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의 희생을 딛고 독재자를 권좌에서 축출한 중동 국가들에 비해 '월가식' 점령 운동의 가시적인 성과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장의 결과만을 가지고 비폭력 저항 운동의 성과를 논하는 것은 시기 상조다. 과거 비슷한 경제적 양극화와 경기 침체를 겪고 있던 상황에서 비폭력 운동을 통해 평화적으로 권력을 이양했던 사례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비폭력 평화운동가로 잘 알려진 조지 레이키 미국 스화스모어대 교수는 25일(현지시간) 비폭력 운동에 대한 뉴스와 정보를 공유하는 웹사이트 <웨이징 논바이올런스>(http://wagingnonviolence.org)에 올린 글에서 이러한 비폭력 운동의 성공 사례로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역사를 소개했다.
레이키 교수는 두 나라가 현재 누리고 있는 높은 삶의 질과 경제적 평등의 역사에는 과거 '1%'에 저항했던 노동자와 중산 계급의 저항이 있었음을 상기시켰다. 그는 이들이 극단적인 방법으로 국가를 전복시킬 수도 있었지만, 비폭력을 지향하고 직접 행동과 대의 민주제를 병행함으로써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이 글의 주요 내용이다. <편집자> (☞원문 보기)
▲ 미 뉴욕의 월가 시위대. ⓒAP=연합뉴스 |
스웨덴과 노르웨이 국민들은 어떻게 '1%'의 권력을 깨트렸나
'점령' 운동이 지속적인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비폭력을 통해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와 경제 정의를 확립하는데 성공했던 다른 국가들을 참고해야 한다.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오랜 비폭력 투쟁 끝에 1930년대 정권 교체를 경험했던 국가들이다. 두 나라의 국민들은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던 '1%'를 물리치고, 과거와 다른 국가를 만들기 위한 기초를 쌓았다.
스웨덴과 노르웨이에는 끔직한 빈곤의 역사가 있었다. '1%'가 통치하던 시절 수십만 명이 배고픔을 피해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갔다. 하지만 노동 계급의 선도 아래 두 국가는 활발하고 성공적인 경제를 구축함으로써 가난을 거의 뿌리 뽑고 무상 대학교육의 폭을 넓혔으며, 빈민가를 없애고 훌륭한 건강보험과 완전고용 시스템을 만들었다.
노르웨이와 달리 스웨덴은 산유국이 아니지만, 미 중앙정보부(CIA)가 작성하는 '월드 팩트북'(World Factbook)의 최신 보고서에서 지칭한 "선망의 대상이 되는 생활 수준"을 위한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스웨덴의 스티그 라르손과 쿠르트 발란더, 노르웨이 조 네스보의 범죄와 부정부패를 다룬 소설을 읽은 독자들이 알게되는 것처럼 두 국가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들과 같은 비판적 성향의 좌파 작가들은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보다 공정한 사회가 되게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힘을 썼다.
하지만 필자가 1959년 학생 활동가 시절 노르웨이를 처음 찾아 언어와 문화를 배웠을 때 발견했던 그들의 '성취'는 놀라웠다. 예를 들어 한 작은 산업도시에서 몇 시간 동안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며 노후 주택이 있는지를 찾아보려다가 허탕을 친 기억이 있다. '작은 나라', '동질성', '가치에 대한 합의' 등 다른 국가와는 다른 어떤 점을 발견하려고 노력해 봤다. 그러나 결국 그런 노력을 포기했고, 대신 진짜 이유를 알게 됐다. 이들 자신의 역사 말이다.
필자는 스웨덴과 노르웨이 국민들이 비폭력 투쟁을 통해 자신들의 생활 수준을 성취하기 위한 대가를 치렀음을 알게 됐다. 북유럽 국가의 노동자들은 선거가 변화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던 때가 있었다. 그들은 '1%'가 나라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선거 민주주의'가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으며, 따라서 권력을 바꾸기 위해 비폭력 직접행동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두 국가에서 군인들은 1%를 호위하는 존재였다.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스웨덴 출신 영화감독 보 비더버그는 1969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던 <아달렌 31>에서 1931년 파업을 일으킨 노동자들이 살해되면서 총파업으로 확대됐던 스웨덴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풀어냈다.
노르웨이는 영국과 비슷한 넓이의 영토에 300만 명의 인구가 흩어져 있어서 단합된 민중 운동을 조직하는데 더 힘든 시간을 보냈다. 국민들은 산악지대와 피오르드 해안 등으로 분리된 땅에 살았고, 각기 다른 사투리를 썼다. 덴마크와 스웨덴은 19세기에 노르웨이를 연달아 통치했다. 1905년 노르웨이가 독립할 때까지 '노르웨이인'라는 말에는 '시골 촌뜨기'라는 뜻이 숨어 있었다.
1900년대 초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했을 때 그들은 대개 맑스주의에 의지했다. 당장의 이익을 추구하는 만큼 혁명도 조직하는 것이다. 그들은 제정 러시아의 전복에 환호했고, 노르웨이 노동당은 레닌이 조직한 공산당 인터내셔널에 가입했다.
그러나 오래 머무르진 않았다. 레닌주의식 전략과 노르웨이인들의 차이점 중 하나는 폭력의 역할이었다. 노르웨이인들은 조합을 세우고 선거 제도를 활용하는 등 집단적 비폭력 투쟁으로 혁명을 성취하길 원했다.
1920년대가 되자 파업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노르웨이의 항구도시 함메르페스트에서는 1921년 노동자평의회에 의해 코뮌이 만들어졌다. 이를 분쇄하기 위해 군이 개입했다. 노동자들의 대응은 전국적 총파업이었다. 국가의 지원을 받던 사용자 단체가 파업을 탄압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힘은 1923~24년 금속노동자 파업으로 다시 분출됐다.
노르웨이의 '1%'는 군에 의존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1926년 그들은 애국단(Patriotic League)이라 일컫는 사회운동을 일으키고 주로 중산층에서 단원들을 선발했다. 1930년대에 접어들자 애국단은 10만 명을 넘어섰는데, 이들은 무장을 갖추고 구사대로부터 파업 노동자를 보호했다.
동시에 노동당은 사업장에 노조가 결성됐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누구나 당원이 될 수 있게 했다. 중산층의 맑스주의자들과 몇몇 개혁가들이 입당했다. 지방의 많은 농장 노동자들과 영세 지주들도 들어왔다. 노동당 지도부는 오랜 투쟁을 거치면서 비폭력 운동에는 지속적인 지원과 조직활동이 필요다가는 점을 이해했다. 양극화가 심화되는 가운데 노르웨이 노동자들은 1928년 또 다른 파업과 불매 운동을 시작했다.
1931년 경제 공황이 최악의 상황에 달했다. 노르웨이는 북유럽의 어느 국가보다도 실업자가 많았다. 미국과 달리 노르웨이 노조는 조합비도 내지 못하는 실업자들도 노조원 신분을 유지했다. 이러한 결정은 대중 동원의 측면에서 성과를 거뒀다. 사용자단체가 임금을 삭감하기 위해 공장을 폐쇄했을 때, 노동자들은 대규모 시위로 맞섰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택담보대출이 위험해지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다) 경제 공황은 지속됐고, 농민들은 빚을 갚을 수가 없었다. 위기가 지방을 강타했을 때 군중들은 평화적으로 모여 농장을 뺏기지 않으려 했다. 많은 농민이 당원으로 가입한 농민당은 과거 보수당과 동맹을 맺기도 했지만 이제 '1%'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다수를 지배하는 소수의 능력이 의심받고 있었다.
1935년 노르웨이는 한계에 달했다. 보수당 정권은 날이 갈수록 정통성을 잃어갔다. 노동자와 농민들의 투지가 점점 더 커져가면서 '1%'는 점점 절망적인 상황이 됐다. 급진적인 노동 운동가들은 몇 년 안으로 국가가 완전히 전복될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빈곤층의 절망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졌고, 노동당 안에서는 빈곤층의 고통을 줄이라는 당원들의 압력이 점점 힘을 더해갔다. 상대 진영과 타협하고 정권을 이양받을 때에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됐다. 영세 지주들이 농장 소유권을 유지하고 계속 농장을 경영할 수 있도록 하는 합의 속에서 1935년 노동당은 농민당과의 연정으로 정권을 잡았다. 그들은 경제를 살리고, 나중에 노르웨이 경제 정책의 핵심이 된 완전고용 정책을 위한 공공사업을 시작했다. 노동당의 성공과 이어지는 노동자들의 투지는 모든 대규모 농장의 주요 지분을 공공 소유로 돌리는 등 '1%'의 특권에 꾸준히 침투해 들어갔다.
그 과정을 통해 '1%'는 경제와 사회를 지배했던 역사적 힘을 상실했다. 이후 30년 동안 보수당은 연정에 들어가지 못한 채 공공에 의한 생산수단 소유, 극단적인 누진세제, 공공재에 대한 강력한 사업규제, 사실상의 빈곤 근절 등 새로운 게임의 룰을 받아들였다. 보수당이 결국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려고 시도했을 때, 경제는 거품이 끼고 재앙 상황으로 향했다.(이 역시 익숙한 얘기이지 않나?)
노동당이 개입했다. 3곳의 대형 은행을 장악하고 최고 경영진을 해고했으며, 주주들에게 한 푼도 주지 않았고 소규모 은행에 대한 어떤 구제금융도 거부했다. '숙청'당한 노르웨이 금융 분야는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를 비켜갔다. 조심스럽게 규제됐고, 지분의 상당 부분이 공공에 의해 소유됨으로써 탄탄한 구조를 가췄다.
노르웨이인들은 당신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중산층 동맹과 함께 비폭력 투쟁을 전개해 공공선을 위한 통치를 위해 민중들에게 힘을 불어넣었을 때, 그들의 사회에서 보장된 높은 수준의 자유와 폭넓게 누리는 번영이 시작됐다는 사실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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