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은 아이의 첫 돌이었다. 갓난아이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울었다. 혼자 아이를 돌보던 아내는 남편이 야속했다. 돌잔치가 끝나자마자 상의 없이 짐을 쌌던 남편이었다. 곧 끝나겠거니 하고 넘어갔던 파업이 조금씩 길어졌다. 급기야 며칠 만에 집에 들른 남편은 초췌한 얼굴로 아예 공장에 텐트를 챙겨갔다.
아내는 어린 아이를 들쳐 업고 음식을 싸들고 하루에 세 번씩 공장을 찾았다. 시간이 지나자 그마저 경찰에 막혔다. 전기가 끊겼다느니 공장 안으로 음식을 반입할 수 없다느니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공장 밖을 서성이며 아내는 가슴을 졸였다. "살아서 나올 수 있을까? 살아서만 나왔으면 좋겠다."
40명이 나눠먹은 '최후의 만찬'
11일 경기도 평택시에 꾸려진 쌍용차 가족들을 위한 심리치유센터 '와락'에 해고자의 아내들이 모였다. 옥쇄파업이 벌어진 지 3년이 지났지만 파업 노동자의 아내들은 여전히 파업의 기억을 떠올리기 힘들어했다.
해고자의 아내 최미경(34) 씨는 고개를 저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옥쇄파업 당시 최 씨는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앞에 있었다. 그의 손에는 닭볶음탕 10인분이 든 솥이 들려있었다. 솥뚜껑에 테이프로 몰래 담배를 붙이고 물병에 술을 담았다. "이 전쟁터에서 이거라도 주고 싶은데, 못 주면 안에 있는 사람들이 죽을 것 같아서 나도 죽겠더라고요."
2009년 7월 경찰은 공장 담을 빙 둘러쌌다. 파업 초반에 드나들던 개구멍에도 전경이 깔렸다. 담벼락을 서성이던 최 씨는 순찰하던 경찰과 눈이 마주쳤다. 경찰은 등에 업은 아이를 보고 일부러 걸음 속도를 늦춰줬다.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냄비를 줄에 묶어 올렸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20여 일간 최 씨는 공장 안에 들어간 남편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공장에 몇 번 찾아갔는데 앞에서 슬픈 노래가 나왔어요. 공장을 쳐다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났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닭볶음탕 10인분을 30~40명이 최후의 만찬이라면서 나눠 먹었다고 하더군요."
"나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싶어"
그는 남편이 해고되기 전까지는 넉넉하지는 않지만 오순도순 가정을 꾸렸다. 7년차 노동자였던 남편은 한 달에 120~150여만 원, 보너스를 받는 달에는 220~230만 원을 받았다. 월급의 절반은 잔업과 특근수당으로 채워졌지만, 2004년부터 중국 상하이자동차가 대주주로 들어온 이후부터는 잔업은 어림도 없었다.
회사는 정규직에게 사내 복지로 대학 학자금과 전세자금 저리 대출 혜택을 제공했다. 30대 부부들은 전세자금을 빌리고 학자금을 받을 꿈을 꿨지만, 회사가 어려워지자 사내 복지 혜택을 반납했다. "아직 애기가 어려서 복지제도가 좋다고 못 느꼈는데. 우리 신랑은 항상 그만한 직장이 어디 있느냐고 말했어요."
77일간의 옥쇄파업 뒤 해고된 남편은 복직 투쟁을 선택했다. 맞벌이를 하다가 아이 때문에 잠시 일을 쉬었던 최 씨는 생계전선에 나섰다. 시청에서 공공근로를 하고 70~80만 원을 쥐었다. 공공근로가 끝나자 부업으로 집에서 장갑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일했지만 아이를 키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쌍용차 파업 진압 당시 사진 모음. ⓒ뉴시스 |
남편이 해고된 지 한참이 지나고 평택 공장을 지나 시댁에 가는 길이었다. 남편이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우리 회사 쌍용자동차다. 준우야, 아빠 회사야." 최 씨는 기가 찼다. "난 쳐다보기도 싫은데, 어쩜 그런 말을 할까? 나라면 원망스러워서 그런 말을 못할 텐데 서슴없이 그런 얘기를 하더군요. 남편과 내 입장이 다른 거죠. 한참 이해 못했어요. 우리 부부도 극과 극을 달렸어요. 힘들었어요."
하루 2시간 자는 해고자 "눈만 감으면 파업 생각나…"
오해는 다른 해고자 아내들을 만나면서 조금씩 풀렸다. 그 전까지는 쌍용차 직원이면 다른 회사에서 안 뽑아준다는 말도 거짓말인 줄만 알았다. "쌍용차 해고자라면 낙오자 같은 느낌? 그런데 새 직장에서는 '넌 안 돼'라는 말을 뺑뺑 돌려서 말하죠." 실직자와 그의 가족들이 일용직을 전전하고, 하나둘 평택을 떠나는 동안 22명이 죽어갔다.
"평택역에 차려진 분향소에 가면 마음이 짠해요. 22개 영정사진에 얼굴이 없잖아요. 저는 거기 지나갈 때마다 쳐다보고 생각도 하는데, 일반인들은 별 생각 없겠죠? 일반인은 무심코 이게 뭘까 하고 스쳐지나가겠죠? 하지만 22명이 죽기까지 회사에서 아무 조치도 안 했다는 건, 직원이 아니라 일반인이 보기에도 인간적인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자른 것도 비인간적이지만 그 이후에 22명의 죽음에 아무 사과도 안 했잖아요."
최 씨는 와락 센터에 와서 '다른 쌍용 언니들'과 얘기하면서 더 깊이 남편을 이해하게 됐다. "여기 와서 마음이 한층 가벼워졌어요. 하소연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위안이었죠. 사실 남편도 소심해서 심리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거든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편하게 올 수 있는 곳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는 특히 가족 없이 혼자인 사람들이 죽음에 내몰릴까봐 걱정이었다. "우울증이 순간이잖아요. 나를 위해 걱정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삶에 희망을 잃는 거죠." 실제로 지난 3월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한 이 모 씨는 부모가 없고 미혼이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던 그의 시신은 뒤늦게 발견됐다.
"설문 조사하니 해고자 중에 40대인데 싱글인 사람이 많았어요.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로 결혼할 여자와 헤어진 사람이 기억나요. 눈을 뜨면 자꾸 그 생각이 난다더군요. '믿지 못하겠지만'이라면서 하루에 투잡을 뛰어서 2시간만 잔대요. 눈을 감으면 그때 생각나고 고통스러워져서 차 안에서 이동하면서 잔다고요. 1시간 넘게 그분과 통화했어요. 아직도 상처가 진행 중인 사람이 많았어요. 배우자, 부모님, 본인…"
권지영 와락 대표는 "해고자들의 나이가 대부분 30대 후반에서 40대 초중반"이라며 "이들은 자녀 비용이 굉장히 많이 들기 시작할 시기에 아무런 대안 없이 공장 밖으로 쫓겨나왔다"고 말했다. 권 대표는 "한국의 사회안전망은 실업급여 6개월이 다인데, 다른 대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비극은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프레시안(손문상) |
"네가 빨갱이냐, 파업 그만해라" 종용에…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은 1년 내내 몸에서 향냄새가 가시지 않는다고 했다. 죽음의 향내가 지겨운 이들이 2011년 10월 해고자와 가족들을 위해 경기도 평택시에 심리치유센터 '와락'을 만들었다. 18번째 죽음이 생긴 직후다. 해고자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권지영 와락 대표를 만났다. 권 대표는 "사람들은 경영을 잘못한 회사의 책임은 따지지 않고 귀족노조가 파업하면 회사가 망한다고만 비난한다"며 "대한민국 1%가 아니라 99%라면 이 노동자들의 삶이 어땠는지를 봐달라"고 호소했다. 프레시안 :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옥쇄파업을 한 지 3년째다. 무급휴직자는커녕 정직 2개월 처분을 받았던 사람도 단 한 명도 복직하지 못했다. 쌍용자동차는 휴직자를 우선 복귀한다면서 대졸 사원 신입 공채를 냈다. 옥쇄파업 이후에 회사가 대화를 시도한 적이 있나? 권지영 : 파업 이후에 회사와 대면할 일이 없었다. 그만큼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공장 안에 기업노조가 생겨서 해고자나 무급휴직자가 가입한 금속노조는 회사가 교섭대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진압 과정도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이었다. 정리해고 전에도 노조는 교섭도 못하고 쫓겨났는데, 그로 인해 22명이 죽도록 회사가 사과는커녕 아무 입장 표명도 안 했다. 이런 직장을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하고 자랑스러웠을까. 한국에서 가장 튼튼한 차라고 자랑하고 다녔을까. 배신감이 든다. 노사 합의 사항에 1년 뒤 무급휴직자는 순환 복직한다는 문구가 있다. 무급휴직자 459명은 아직 쌍용차 직원이다. 쌍용차 직원들을 못 불러들이면 회사가 성실하게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경영에 대한 책임은 회사가 지는데 경영을 잘못해서 사람들을 쫓아내놓고, 아무런 설명 없이 3년 동안 무급휴직자를 희망 고문하고 방치했다.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2개월 정직자, 1개월 감봉자, 비정규직 19명도 공장에 복귀를 안 시키면서 신규 비정규직을 100명 채용했다. 진심을 다한 해명과 사과가 우선돼야 한다. 자동차 부속품처럼 쓰이다가 쫓겨난 사람들이 죽어간다. 지금은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회사는 노동자는 물론이고 1만 명에 가까운 가족까지 구렁텅이에 몰아넣고 자기네들 입장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한다. 정치권이 쌍용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마다 "해결하고 싶으면 돈 갖고 오라"는 소리나 하고 있는데, 그러고서도 다른 누군가에게 "이 회사에 와서 네 꿈을 펼쳐라"라고 말할 수 있겠나? "6~7년차 월급이 120~130만 원…'회사 망한 게 노동자 탓'이라고?" 프레시안 : 일각에서는 '귀족노조' 때문에 회사가 망했다고 주장한다. 권지영 : 애기 아빠가 쌍용자동차에 6~7년 다녔지만 월급이 120~130만 원이었다. 보너스 받는 달에는 220~230만 원 정도 벌어왔다. 그런데 아는 언니가 "쌍용 다녀? 월급 많다며? 어머 그것밖에 안 돼? 난 쌍용 다닌다고 해서 정말 월급을 많이 받는 줄 알았어"라고 하더라. 물론 근속년수가 30년 넘는 사람은 그만큼 더 많이 받는다. 하지만 평균적인 월급은 부풀려졌다. 귀족노조 때문에 망했다는 말에 공감할 수 없다. 2004년 상하이차가 대주주로 들어오면서 회사가 신규투자를 안 했다. 신차를 개발하지 않는 회사의 차가 잘 팔리겠나? 투기자본이 쌍용차를 상하이차에 넘기고 먹고 튀었다. 회사가 그렇게 될지 뻔히 알면서 기술 유출시키고 회사의 껍데기만 남긴 책임을 왜 노동자가 져야 하는가? 정부는 왜 불법적으로 기술을 유출한 상하이차를 처벌하지 않나? 회사가 망한 이유가 임금 때문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그 논리대로라면 쌍용차보다 임금이 높은 현대차는 진작 망했어야 했다. 회사가 경영을 잘못한 책임을 따지지 않고 "귀족노조가 파업하면 회사가 망한다"고 말하기 전에, 대한민국 1%가 아니라 99%라면 이 노동자들의 삶이 어땠는지를 봐줬으면 한다. 물론 예전에 '무소'가 잘 팔려서 회사가 잘나갈 때, 현대차가 성과급을 2000~3000만 원 줄 때 쌍용차도 500~1000만 원씩 성과급을 주던 시절이 있었다. 자동차산업이 호황일 때였다. 그때의 기억을 가지고 사람들은 쌍용차노동자들을 비난한다. 정규직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생각하고 비정규직과 한목소리를 내는 건 맞다. 그런데 "정규직 때문에 회사가 망했으니 너희가 지금 고통스럽다"는 것은 아주 잔인한 논리다. 그런 댓글을 다는 사람도 어디를 다니든 노동자일 것 아닌가? 그들이 연대하지 않고 갈라치기하니, 해고자들은 어디도 소속할 수 없는 사람이 돼버렸다. 그런 댓글 다는 시간에 소외받는 곳을 한 번 더 돌아봤으면 한다. 회사에도 한마디하고 싶다. 상하이차에 이어 회사를 사들인 인도의 마힌드라가 해고자를 인정하지 않고 들어왔다. 마힌드라도 중국과 똑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해고자 문제에 대해 입장을 내야 한다. 무급휴직자, 해고자 문제를 짚고 넘어가지 않고는 쌍용차가 신뢰받는 기업으로 설 수 없을 것이다. 후진자본이 대한민국 브랜드라면 창피한 일이다. "내가 왜 해고 대상자여야 하지?" 프레시안 : 2009년 옥쇄파업 이후 3년 동안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가족 22명이 죽었다. 그 중에는 생계 문제에 시달려 자살한 사람도 있다. 일각에서는 왜 재취업해서 살 생각은 하지 않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느냐고 비난한다. 권지영 : 대부분은 해고되고 경제 문제 때문에 싸운다. 재취업해도 근무조건이나 급여수준이 쌍용차보다 차이가 많이 난다. 이렇게 얘기하면 사람들은 "귀족노동자로 있다가 조그만 곳에서 일하니까 못하겠지?"라고 비난한다. 아무리 회사가 작고 급여가 적고 일이 고되더라도 살려고 생각하면 재취업을 왜 못하겠나? 우리나라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그런 조건에서 일하는데…. 그런데 이 사람들이 "내가 왜 해고 대상자로 지목돼야 하는지" 납득할 만한 합리적인 설명을 한 번도 들은 적 없다. 그런 설명도 없이 평생직장이라고 믿었던 공장에서 매 맞다시피 하면서 쫓겨났다. 심리적으로 내가 왜 해고돼야 하는지 인정할 수 없고 억울한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다른 직장에서 적응할 수 있지만, 마음이 편치 않고 "왜 내 신세가 이렇게 됐나" 자신이 비참하고 초라하고 세상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은 생각에 빠진다. 게다가 집에서는 아내나 부모형제들이 파업 기간 내내 노동자를 지지하지 않았다. "나와라. 네가 빨갱이냐. 빨리 정신 차리고 나와라"라고 종용 받았다. "네가 하는 일이 옳고, 네가 지금 너의 가족뿐만 아니라 앞으로 정리해고로 피해 보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싸우는구나"라고 응원 받지 못했다. 그러니 "내가 큰 잘못을 해서 내 가족을 경제적으로 어렵게 했다"는 자괴감에 빠진다. 지역 사회로 나와도 "무능력하니까 해고됐지 이유 없이 해고됐겠어?"라는 시선이 있다. 쌍용차 출신이라고 하면 "저 사람들 써도 일 잘하겠어?"라는 낙인이 있다. 그러니 조금만 트러블이 생기면 무시당하는 것 같고 화나고 관계가 틀어진다. 사회관계가 틀어지니 집에서도 당연히 관계가 나빠진다. 심리적으로 힘없는 사람은 무너지고 도망가고 싶어진다. 이혼하거나 별거하거나 아니면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와이프 입장은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대부분 엄마들이 부업이나 아르바이트로 돈을 번다. 남편이 제대로 돈을 벌 수 없으니 남편을 위로하고 응원하기보다는 기다리다 지친다. 그래서 별거하거나 이혼한 사람이 많다. 해고 전에 단란한 일상이 깨져버렸다. 공장 밖으로 아무런 대안 없이 쫓겨나온 사람들 대부분이 30대 후반에서 40대 초중반이다. 자녀 양육 비용이 굉장히 많이 들 시기다. 그런데 한국의 사회 안전망은 실업급여 6개월이 전부다. 그 정도 대책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 사회안전망 없는 나라…"30, 40대 가장이 쫓겨나면 끝" 프레시안 : 한국에 사회 안전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한국은 남성 가장이 돈을 벌고 기업 내 복지에 의존하는 체제를 유지해 왔다. 그런 상황에서 기업 복지가 사라지니 가정이 받는 충격이 크다. 우리 사회가 사회 안전망을 어떻게 보완했으면 하나? 권지영 : 경영이 어려워지기 전에는 쌍용차에도 학자금 지원과 전세자금 대출이 있었다. 먹고 사는 문제와 아이들 교육비의 일정 부분을 기업이 담당하고 있었다. 사실 평범한 서민이 임금노동자로 받을 수 있는 혜택이 그 정도여도 크다. 우리가 파업 전에 반드시 불가피하게 해고하겠다면 그 혜택을 다 반납한다고 했다. 회사도 단협에서 보장된 복지를 다 중단했다. 연차수당까지 다 올스톱이었다. 아내들이 해고를 생각하지 못해서 미처 미래를 대비하지 못한 측면도 있다. 그런데 엄마들이 왜 직장을 안 구하고 싶겠나? 어린 아이를 안전하게 맡길 시설을 우리가 구축할 수는 없다. 기반시설이 부족한 상황에서 남편이 주야 12시간씩 맞교대하니 어쩔 수 없이 아이가 어리면 전업주부가 된다. 실직하면 다시 안전하게 재취업하도록 우리 사회가 지원해야한다. 당장 생활비를 벌어서 한 달 사는 서민들이 그런 상황에 처하면 교육, 주거, 일상을 지원하는 시스템이 마련됐으면 한다. 보다 근원적으로는 정리해고가 사라져야 한다. 내가 언제 이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면 사람이 얼마나 불안하겠나. 그 회사에 충성을 못한다. 잘리면서 살 준비해야 하니까 너무 힘들다. 정리해고 없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 돼야 한다. 일하고 싶은 사람은 언제나 안정적으로 성실하게 일할 수 있는 나라가 돼야 한다. 회사에서 쫓겨나도 이 회사만큼 대접받을 수 있으면 그렇게 격렬하게 옥상에서 떨어지면서까지 죽을 정도로 무서운 공포 앞에 싸웠겠나? 여기서 쫓겨나면 정규직 일자리는 없다. 비정규직, 장시간·저임금 노동 없는 세상이었으면 해고당해도 그렇게 격렬하고 처절하게 안 싸웠을 것이다. 사회 안전망 대책으로 좋은 일자리, 정리해고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그것이 정부가 세금 받는 이유 아니겠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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