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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중립을 위한 조건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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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중립을 위한 조건 (10)

[한반도 중립화 통일의 길] 역사적인 조건 ⑦

1. 병자호란과 중립의 가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쫓겨간 인조는, 청나라에 대한 항복의 수위를 놓고 완급을 조절하기 위해 신하들과 심각한 논란을 벌였다. 이 논쟁 즉 '남한산성 논쟁'은 중립의 가치와 관련하여 많은 시사점을 준다. 광해군의 국제감각을 이어받은 최명길 최명길은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의 대열에 섰지만 실리와 타협을 추구한 광해군의 외교노선을 충실히 계승한 외교가였다.이 주화(主和; 청나라와의 강화교섭에 적극적임)를 주장했고, 이에 맞선 김상헌은 숭명사대의 척화(斥和; 오랑캐인 청나라와 싸워야하므로 되도록이면 청나라와의 강화교섭을 늦추며 버텨야 한다)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남한산성 논쟁에서 '중립ㆍ중립화ㆍ영세중립'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없었겠지만, 주화(主和)ㆍ척화(斥和)의 '和'를 어떻게 풀이하느냐에 따라 중립의 가치를 찾을 수 있겠다. 후금(청나라)의 실체를 인정한 광해군 중립외교의 맥을 이어간 최명길의 和(청나라와의 강화). 숭명사대의 모화주의 사상에 사로잡힌 김상헌의 和(강화 협상 자체는 반대하지 않지만 '再造之恩'이라는 명분에 따라 기피함). 이 두 '和'는 서로 지평이 다르다. 여기에서 해석학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해석학(Hermeneutik)은 문서로 기록된 유품에 대한 해석의 기술이다. 이해 기술의 핵심은 문헌(Text) 속에 포함된 인간 존재의 잔영(殘影)에 대한 해석과 이해이다.

해석학적인 이해를 위해, 주화파와 척화파를 선악 2분법적으로 구분(최명길은 광해군의 중립외교의 맥을 이었으니 善이고 척화파는 그렇지 않으니 惡이라고 구분)하면 안된다. 인조 자신이 주화파와 척화파의 이견을 조정한 끝에 항복의 예(三拜九叩頭禮)를 갖추기로 결단했기 때문에 선악 2분법은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에 서인 집권이 지속되면서 서인계통의 역사가들이 척화파의 입장에서 최명길을 '청나라 편에 선 악인(惡人)'으로 매도한 것이 오히려 선악 2분법적으므로, 이를 수정하는 뜻에서라도 해석학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2. 첫 번째 텍스트

해석학적인 이해를 위해, 남한산성 논쟁의 텍스트(Text)를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이삼성, 558~564 요약)

1637년 1월 2일 남한산성의 조선 조정은 청나라 진영에 보낼 외교문서를 두고 논란을 벌이고 있었다. 그 논란은 크게 보면 두 가지의 선택을 앞에 둔 것이었다. 항복문서를 쓸 것이냐 여전히 버틸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최명길과 홍서봉, 장유 등이 항복문서를 쓰는 데 동의하고 있었다. 김상헌은 여전히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항복문서를 쓰자는 쪽에서도 두 편으로 나뉘어 있었다. 항복을 받아들여 인조가 청 황제 앞에 나아가겠다는 문서를 작성하되, 청황제를 황제로 칭하지 않고 '한'(汗: 칸)으로 칭해야 한다는 일종의 제한적 항복론을 펴는 입장이 있었다. 최명길의 입장이 그러하였다. 항복을 하면서도 명분을 내세우려는 어정쩡한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홍서봉과 장유는 좀더 부드러운 문자를 채택하자는 입장을 개진한다. 어차피 항복문서를 쓰면서 청나라 황제의 화를 돋울 이유가 있느냐는 현실론이었다.

그날 "대신과 비국(청나라)의 신하를 인견하고 오랑캐에게 보낼 문서에 대해 의논한다"라는 제목하에 『인조실록』이 기록해둔 조정의 논란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최명길이 항복문서를 만들되, 청 황제를 '황제'로 칭하지 않고 '한'으로 부르자는 제안을 한다. 그러나 "예조판서 김상헌은 안 된다고 고집하였다"고 하였다. 그러자 최명길이 "참으로 저 말과 같으면 이는 화친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 시점에서도 화친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인 것이었다. 김상헌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주장한다. "한 번 한이 왔다는 말을 듣고 먼저 겁을 내어 차마 말하지 못할 일을 미리 강구하니, 신은 실로 마음 아프게 여깁니다." 여전히 명분론에 바탕을 둔 척화론을 견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에 인조는 "홍타이지[청나라의 임금]를 황제로 불러줄 것인지 아니면 '한'으로 부를 것인지는 중요한 명분문제이므로 좀더 논의하자는 신중론을 제청한다. 인조는 "이 한 건이 가장 중대하니 잘 생각하고 분간해서 처리하도록 하라"고 말한다.

마침내 인조가 결단을 내린다. "지금이야말로 존망(存亡)이 달려 있는 위급한 때이다. 위로 종묘사직이 있고 아래로 백성이 있으니 고담(高談)이나 하다가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하라. 예판[김상헌]은 여전히 고집만 부리지 말라." 명분론에 기초한 완고한 척화론을 여전히 고집하고 있는 김상헌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이었다.

바로 다음날인 1월 3일 조선은 홍타이지에게 보낼 항복문서를 작성한다.『인조실록』은 그 항복문서의 내용을 옮겨놓았다. 훗날 사관들 자신이 척화파의 정신적 전통을 잇는 터였다면, 치욕의 책임을 그 항서를 작성한 최명길 등 주화파에게 전가하면 되는 것이었다.

3. 두 번째 텍스트

위의 인용문이 좀 딱딱한 느낌을 주므로, 김훈의 소설『남한산성』140~143쪽에 나오는 최명길 대(對) 김상헌의 논쟁을 소개한다. 이 소설의 일러두기 첫머리에 '이 책은 소설이며,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는 취지에 따라 소설로 읽으면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이조판서 최명길이 헛기침으로 목청을 쓸어내렸다. 최명길의 어조는 차분했다
—전하, 적의 문서[남한산성 주변의 삼전도에 진을 치고 있는 청나라 임금이 보낸 항복요구 문서]가 비록 무도하나 신들을 성 밖으로 청하고 있느니 아마도 [청나라 진영에서] 화친할 뜻이 있을 것이옵니다. 글을 닦아서 응답할 일은 아니로되 신들을 성 밖으로 내보내 말길을 트게 하소서.

예조판서 김상헌이 손바닥으로 마루를 내리쳤다. 김상헌의 목소리는 떨려나왔다.
—화친이라 함은 국경을 사이에 두고 논할 수 있는 것이온데, 지금 적들이 대병을 몰아 이처럼 깊이 들어왔으니 화친은 가당치 않사옵니다. 화친은 곧 투항일 것이옵니다. 화친으로 적을 대하는 형식을 삼더라도 지킴으로써 내실을 돋우고 싸움으로써 맞서야만 화친의 길도 열릴 것이며, 싸우고 지키지 않으면 화친할 길은 마침내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화(和), 전(戰), 수(守)는 다르지 않사옵니다. 적의 문서를 군병들 앞에서 불살라 보여서 싸우고 지키려는 뜻을 밝히소서.

최명길은 더욱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판의 말은 말로써 옳으나 그 헤아림이 얕사옵니다. 화친을 형식으로 내세우면서 적이 성을 서둘러 취하지 않음은 성을 말려서 뿌리 뽑으려는 뜻이온데, 앉아서 말라죽을 날을 기다릴 수는 없사옵니다. 안이 피폐하면 내실을 도모할 수 없고, 내실이 없으면 어찌 나아가 싸울 수 있겠사옵니까. 싸울 자리에서 싸우고, 지킬 자리에서 지키고, 물러설 자리에서 물러서는 것이 사리일진대 여기가 대체 어느 자리이겠습니까. 더구나.....

김상헌이 최명길의 말을 끊었다.
—이것 보시오, 이판. 싸울 수 없는 자리에서 싸우는 것이 전(戰)이고, 지킬 수 없는 자리에서 지키는 것이 수(守)이며, 화해할 수 없는 때 화해하는 것은 화(和)가 아니라 항(降)이오, 아시겠소? 여기가 대체 어느 자리요?

최명길의 목소리는 더욱 가라앉았다. 최명길은 천천히 말했다.
—상헌[김상헌]의 말은 지극히 의로우나 그것은 말일 뿐입니다. 상헌은 말을 중히 여기고 생(生)을 가벼이 여기는 자이옵니다. 갇힌 성 안에서 어찌 말의 길을 따라가오리까.

김상헌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生)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최명길의 목소리에서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전하,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임금이 주먹으로 서안을 내리치며 소리 질렀다.
—어허, 그만들 해라. 그만들 해.

<인용 자료>
* 김훈『남한산성』초판 33쇄 (서울, 학고재, 2007)
* 이삼성『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파주, 한길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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