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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난사' 고수남, '루저'는 어떻게 '괴물'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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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총기난사' 고수남, '루저'는 어떻게 '괴물'이 됐나

'아메리칸 드림'에 파괴된 이민자의 꿈, 레이건 혁명의 종착지

지난 2일 미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의 한 작은 신학대에서 한국계 미국인 고수남(43) 씨가 총기를 난사해 학생 및 직원 7명이 숨지고 3명이 다치는 비극이 있었다. 외신들은 주로 지난 2007년 버지니아대에서 33명을 살해한 조승희 사건을 함께 거론하며 실패한 이민이 만들어낸 비극에 초점을 맞춰 보도했다.

경제적 궁핍과 슬픔이 겹친 가족사, 자신의 영어 발음에 대한 옛 학우들의 비웃음 등이 고 씨를 극단적인 범행으로 이끌었다고 설명하는 보도도 있었다. 또한 대형 사건을 일으킨 용의자가 항상 취급받는 방식처럼 그의 정신 상태를 거론하며 '일반인과 다른' 사이코패스에 의한 범행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1999년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과 미국 정치의 연관성을 다룬 책 <격분하기>(Going Postal)를 펴냈던 마크 아메스는 7일(현지시간) 독립 탐사보도매체 <컨소시엄뉴스>에 올린 기사에서 더 깊은 분석을 내놨다. 이번 사건이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미국의 독특한 직장 내 총기 난사의 역사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메스는 1980년대 시작된 레이건 행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내몰린 이들이 직장에서 동료들을 향해 총기를 난사하는 일을 벌였고, 이후 학생들까지 유사한 행동을 하면서 '가까운 사람을 겨눈 대량학살'이 미국만이 가지고 있는 비극의 역사가 됐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실패한 아메리칸 드림'이라고만 묘사되는 고 씨의 최근 수 년간의 삶에 대해 자세히 추적한 아메스는 자신의 삶을 바꾸려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미국 특유의 낙관에 휩싸였다가 냉정한 현실에 부딪혀 절망한 인물로 고 씨를 그려냈다.

아메스는 자칫 고 씨에 대한 동정을 유발하는 이 기사가 고 씨의 범행을 옹호하려고 쓰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다음은 이 기사의 주요 내용이다. <편집자> (☞
원문 보기)

총기난사 사건의 이면

이번 사건이 벌어졌을 때 필자는 지난달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민간인 17명을 총으로 살해한 사건에 대한 글을 쓰고 있었다. 두 사건 모두 범인은 생포됐고 사형을 선고받을 처지에 놓였다. 드문 현상이다. 보통 이런 대량 학살극은 범인이 자기 입 안에 총구를 넣고 방아쇠를 당기면서 끝난다.

오이코스 신학대 캠퍼스 사건처럼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학살극은 끊임없이 벌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학교나 작업장 총기 난사는 항상 있는 일이라고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은 사실이 아니다. 이런 사건들은 오로지 우리가 사는 시대에 나타난 미국적인 현상이다. 1980년대 중반 미국 노동자를 희생물로 삼은 '레이건 혁명'(Reagan Revolution)의 공격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오클라호마 에드몬드에서 최초로 (대량 해고에 항의하는) 우체국 총기 난사 사건이 터졌다.

이 우체국 사건의 여파는 1980년대 말까지 다른 사업장으로 퍼져나갔고, 이후 미국의 '살인 역사'에서 정기적으로 나타나는 커다란 현상이 됐다.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도 어른들의 작업장에서 학교 안으로까지 번져갔다.

우리는 예전에도 대량 학살 사건을 겪었고, 때로는 다른 나라에서 발생한 광기어린 살인사건에 대한 기사를 읽는다. 그러나 오직 1980년대 중반 이후 미국에서만 해마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작업장이나 사무실을 공격하고, 학생들은 자신이 다니던 학교를 공격한다.

2008년 경제 충격 이후에야 몇몇 미국인들은 이 명확한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레이건 혁명이 가져온 부와 권력의 집중, 그리고 그 잔인함과 포식성이 새로운 형태의 살인행위를 불어왔다는 것을. 이 살인 행각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의 소행이라기 보단 게릴라나 반란을 일으킨 농부들이 표출하는 폭력과 더 유사하다.

▲ 지난 2일 미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의 한 신학대에서 총기난사 사건을 일으킨 고수남(43) 씨. ⓒAP=연합뉴스
다른 캠퍼스 총기 난사 범인들처럼, 이번 사건의 용의자 원 엘 고(One L. Goh, 한국명 고수남)는 이 작은 한국계 신학대의 간호학과 수업에서 지속적인 왕따와 업신여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왕따는 몇 주 전 클리블랜드에서 3명이 사망하고 5명이 다친 총기 난사 사건의 원인으로도 꼽혔다.

고 씨가 희생자들을 줄 세운 뒤 '처형'했고, (범행 전) 특정 여성을 찾아다녔다는 섬뜩한 내용은 그를 어렵지 않게 괴물이나 악마 같은 사이코패스로 묘사하게 한다. 그를 옹호하자는 건 아니지만, 누군가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말이 되게 설명해야 한다. 황량한 삶과 불어나는 빚, 실패한 결혼, 미 국세청(IRS)에 진 2만3000달러의 세금 체납액 등에 대한 설명 말이다.

희망을 잃다

고씨는 과거 무일푼 상황에서 건설회사 운영을 돕는 일을 했다. 그러나 2006~07년 미국 건설업은 통째로 붕괴했다. (전미 1위 모지기기업) 컨트리와이드 파이낸셜의 앙헬로 모질로 최고경영자(CEO) 정도가 아니라면 얼마간의 호황기를 맞이하더라도 성과를 보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2007년 말 고 씨는 버지니아 헤이즈의 요크뷰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버지니아 교외에 위치한 이 아파트는 황량한 조립식 건물처럼 보였다. 이듬해 여름 고 씨는 임대료 575달러를 두 달 연속 내지 못했다. 그 결과 아파트에서 쫓겨났는데, 임대인들은 그를 내쫓기 전 그의 차를 가져갔다.

당시 이웃에 따르면 이 미래의 총기 난사범은 그 모든 일들을 태연하게, 심지어 공손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웃에 살던 토마스 럼킨은 그에 대해 "항상 말쑥했고,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며 "그런 일을 벌일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럼킨은 또 자신 역시 아파트에서 쫓겨나면서 닛산 자동차를 압류당해 택시를 타고 터나던 날을 떠올렸다. 필자는 고 씨가 (아파트에서 쫓겨나) 택시를 탈 때 느꼈던 감정을 상상했다. 땅딸막한 40대 한국계 미국인 샌님이 말쑥한 차림으로 분노에 떨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택시를 타고 어디로 갔으며, 얼마나 멀리 갔을까.

결국 고 씨는 미 서부 해안 지역에서 부친과 함께 사는 처지가 됐다. 그의 아버지는 오클랜드에서 기독교계 비영리재단이 고령자를 대상으로 제공하는 주택에 살았다. 고 씨는 산 마테오에 있는 한 창고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부업으로 짐 나르는 일도 했다.

중년 나이의 실패자에게 샌프란시스코는 살기에 좋은 곳이 아니다. 뚱뚱한 40대의 괴짜가 데일리 시티의 식료품점에서 부친과 함께 일하기엔 지나치게 부유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그에겐 일종의 지옥이었고, 실패자들에겐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나서 지난해 이라크 파병 용사이자 미 특수부대의 영웅이었던 고 씨의 동생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동생이 몰던 도요타 자동차가 버지니아의 한 도로에서 주변에 있던 큰 바위에 정면충돌했다. 사고 장면을 기록한 사진은 매우 비현실적이었고 일부러 꾸며놓은 것 같았다. 이 사고의 여파는 고 씨의 모친에게까지 미쳐 몇 달 후 모친은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 사건은 고 씨가 1년 가까이 지속해오던 틀에 박힌 삶을 벗어나 간호사로서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운명적인 결정을 내린 배경이 됐다. 그는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부친도 (새 직업을 찾겠다는) 그를 독려했을 것이다. 고령자 아파트에서 부친과 함께 산 경험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홀아비가 된 고 씨의 부친은 6000달러를 대출해 아들의 대학 등록금을 댄다. 그러나 몇 달 후 고 씨는 학교를 그만뒀고, 억울함과 복수심을 품고 살인 행각을 준비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잘못된 '배팅'으로 6000달러를 날렸다.

사건의 시발점

무엇이 고 씨를 폭발하게 했나? 왜 그는 그렇게 일찍 학교를 떠났나? 많은 언론들은 그가 동료 학생들로부터 43살이라는 나이와 서툰 영어 발음 때문에 놀림을 당했다고 전했다. 고 씨를 놀렸다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한국 등 외국에서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기이한 일이다. (과거 또 다른 한국계 미국인 총기 난사범 역시 영어 때문에 놀림감이 됐었다. 2007년 버지니아대 총기난사 사건을 일으킨 조승희에 대해 동료 학생들은 "그가 읽기를 시작하자마자 전체 학급이 웃음을 터트리고 그를 손가락질 하며 '중국으로 돌아가'라고 했다"고 말했다)

고 씨는 캘리포니아주 전체에서 가장 형편없는 간호학과 중 하나에 등록했다. 오이코스 신학대는 기독교 근본주의를 기반으로 설립된 직업대학이다. 간호학과는 주 당국의 인가를 받았는데, 사립대학을 세워 돈을 벌기 위해 거쳐야 하는 중요한 절차다. 인가에 필요한 요건을 맞추기 위해 오이코스대는 간호학과 소속 학생들의 간호사 자격시험 결과 및 시험을 통과한 이들의 취업률을 기록한 '2010년 성과표'를 제출했다.

그 '성과'는 최악이었다. 그만큼이나 시험에 떨어지는게 통계적으로 가능한지 놀라울 정도였다. 2010년 간호학과를 다닌 28명 중 11명만이 국가자격증 시험을 통과했다.캘리포니아주 소비자불만센터 대변인에 따르면 간호사 자격시험의 전체 통과율이 75%인 상황에서 오이코스대가 기록한 이 성적은 이 학교 간호학과를 캘리포니아주 내 가장 형편없는 직업교육 프로그램으로 만들었다.

오이코스대는 학생들의 자격시험 준비도 제대로 못 시켰지만, 시험을 통과한 이들이 고용시장에서 일자리를 얻게 하는 것 역시 실패했다. 2010년 성과표를 보면 자격증을 취득한 11명의 학생 중 8명이 간호사 일자리를 얻었지만 연봉은 최저 5000달러였다. 1명만이 운 좋게 3만5000달러를 주는 일자리를 잡았다. 그들이 있는 베이 에리어(Bay Area)는 미국에서도 가장 부유한 지역이다.

고 씨는 자신이 품었던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이 최악의 간호학과를 선택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 대학 간호학과는 그의 꿈이 깨지리란 것을 보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오이코스대 앞에 희생자들을 위한 조화가 놓여져 있다. ⓒAP=연합뉴스

오이코스대는 왜 간호학과를 만들었나

오이코스 신학대가 확실하게 추진한 일은 한국계 미국인들에게 기독교 근본주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가해야 했다. 기독교 복음주의의 경건한 언어가 모든 것을 규정했다.

총장 김종인 씨는 학교의 비전을 "신의 뜻을 따르고 이를 통해 신의 나라를 확장하는 영적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오이코스대의 비전은 전 세계 교회에서부터 지역 공동체까지 모든 곳에서 세상을 바꾸고 신의 가호를 비는 신진 기독교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학교의 현실은 지난달 이 학교의 직원이었던 정 차(Jong Cha) 씨가 제기한 소송에서 드러난다. 그는 학교가 자신의 연봉 7만5000달러와 지난 2008년 개인적으로 대출받았던 1만 달러를 가로챘다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고 씨는 늙은 아버지에게 간신히 받은 돈을 캘리포니아주 최악의 간호학과를 운영하는 종교 장사꾼에게 넘겨줬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 같다.

한 가지 명심할 점이 있다. 오이코스대가 간호학과를 개설한 이유는 간단하다. 당신이 (학교법인의) 인가를 받고 싶다면, 간호학과가 고수익을 보장할 것이다. 캐플런 같은 대부분의 대형 영리교육계의 포식자들은 간호사와 같은 직업교육을 운영한다. 당신은 학생들에게 '미친 등록금'을 부과하고, 교사를 고용하며, 그 차익을 취하면서 원금을 담보로 정부의 대출을 받을 수도 있다.

오이코스대를 설립한 목사는 이걸 알았다. 그의 한 지인은 <뉴욕타임스>에 김 총장이 "학교의 종교 부문을 지원하기 위해 간호학과를 설립했다"고 말했다. 간호학과를 만든지 1년이 되자 않아 오이코스대는 덩치를 두 배로 불릴 수 있었다. 수익이 두 배로 늘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수익이 늘어났음에도 대학은 간호사 자격시험 결과를 개선할 방법을 알아낼 수 없었다. <오클랜드트리뷴>에 따르면 대학 측은 "학교가 어려운 시절을 겪고 있는 것" 같다면서 (나중에 소송을 제기한) 고위 직원의 봉급과 대출금을 가로챘다.

필자는 이런 일들이 대학에 등록금을 낸 고 씨를 폭발하게 했는지가 궁금하다. 자신이 학교에 속았고, 부친의 돈으로 잘못된 학교에 등록했다는 깨달음이 그를 폭발하게 한 원인일 수 있다. 2011년 그 해는 그의 동생과 모친을 잃은 해였다.

마지막 희망

부친의 지원 속에 간호사가 되겠다는 그의 계획과, 모든 것을 돌려놓으려는 최후의 절망적인 시도 사이에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는 실용적이고, 도덕적으로 선하며, 아버지와 같은 노인들을 돕는 일을 하려고 했다. (간호사가 됐다면) 꾸준한 소득을 올려 빚을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고 씨는 간호사로 새 삶을 살려고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할리우드 영화 등이 보여주는 문화적 프로파간다가 옳다면 고 씨는 자기를 변화시키려 하는데 대한 보상을 받았을 것이다.

지난해 잠시 고 씨의 기분이 (좋게) 바뀌었다. 앞으로 굉장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에게 식료품 창고 일자리를 줬던 업주는 보통 시무룩하고 조용한 사람으로 알았던 고 씨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전했다. 그는 고 씨가 "자신이 어떻게 학교로 돌아가 간호사가 되고 노인들을 도울 수 있을 지에 대해 자랑했다"고 덧붙였다.

자신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다는 생각, 스스로를 승리자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미국이 만들어낸, 가장 독성이 강한 문화적 묘약이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그 묘약을 받아들이는 이를 찾는데 실패한 적이 없었다.

물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가 부친의 돈을 사기당했따는 사실만 빼면. 고 씨의 전 고용주는 "그 나이에 학교로 돌아가려는 이는 많지 않다"며 "그는 뭔가 새로운 것을 해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가 이를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입학한지 몇 달 후 고 씨는 대학을 그만 둔다. 자퇴할 때 부친이 빌려준 6000달러를 돌려달라고 요청했고, 그 요청은 거부당했다. 그는 학교 행정처와 싸웠다. 하지만 그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이것이 그를 폭발하게 했다.

고 씨가 등록금 문제로 언쟁을 벌인 대상이자 사건이 벌어진 당일 날 찾아다녔던 직원이 누군지 드러났다. 엘린 서빌런 간호학과장이다. 그는 사건 당일 이스트 베이에 있는 캘리포니아주립대 간호학 수업 때문에 오이코스대를 떠나 있었다.

이제 서빌런은 왜 자신이 이 절망에 빠진 남자에게 등록금을 환불하지 않았는지 생각해야만 할까? 등록금을 돌려줬다면 어떻게 됐을까? 서빌런이 환불을 거부한 이유는 고 씨가 이미 학교를 몇 달 간 다녔다는데 있었다. 서빌런의 지인인 린다 뮤직에 따르면, 그는 심지어 고 씨가 자신이 앞으로 출석하지 않을 기간 만큼의 등록금이라도 돌려달라는 납득할 만한 요청마저도 거부했다.

서빌런의 환불 거부는 고 씨가 부친의 돈을 허공에 날려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 씨는 대학에 낸 6000달러를 다시 마련할 재간이 없었다. 그는 결코 부친에게 돈을 갚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시는 부친에게 그만큼의 돈을 밀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게 끝났다. 볼장 다 본 셈이다.

공감의 결여

왜 서빌런은 환불을 거부했을까? 그의 마음속에는 어떤 생각이 있었을까? 이 암묵적인 신분제 국가에서 공감대가 없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서빌런은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했을 것 같다. 서빌런은 "그곳에 있던 학생, 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가 날 찾고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며 "난 책임감을 느꼈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대학 관계자들은 고 씨를 사이코패스에 괴물이라고 했다. 행동 장애나 분노조절 장애를 겪었고 편집증이 있다고 했다. 마음이 건강한, 친절하고 평범한 사람은 다른 이들을 학살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고 씨의 '타깃'이었던 서빌런은 "그는 퇴학당한 게 아니다"라며 "그는 행동장애를 보이지 않았고 학교를 떠날 것을 요청받지도 않았다. 그 스스로 결정한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전직 직원의 법정 소송과 간호학과의 저조한 성과, 두 가족의 죽음 등 고 씨가 처한 상황은 정상적인 이들도 절망하고 분노하며 자살을 생각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경제적) 불공평으로 황폐해진 미국에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기회와 존엄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더 큰 맥락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원인 이외에도 그는 동료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그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고 종종 불만을 표했다. 이런 요인은 고 씨의 경우보다 나은 환경에서도 트라우마를 줄 수 있다. 하물며 고 씨처럼 나이든 '루저'에게 쏟아지는 동료 학생들의 조롱과 무시는 그를 파괴해버렸을 것이다. 고 씨를 가르치던 교사는 사건이 벌어진 후에도 "난 항상 그에게 '당신은 학교에 배우러 오지 친구를 사귀러 오는 게 아니다"라고 충고했다고 그를 비난했다. 오이코스대 사람들은 보다 나은 조언을 할 순 없었을까.

학교를 그만둔 후 고 씨는 부친과 함께 데일리 시티의 식료품점에서 몇 달 동안 함께 일했다. 그는 처음으로 돌아갔다. 실패를 겪었고, 사기를 당했으며, 부친을 기대를 저버려 놓고도 그의 옆에서 형편없는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을 자책했다.

당신은 고 씨가 자기계발의 환상과 희망이 사라졌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에 폭발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모든 것에 실패했다. 그는 이름 없는 실패자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아직 자신이 주목을 받는 한 가지 일을 할 수 있었다. 대량 학살이다. 당신이 사형수가 될 준비가 되어있다면, 그 옵션은 언제나 여기에 있다.

경찰의 설명에 따르면 고 씨는 지난 월요일(2일) 45구경 반자동 권총으로 무장하고 그의 마지막 행동을 위해 오이코스대 캠퍼스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처음부터 실패했다. 자신의 쫒던 직원은 사라졌다. 이에 따라 타깃은 오이코스대 전체로 바뀌었다. 이런 총기 난사 사건에서 종종 보이는 패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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