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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후보가 99%의 고통을 더 잘 보듬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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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후보가 99%의 고통을 더 잘 보듬어줄 수 있을까?"

[이정전 칼럼] "월가 시위를 끝내 이해 못하는 한나라당"

최근 우리 정치권을 뒤흔든 안철수 바람 그리고 정당 대표가 아닌, 시민 대표가 서울시장후보로 선출된 사건은 기존 제도권에 대한 우리 국민의 실망을 반영한다. 고질적 실업 문제와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기존 제도권의 무능이 우리 국민을 화나게 만들었다.

우리 국민만이 화가 난 것이 아니다. 2011년 9월부터 미국 국민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뉴욕 금융가 부자들의 비리와 뻔뻔스러움을 규탄하면서 시작한 가두시위가 들판의 불처럼 다른 대도시로 번져나가면서 자본주의 시장에 대한 규탄으로 발전하였다. 미국 금융시장이 미국 국민 99%의 희생위에 오직 1%를 위한 제도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 가두시위에 나온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비참한 99%에 속한다며 울분을 토했다. 그러자 유럽에서도 99%에 속한다고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시장의 불공정성을 규탄하는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고급 레스토랑에서 샴페인을 마시면서 이 시위를 내려다보던 금융가 부자들이나 보수주의자들은 그 가두시위가 경쟁에서 낙오한 무능력자들의 투정에 불과하다며 조롱하였다고 한다. 이 언론보도가 많은 사람들을 더욱 더 화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실 가두시위에 대한 이런 조롱은 부유층과 보수주의자의 솔직한 심정을 반영한 것이다. 이들은 실업을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양극화를 불공정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보수성향의 경제학자들은 이런 태도를 정당화하는 이론을 제공해준다. 이들이 즐겨 사용하는 비유는 '개미와 베짱이'에 대한 이솝우화다. 요컨대, 부자는 개미에 해당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베짱이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부자는 여름철에 땀 흘려 일하는 개미와 같고, 가난한 사람은 시원한 그늘에서 놀기를 선택한 베짱이와 같다. 부자는 겨울에 대비해서 열심히 저축한 개미와 같고, 가난한 사람은 여름 한 철을 마음껏 즐기기 위해서 겨울의 고생을 감수한 베짱이와 같다. 결국, 부자는 돈을 많이 벌기로 작정한 사람들이고, 실업자는 실업을 선택한 사람들이며, 가난한 사람들은 빈곤을 선택한 사람들이라는 얘기가 된다. 이렇게 각자가 알아서 선택한 결과를 누가 탓할 것이냐고 보수성향 경제학자들은 묻는다.

이런 개미와 베짱이 담론은 복지에 대한 보수주의자의 시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저소득계층에 대한 복지지출은 순전히 '시혜'에 불과하다고 이들은 말한다. 말이 시혜지 내용상으로 보면, 보수주의자의 머릿속에 있는 복지지출은 마치 귀찮게 구는 거지에게 먹다 남은 빵조각을 던져주듯이 저소득계층에게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태도로 던져주는 동냥에 불과하다. 전면 무상급식에 극력 반대해온 한나라당 사람들이나 여권 실세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들이 무상급식을 '먹다 남은 빵조각'처럼 생각한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먹다 남은 빵조각은 당연히 가난뱅이 집 아이들에게만 주어야지 어떻게 재벌의 손자에게 줄 수 있느냐는 말이 나온다. 이들은 모든 국민이 골고루 인간답게 살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복지지출은 그런 권리의 일부임을 마음속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수많은 실업자들이 진정 일하고 싶어 하며, 남들처럼 떳떳하게 세금을 내면서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잘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보수주의자도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며, 모든 국민이 골고루 잘 사는 가운데 참된 화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막상 말은 그렇게 하지만, 거지에게 먹다 남은 빵조각이나 던져주는 태도로 어떻게 참된 국민적 화합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인가. 개미와 베짱이는 같은 족속이 아니다. 부유층을 개미에 비유하고 빈곤층을 베짱이에 비유하는 태도는 부유층과 빈곤층은 같은 민족이 아닌 듯이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로는 국민이 함께 잘 어울리는 사회를 결코 일구어낼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태도가 필요한가? 자주 인용되는 미국 명판사의 얘기를 들어보자.

미국 뉴욕시에 세 명의 손자를 돌보는 가난한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일감이 없어서 끼니를 때우기 어려웠다. 손자들이 배고파 우는 모습을 보다 못한 이 할아버지는 빵집에 들어가서 빵을 훔쳤다. 하지만 곧 주인에게 들켜서 경찰에 넘겨졌고 그리고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을 맡은 판사는 이 노인에게 벌금형을 내렸다. 사정이야 어떻든 법을 어긴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판사는 노인에 대한 단죄로 그치지 않았다. 과연 무엇이 이 불쌍하고 힘없는 노인으로 하여금 빵을 훔치게 만들었는가를 진지하게 물었다. 그러고는 자신을 포함한 뉴욕시민 모두의 책임이라고 선언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벌금을 부과하였고, 재판정에 앉아있던 방청객들에게도 벌금을 내게 하였다. 그리고 즉석에서 그 벌금을 걷어서 노인에게 주었다. 그 노인은 벌금을 물고 남은 돈을 받아 쥐고는 눈물을 흘리며 법정을 떠났다.

이 판사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라과디어(F. Laguadia)판사이며, 그의 이 판결은 미국 역사상 명판결로 꼽히고 있다. 지금도 뉴욕시에는 이 판사의 이름을 기리기 위한 동상이 서 있다고 한다. 뉴욕시에는 두 개의 큰 공항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케네디공항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이 판사의 이름을 딴 라과디어공항이다.

최근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얘기가 자주 나온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국민 각자의 사회의식과 사회적 책임도 중요하다. 라과디어판사처럼 우리 사회의 실업과 빈곤에 대하여 우리 국민 모두가 책임을 느끼고 있어야 비로소 참된 국민적 화합의 길이 열린다. 빈곤층을 거지처럼 취급하는 무상급식이나 복지정책은 사회적 통합을 이룰 수 없다.

서울시장 선거 그리고 대선을 앞두고 우리가 꼭 짚어봐야 할 것은 바로 이점이다. 과연 어느 후보가 99%의 가두시위로부터 시대적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있으며, 우리 사회의 양극화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책임을 느끼고 있으며, 99%의 고통을 몸으로 이해하고 이를 보듬어줄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전면 무상급식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나라당 사람들은 99%의 가두시위가 어떤 시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아직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로이터=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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