이 없다.
그런 그녀가 '개인 파산/면책 신청'이란 걸 알고 상담차 방문했다. 주로 아이들 교육비와 막노동을 하다 다친 남편 병원비로 카드대출을 받고 다른 카드로 돌려막다 보니 어느 새 빚이 이만큼 불어나 버렸다. 말그대로 '열심히 살다보니 빚만 늘어난' 경우다. 숨겨둔 재산도 없고 도박 빚을 진 것도 아니어서 서류만 잘 준비한다면 법원에서 파산/면책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경우이다.
▲ 고리대금업을 방치하는 나라. 서민들은 오늘도 불법 대부업 광고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이상호 |
그런데 예기치 않는 암초가 있었다. 몇 해 전 가까운 친척의 권유로 아이들과 남편 앞으로 들어 둔 몇 개의 암보험이다. 혹 월보험료 5만 원 미만, 한 개 정도라면 법원에서 어떻게 잘 얘기해볼 수도 있겠지만 월 10여만 원이 넘는 이 보험들을 해약하지 않고서는 파산/면책을 받기가 어렵다. 이 상태로 법원에 파산 신청서를 낸다면, 판사는 보험을 해약한 후 받은 해약환급금으로 채권자들에게 빚을 조금이라도 고루 갚은 후 다시 오라는 경우가 많다.
10만 원 암보험료, 카드빚을 내서라도 납부
그녀가 파산 신청을 내기 위해선 암보험을 해약해야 했다. 그런데 그녀는 암보험을 깰 수 없다 말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월 2만 원의 '국민건강보험료'를 2년 가까이 내지 못하면서도 월 10만 원이 넘는 민간 암보험은 꼬박꼬박 내고 있었다. 신용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으면서까지 말이다. 빚이 불어나는데 암보험도 한몫 하고 있는 셈이다.
왜 그랬는지 물었다.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혹시라도 아이들이 아프거나 하면…" 내가 "국민건강보험료가 6개월 넘게 밀리면 아이들 감기로도 병원에 갈 수 없어요. 우선 암보험을 정리하고 환급액을 적절히 사용하세요. 그리고 국민건강보험료도 조금씩 분납하면서 파산/면책 신청을 해 보세요"라고 권했지만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 문을 나섰다. 그리고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암보험은 그녀에게 또 다른 자식이었다. 깨서는 안되는, 아니 깰 수 없는 놈이었다. 수천만 원 빚 독촉에 시달리면서도 암보험료는 내야 한다. 비슷한 사례로, 희귀난치성 질환을 앓고 있다는 30대 미용사 ㄴ씨도 수천만 원 빚에 허덕이면서도 매달 20만 원이 넘는 민간의료보험료 때문에 끝내 파산 신청에서 발길을 돌렸다. 민간의료보험이 법이 보장하는 개인파산/면책 신청도 가로막는 '족쇄'였다.
나는 내가 사는 지역에서 개인파산/면책 상담을 해오고 있다. '나홀로 빚 탈출!' 개인파산/면책 서류를 직접 작성해서 법원에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었다. 그런데 사무실을 찾은 이들 중에 면책결정까지 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는 사람은 10% 수준으로 많지 않았다. 이 중에는 ㄱ씨처럼 자식같은(?) 민간의료보험에 발목이 잡혀 파산 신청을 포기한 사례가 꽤 있다.
반면에 단란주점 사업이 망해 1억이 넘는 빚을 졌던 ㄷ씨(50대, 남성)는 매달 10만 원 넘게 내던 민간의료보험을 과감히 깨고 파산/면책 결정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택시 운전을 하면서 가족들과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동네에서 어쩌다 만나면 드링크제를 권하며 당시의 고통과 요즘의 해방감을 풀어놓기도 한다.
수술비보다 더 큰 선택진료비, 상급병실료
국민건강보험 보장성 60%! 우리나라 공적 건강보험제도의 현주소다. 소액 진료의 경우 40%의 본인부담금이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중병을 앓을 경우 상황이 심각해진다. 그리고 누구도 중병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나도 몇 해 전 복강경으로 탈장수술을 받았다. 이틀 입원하면서 나온 총 의료비가 120만 원이었다. 이 중 국민건강보험이 보장하는 수술비와 입원비 등 법정급여의 본인부담금은 40만 원에 불과했지만, 선택진료비, 상급병실료가 각각 40만 원씩이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수술비 부담보다 다른 비급여 항목 부담이 더 큰 셈이다. 간단한 탈장 수술이 이 정도인데 오래 입원해야 하는 중증질환의 경우는 초음파, MRI 검사비, 간병비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아픈게 죄가 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너도 나도 '민간의료보험 하나 쯤은 들어야지' 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나 역시 퇴원하면서 온 가족으로부터 "그 흔한 (민간) 보험 하나 안 들어두고 뭐했냐?"라는 질타를 받았다. 돈벌이도 시원치 않은 신세에 꿀먹은 벙어리마냥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전체 가구의 76%가 민간의료보험에 가입, 한 가구당 가입한 보험수가 3.6개, 가구당 월평균 보험료 21만 원, 전체 국민 부담은 22조 원(2008년, 한국의료패널). 그야말로 '민간의료보험 공화국'이다. 지금 식으로 민간의료보험이 덩치를 불린다면 국민건강보험을 아예 잡아먹을 날도 멀지 않았다.
능력껏 국민건강보험료 더 내서라도 꼭 무상의료를!
암보험에 발목잡혀 파산/면책 신청도 못한 노점상 ㄱ씨의 어리석음과 도덕적 해이를 추궁하면 이 문제가 해결될까?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 민간의료보험에 더 많이 가입하면 될까?
그렇지 않다. 민간의료보험은 가입자 전체가 보험료로 1만 원을 낼 경우 고작 3000~4000원만을 돌려줄 뿐이다. 로또 지급률 50%, 카지노 도박판의 배당률 75% 보다도 못하니 그야말로 '봉이 김선달'같은 놈이다. 가만히 앉아서 서민들의 의료비 불안을 교묘히 이용해 간을 내 먹는 건 보험사다.
모두가 국민건강보험이 취약해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질병 불안에 대응하기 위해선 울며 겨자먹기로 민간의료보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답은 국민건강보험 강화다.
▲ 지난 6월 18일 의사협회 앞에서 포괄수가제 도입이 무상의료로 가는 첫 출발이라고 외치는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회원들.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운동도 이러한 연장선에 있다.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 암보험 하나 더 들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병원비 걱정을 덜기 위해 1인당 평균 1만1000원씩(가구당 약 3만 원) 건강보험료를 더 내자'는 운동이다. '더불어 함께 잘 살자!'는 말, 구호로만 그치면 의미가 없다. 민간의료보험 때문에 파산신청조차 못하는 이 현실을 그대로 둘 것인가? 조금씩 능력껏 더 내더라도 서둘러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의료비를 해결하자. 우리가 직접 나서서 무상의료를 실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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