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침체는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 때문에 경제가 호황과 불황국면을 순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호황 뒤에는 불황이 오고 반대로 불황 뒤에는 호황이 온다.
그래서 약 50년을 단위로 하는 콘트라티에프 주기 등 경기순환에는 여러 주기들이 있다. 그럼에도 1929년의 디프레션을 경제공황, 또는 대공황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정도가 너무 심각하고 장기적이며 전 세계 경제를 파국으로 몰고 갈 정도로 큰 영향을 남겼기 때문이다.
세계경제는 1차대전으로 인해 침체되었다가 20년대 초부터 다시 살아나 20년대 내내 번영을 누렸다. 특히 미국경제가 그랬다. 미국은 1923년부터 1929년까지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다. 이 사이에 산업생산은 두 배로 늘었고 GDP는 40%가 증가할 정도였다. 미국이 전시의 피해가 없었던 반면 유럽국가들에게 군수품이나 식량을 팔아 막대한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나라나 부문이 그런 것은 아니다. 특히 농업부문은 20년대를 통해 위기를 맞고 있었다. 전시의 증가된 수요에 힘입어 경작지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1924-29년 사이에 국제 밀 가격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전시 수요로 광산에 대한 투자가 많이 이루어진 광산물 시장도 마찬가지였다.
또 1920년대 후반 유럽을 포함한 세계경제의 호황은 그렇게 건전한 것은 아니었다. 주로 미국자본의 수출과 미국 수입시장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특히 유럽은 미국경제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1924년부터 미국자본이 독일로 유입되어 독일경제를 크게 회복시켰고 그것이 다시 유럽전체의 경기상승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미국경제의 호황은 주식시장도 팽창시켰다. 주식가격은 1924년부터 5년 동안 꾸준히 올랐고 1928년부터는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투기 붐이 일던 주식시장이 1929년 10월 24일 돌연히 붕괴했기 때문이다. '마의 목요일'이라고 불린 이날 천정까지 올랐던 주식의 거품이 꺼지며 호황 국면이 끝났음을 알렸다.
▲ 1929.10.24일 증권시장의 갑작스런 붕괴로 충격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뉴욕 금융가인 월스트리트에 운집해있다. ⓒhttp://lancasteronline.com |
이는 미국의 주식투자자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으며 그 충격은 점차 실물경제 부문으로 파급되었다. 또 미국경제가 전 세계경제에서 차지하고 있는 큰 비중 때문에 이는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발전했다. 대공황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 경제공황이 온 이유는 무엇일가? 그 가운데 하나는 20년대 미국의 분배가 매우 불평등했다는 사실이다. 1929년에 가장 부유한 국민 1%가 국부의 60%를 점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1963년의 32.5%, 1983년의 41.8%에 비하면 약 1.5배에서 두 배 가량 되는 수치이다.
최상층 6만가구의 저축액이 하층 2,500만 가구의 저축액보다 더 많았다. 이렇게 국민소득의 더 많은 부분이 상층에 집중되며 경제는 점점 이들의 소비에 더 의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들의 소비는 경제에 활력을 줄만큼 크지는 않았다.
경제가 호황을 보이고 기업 이익이 빨리 늘게 되자 기업가들은 설비를 크게 확장했다. 그 결과 소비자들이 소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생산을 하게 되었다. 특히 과잉투자가 이루어진 곳은 자동차, 철강, 건설부문이다. 그러나 1928년과 29년에는 소비가 생산을 따르지 못했으므로 재고가 늘었다. 그에 따라 생산이 줄어들며 고용도 감소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 농민, 중산층들은 1928-9년의 높은 경제 성장을 지속시킬만한 경제여력이 없었다. 소비를 늘릴 수 없었던 것이다. 농민들의 소득은 1919년에는 전체 국민소득의 16%를 차지했으나 1929년에는 9%로 줄어들었다.
노동자들의 임금은 20년대에 10% 정도 올라갔으나 그것이 전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년대 초보다 떨어졌다. 노동절약적인 새 기계들이 도입되며 기술적 실업이 생겼다. 실업률은 20년대 내내 비교적 높아서 7%를 유지했다. 실업보험이나 연방정부의 복지계획이 아직 없었으므로 지속적인 실업은 빈곤과 구매력의 저하를 의미했다.
미국경제의 다른 내재적인 취약성은 국제경제 정책의 영역에도 있었다. 1차 대전 동안에 유럽 국가들이 미국의 은행들이나 국고로부터 수십억 달러를 빌렸기 때문에 미국은 세계의 주된 채권국가였다. 그러나 미국은 1920년대의 상황에서 무역정책을 변화시키지 않았다.
미국은 1920년대 내내 주된 유럽국가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해 높은 관세 장벽을 쌓고 무역흑자를 보았다. 자국 산업이나 농업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기업가나 정부가 채무를 물고 미국상품을 사도록 더 많은 돈을 대출해 주었다.
공황이 시작되자 손실을 보게 된 미국의 자본가들은 외국에 대해 새로운 차관 공여나 대출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만기가 된 차관을 더 이상 연장해주지 않았다. 더 이상 돈을 얻지 못하게 된 외국의 채무자들은 파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의 수출도 급락했다. 증권시장의 붕괴와 함께 급격하게 축소된 국제무역이 대공황의 주된 원인의 하나이다.
공황시기 미국의 경제상황은 어땠을까? 경기가 급속히 후퇴하며 1929년에서 1933년 사이에 다우존스 공업지수는 381에서 41로 떨어졌다. 자동차 판매는 1929년의 445만대에서 1932년에는 110만대로 떨어졌다. 그리하여 1929년에서 1933년 사이에 투자는 70억 달러에서 20억 달러로 감소했고 10만 개의 기업이 파산했다.
또 근 6,000개의 은행이 파산하며 일반 예금자들이 저축한 250억 달러의 예금도 사라졌다. 물건이 팔리지 않게 되자 도매물가도 40%가 떨어졌다. 경제규모가 이전보다 절반 정도로 축소되며 GNP는 800억 달러에서 420억 달러로 떨어졌다.
▲ 은행들이 계속 파산하자 파산하기 전에 자기가 예금한 돈을 찾기 위해 뉴욕 아메리칸 유니온 은행 앞에 몰려든 사람들(1931년). ⓒhttp://www.learnnc.org |
공황이 시작되었을 때 실업자 수는 300만 명이었으나 그 후 매주 10만 명이 일자리를 잃어 1933년 3월에는 전체 노동력의 1/4인 1,300만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파트타임으로 고용되거나 임금 삭감을 당했다. 그리하여 미국 노동력의 절반가량이 실업상태에 있거나 불완전 고용상태에 빠졌다. 노동임금도 이 4년 동안에 40%가 떨어졌다.
미국 자본가들이 해외에 투자된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하자 미국자본에 가장 많이 의존하던 독일은 큰 고통을 겪게 되었다. 다름슈타트은행 같은 유수의 은행이 무너지고 많은 기업들이 파산했다. 그러자 독일경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유럽 다른 나라들의 경제도 침체하기 시작했다.
공황의 진전에 따라 미국의 수입(輸入)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당시 전 세계가 미국에 대한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이는 자연스레 세계경제에도 타격을 가했다. 게다가 미국은 수입을 더 줄이기 위해 1930년에 관세를 인상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다. 결과적으로 전 세계가 온통 경제공황에 휩쓸리게 되었다.
▲ 취업을 위해 직접 거리로 나선 공황기의 미국인들. ⓒhttp://techbuddha.wordpress.com |
독일의 실업자 수는 1929년 여름에 80만 명이었으나 30년 12월에는 이미 300만 명으로 급증했다. 이는 31년 7월에는 550만 명으로, 1932년 초에는 전체 노동력의 35%인 600만 명에 달하며 엄청난 사회불안을 야기 시켰다. 산업생산도 50% 수준으로 떨어졌다.
영국과 프랑스 경제는 독일보다는 좀 덜 한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1929년 영국의 실업자 수는 120만 명이었으나 1932년에는 노동력의 22%인 270만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1936년까지도 200만 명 이하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프랑스는 다른 나라보다는 공황에 뒤늦게 휘말렸다. 그러나 불황이 한번 닥치자 프랑스에서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938년까지도 회복의 조짐은 없었고 산업생산은 1930년, 31년 수준을 밑돌았다.
경기침체는 선진국에만 해당한 일이 아니었다. 후진국들은 선진국의 수입이 줄자 마찬가지로 고통을 겪게 되었다. 1932년에 상황은 가장 악화되었다. 1929-32년 사이에 세계의 생산고는 38%, 무역은 66%가 감소했다. 수많은 실업자들이 거리를 헤맸고 그 외에 반실업자의 수도 말할 수 없이 많았다. 높은 실업률은 수요를 크게 하락시키고 그리하여 경제의 하향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공황이 가져온 대규모의 실업과 전반적인 경제침체는 각국의 정부로 하여금 즉각적인 행동을 요구했다. 엄청난 실업자의 대군과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빈곤선 이하의 사람들이 각 나라의 정부를 압박했던 것이다. 과격 정당들이 생겨나고 이들이 무능한 정부의 퇴진을 요구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부들은 과격한 정책을 취하기를 거부하고 온건한 구호정책에만 머물렀다. 그것은 그들이 고전자유주의경제학에 따랐기 때문이다. 고전경제학에서 경제는 순환적인 것이었으므로 불황이 오면 다시 호황이 올 때까지 정부가 할 일이란 기다리는 일 외에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대공황의 파국적 성격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국민들의 고통이 너무 컸으므로 다른 대안이 필요했다. 미국에서는 후버 대통령이 물러나고 1933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당선됨으로써 정책전환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는 공황을 해결하기 위해 뉴딜정책을 채용했다. 이는 J.M.케인스의 경제이론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케인스는 공황의 근본적인 원인이 과도한 공급이라기보다는 불충분한 수요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각 나라의 정부들이 경제에 직접 개입하여 화폐 공급을 늘리고, 공공사업을 시행하고, 조세정책을 통해 소득을 재분배함으로써 경기를 부양시키도록 충고했다. 이를 위해서는 적자재정도 감수해야 했다. 이는 경제의 자유를 중시해 온 미국적 전통에는 배치되는 것이나 당시 상황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루스벨트 정부는 농업조정법을 만들어 과잉생산에 의한 농산물 가격 하락을 막았다. 또 실업자 구제를 위해 대대적인 공공사업을 실시했다. 학교, 도로, 수로, 공원 등을 건설하고 사방사업, 조림 등의 자연보호 사업을 벌여 수백만 명의 실업자를 구제했다.
전국산업부흥법(NIRA)은 노사합의에 의해 경제를 안정시키려는 정책이다. 산업별로 임금과 노동시간(특히 최저임금, 최고 노동시간)을 결정하도록 했다. 이를 위해 노조의 조직권과 단체교섭권을 인정했다.
그 밖에 와그너법에 의해 노동자들의 단체교섭권을 강화했다. 또 이 시기에는 전통적인 직능별 노조(AFL) 외에 산업별노조(CIO)가 만들어지고 노조원수도 크게 확대됨으로써 노동계급의 힘이 과거보다 크게 강화되었다.
사회보장법에 의해서는 고소득과 상속재산에 대한 중과세, 또 누진법인세를 도입했다. 또 노령과 실업에 대비하여 고용인과 고용주가 공동 부담하는 노동자들의 보험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사회적 형평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 겨울철 긴급 구호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한 건물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http://network.nationalpost.com |
뉴딜정책을 통해 미국경제와 사회는 30년대 후반에 들어와 점점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1938년에 다시 심한 불경기가 오며 실업사태가 야기되었다. 장기간의 디프레션은 결과적으로 1939년에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군수경기가 살아나며 서서히 회복되었다.
독일의 경우는 히틀러의 나치당이 1933년에 집권하며 건설사업과 재무장정책을 통해 미국의 뉴딜 정책과 거의 비슷한 효과를 냈다. 1936년부터 실업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고 경제회복도 가시화되었다. 1938년에 가면 독일경제는 크게 호전되어 거의 완전고용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른 유럽국가들의 경제는 지지부진했다.
세계 각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대공황이 야기한 광범한 위기에 대처할 정치적이거나 지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공황이 심각한 경제, 사회적 나아가 정치적 문제를 야기하고 국제 공조체제가 무너짐에 따라 이제 정상적인 방법으로 사태를 수습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각 나라 정부들은 과격한 정책들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국제경제는 민족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갔다. 금본위제도가 포기됨으로써 환율을 정할 국제적 기준이 사라졌다. 각 나라들 사이에는 수입을 줄이고 수출을 늘이기 위해 환율을 낮추려는 환율전쟁이 벌어졌다. 또 너도나도 관세장벽을 설치하여 수입을 줄이려고 애썼다. 이는 그때까지의 자유무역적인 흐름을 역전시키는 것이었다.
민주주의 체제가 사회, 정치적 혼란을 감당하기 어려웠으므로 1차대전 이후 만들어진 많은 민주체제들이 무너지고 그 대신 파시즘 독재정권이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독일이나 이탈리아, 스페인만이 아니라 동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그런 상태에 빠졌다.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 같이 민주제도가 그 나름으로 정착된 나라들은 그것을 보전할 수 있었으나 이런 나라들에서도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같은 극단주의 운동들이 맹위를 떨쳤다.
대공황은 실업과 빈곤을 양산함으로써 개인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을 뿐 아니라 계급적, 인종적 갈등을 야기 시켰다.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의 급격한 성장은 그 결과이다. 국제체제가 무너짐에 따라 국가이기주의가 팽배하게 되었다.
특히 파시스트 국가들이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결국 2차 세계대전이라는 또 하나의 비극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공황이 전쟁을 야기 시켰으나 다른 한 편에서 전쟁이라는 대파국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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